- [끝나지 않은 분신](상) “나 죽으러 가네”···분신 김재기씨의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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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경향신문
입력 : 2015-03-08 22:29:35ㅣ수정 : 2015-03-11 18:47:38
“나 죽으러 가네.”
아내 정영아씨(44)가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말이다. 그저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 힘들어 내뱉은 푸념이려니 했다. 얼마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을 바꿔달라고 했다. 딸은 “응, 응” 하더니 다시 엄마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남편은 아들도 찾았다. 아들은 집에 없었다. “알았어. 끊을게.”
“당시에는 몰랐는데, 울먹이면서 끊었던 거 같아요.” 정씨는 흐느꼈다. 그의 눈물에는 억울함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남편은 평소 퇴근하고도 10분이 멀다하고 집을 나섰다.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급히 외출하는 일도 잦았다. 정씨가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남편은 “형님 만나고 올게” “노조 사무실 갔다 올게”라고 했다.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난 2월16일 오후 8시55분쯤. 남편 김재기씨(44)는 자신이 일하는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 본관 앞으로 갔다. 지나는 차량도 인적도 없었다. 그는 머리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었다. 불을 댕긴 듯, 그의 몸을 중심으로 화염이 솟구쳤다. 김씨는 급히 일어서더니 일곱여덟 발자국을 이동한 뒤 그 자리에 쓰러졌다. 9시4분쯤 건물 안에서 직원 한명이 나와 불길이 남아 몸을 감돌던 김씨를 발견했다.
김씨는 차량에 유서를 남겼다.
“못난 놈 먼저 갑니다. 그동안 함께한 동지들 매우 미안합니다. 조합 활동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끼네요. OO(앞서 목매 사망한 조합원) 동지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 시간이 되니 이해가 가는 군요. 제가 죽는다 해서 노동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우리 금타(금호타이어)만은 바뀌어졌으면 하는 제 바램입니다. 동지들 부디 노동자 세상이 와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제 세상에서 저도 노력할게요. 금타 노동자 파이팅.”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사망했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는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와 재산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분신해 숨졌다.
2015년 2월16일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서 일하던 김재기씨는 회사의 도급화에 반대하며 스스로를 불살랐다. 흔치 않은 노동자 분신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주요 신문과 방송도 김씨의 분신을 다루지 않거나 단신으로 처리했다. 일부 언론은 “부부싸움 뒤 집을 나갔다는 아내의 신고가 접수된 뒤”라며 김씨가 부부 싸움 때문에 분신한 듯 보도했다.
육신이 불에 탈 때의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한다. 그는 왜 이렇게 힘든 죽음을 선택했을까. 김씨에게는 동갑내기 아내가 있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쑥쑥 자라는 두 자녀도 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몸을 불살랐을까.
분신에도 잠잠한 현실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 2월24일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주 광산구 우산동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만평장례식장. 외진 곳에 위치한 장례식장 주변은 스산했다.
분신 9일째. 고인은 냉동실 속에서 말이 없었다. 빈소는 조용했다. 허망한 듯한 표정의 유족들도 지쳐 보였다. 한쪽에서는 직장 동료와 조합원들로 꾸려진 대책위원회가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고(故) 김재기씨의 아내 정영아씨. 검은색 상복의 정씨는 빈소에 달린 작은 방 소파에 앉아 남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방 한쪽 작은 창으로 스민 햇살에 눈물이 반사됐다. 손수건으로, 휴지로 닦아내도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듯했다. 눈물이 지나간 그의 두 볼에는 희미한 얼룩이 드리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정씨는 기자와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탁상을 싸고 있는 비닐 식탁보 군데군데에는 금호타이어 로고가 눈에 띄었다.
먼저 간 사람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고통과 눈물이라는 회고의 대가를 알면서도 기억은 떠난 이를 쉽게 보내주지 않는다. 인터뷰 중간 중간 정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했던 추억과 함께할 미래가 담긴 이야기는 다시금 가슴 속에서 ‘한(恨)’으로 응고되는 듯했다. 그때마다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 종이컵 한 가운데에도 금호타이어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김재기씨의 아내, 어머니, 형제, 직장 동료. 장례식장과 집회 현장에서 김씨와 가까이 지낸 이들을 만났다. 그들이 김재기씨와 나눈 휴대전화 메시지와 노조 활동이 담긴 각종 자료를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 그리고 한 직장에서 20년을 일하며 노동자로 살아온 어느 남자에 관한 기록이다.
■아내 이야기
1990년대 초 어느 날, 광주에 살던 스무 살 정영아씨는 집 근처를 지나다 무단횡단을 했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전투경찰이 정씨를 불렀다. 전경은 정씨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했다.
정씨는 덜컥 겁이 났다.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주민등록증을 집에 놓고 왔다며 거짓말도 했다. 전경은 끄떡도 않았다. 정씨도 끈질겼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했다.
결국 전경이 졌다. “대신 제과점에서 따뜻한 거나 한 잔 사주소.” 전경의 말에 둘은 근처 제과점으로 갔다.
인연이었을까.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께 얘기를 하다 보니 묵직한 전경과 끈질긴 정씨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정씨와 김재기씨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인연이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풋풋한 시절을 돌아보던 정씨가 짧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정
영아씨와 김재기씨는 1995년 결혼했다. 남편은 같은해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 취직했다. 둘은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첫 만남 때처럼, 남편은 아내를 이기는 법이 없었다. 동갑내기지만 남편은 정씨에게 “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정씨가 화를 내며 불만을 토로해도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러다 “미안하네. 자네 보기 미안하네” 짧게 답했다. 집안이 너더분하게
어질러져 있어도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정씨는 그런 남편을 보며 ‘한번쯤 화를 낼 때도 됐는데…’라고 생각했다.
“부부 싸움을 해도 제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어요. 외려 제가 그랬으면 그랬지. 물질적으로 못 살아도,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아내한테 변함없이 대해주고, 행동도 그대로고. 그게 부러워서….”
남편은 평소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담배만 조금 피웠다. 좋아도 크게 웃지 않았고, 싫어도 싫다는 내색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을 만 했으나 동료들을 욕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모함해도 “아휴”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것도, 남을 손가락질 하는 것도 싫어했다.
“옆에서 저 사람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면 그냥 놔두라며 말도 못하게 하는 성격이예요.”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아빠였다. 아내가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며 “점수가 잘 안나왔어”라고 하면 남편은 “뭐 그런 게 중요해”라고 했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뭐든 괜찮다.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고 했다. 남편은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B1A4’에 가끔 질투를 느끼는 ‘딸 바보’였다. ‘B1A4’가 음악 프로그램에 나오면 일하다가도 짬을 내 ARS 인기투표에 참가했다. 그리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 투표했네. 딸한테 말해 주소.”
지난 1월 아내와 딸이 ‘B1A4’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간다고 하자 남편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나섰다. 아내가 “돈도 많이 드는데 괜찮아”라고 하자 남편은 “가고 싶다”며 두 사람을 콘서트 장까지 바래다 줬다. 콘서트가 진행되는 3시간 동안, 남편은 밖에서 아내와 딸을 기다렸다. 친정 식구들에게도 남편은 기둥 같은 존재였다. 아내 정씨는 2남2녀 중 첫째다. 집안 행사를 남편이 도맡아 준비하는 등 정씨의 동생들과 모친도 그에게 많이 의지했다.

2013년 여름이 서서히 물러갈 때 즈음, 남편이 물었다. “노조 대의원 한번 해볼까.” 많이 고민한 듯 했다. 정씨는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다녀. 뭘 신경 쓰면서 그래”라고 했다. “그래. 나도 신경 쓰기 싫으니까 그러려네.” 대의원도 투표로 뽑는다고 남편은 말했다. 정씨는 생각했다. ‘저렇게 말 수 없는 사람이 대의원이 될 수 있을까.’
2013년 9월 어느 날, 남편은 노조 대의원이 됐다. 그 뒤부터 남편의 생활은 바빠졌다. 집에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자기 마누라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노조 다녀올게. 손님 만나고 올게”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고 바삐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일이 잦았다. 잠도 제대로 못잤다. 아내 정씨는 그런 남편이 야속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2014년 9월 공장의 위험한 작업 환경 문제를 꺼냈다가 징계를 당했다. 1주일 동안 회사 앞에서 항의 단식 농성을 한다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보고 싶었지만 그는 굳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한번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처자식 놔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투정도 부려봤다. 남편은 미안한 마음에 “1년 만, 한번만 더 할게”라며 달랬다. 남편은 2015년 여름까지만 대의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람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 혼이 빠진 것처럼. 집에 오면 가만히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고. 입맛 없다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어요. 잠도 몇시간 못자고. 빵 하나씩 먹고 가고….”
2014년 말, 남편의 힘든 기색은 더욱 역력했다. 평소 회사 얘기나 노조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도 대답은 짧았다. 그러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회사의 도급화 얘기도 꺼냈다.
“회사에서 날 무시하고 사장이 죽이려고 한다.”
남편은 회사가 자신을 표적 삼아 도급화를 한다고 했다. “나 때문에 다른 동료들도 다 죽을 수 있다.” 깊은 얘기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정씨도 평소처럼 장난치면서 웃어 넘겼다. 한편으론 회사 얘기를 잘 꺼내지 않던 남편이 ‘왜 그러나’ 의아했다. 하루는 집에 들어온 남편이 방에 누워 “회사에서 날 미행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 알아?” 남편은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라고만 했다. 분신 며칠 전에는 “나 광주 공장으로 갈까?”라고 물었다. 정씨는 “그래. 집에서도 가깝고 기름 값도 덜 들잖아”라고 답했다.
지난 2월16일. 남편이 오후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집 근처에서 오후 1시20분쯤 곡성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됐다. 광주에서 곡성까지는 약 40㎞.
무슨 일인지 남편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오후 1시가 넘어서도 연락이 없었다. 볼일을 보고 바로 출근했거니 정씨는 생각했다.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오후 6시 넘어서 집에 들어온 것 같아요.”
평소 같으면 한창 일할 시간에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연차를 썼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 이상했다. 기분도 몹시 안좋아 보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정씨의 툴툴대는 물음에 남편은 아무 말 없었다. 30분보다 짧은,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남편이 다시 집을 나갔다.

“나 죽으러 가네.”
불안한 마음에 정씨는 서울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동생에게 전화해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위치추적을 하라고 했다. 동생은 사유가 분명해야 위치 추적을 할 수 있다며 싸웠다는 이유를 대라고 조언했다.
“부부싸움 안하고 사는 부부가 어딨어요. 제가 투덜대긴 했어도 갑자기 혼자서 자기 몸에다 불사르는 게 보통 일인가요. 그냥 가만히 있는 성격이라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게 꿈일까 생시일까….”
정씨는 이날 오후 11시가 넘어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분신한 본관 앞, 사람들이 북적였다.
“나 죽으러 가네.”
아내 정영아씨(44)가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말이다. 그저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 힘들어 내뱉은 푸념이려니 했다. 얼마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을 바꿔달라고 했다. 딸은 “응, 응” 하더니 다시 엄마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남편은 아들도 찾았다. 아들은 집에 없었다. “알았어. 끊을게.”
“당시에는 몰랐는데, 울먹이면서 끊었던 거 같아요.” 정씨는 흐느꼈다. 그의 눈물에는 억울함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남편은 평소 퇴근하고도 10분이 멀다하고 집을 나섰다.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급히 외출하는 일도 잦았다. 정씨가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남편은 “형님 만나고 올게” “노조 사무실 갔다 올게”라고 했다.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영아씨(왼쪽)와 남편 고(故) 김재기씨.
지난 2월16일 오후 8시55분쯤. 남편 김재기씨(44)는 자신이 일하는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 본관 앞으로 갔다. 지나는 차량도 인적도 없었다. 그는 머리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었다. 불을 댕긴 듯, 그의 몸을 중심으로 화염이 솟구쳤다. 김씨는 급히 일어서더니 일곱여덟 발자국을 이동한 뒤 그 자리에 쓰러졌다. 9시4분쯤 건물 안에서 직원 한명이 나와 불길이 남아 몸을 감돌던 김씨를 발견했다.
김씨는 차량에 유서를 남겼다.
“못난 놈 먼저 갑니다. 그동안 함께한 동지들 매우 미안합니다. 조합 활동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끼네요. OO(앞서 목매 사망한 조합원) 동지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 시간이 되니 이해가 가는 군요. 제가 죽는다 해서 노동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우리 금타(금호타이어)만은 바뀌어졌으면 하는 제 바램입니다. 동지들 부디 노동자 세상이 와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제 세상에서 저도 노력할게요. 금타 노동자 파이팅.”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사망했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는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와 재산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분신해 숨졌다.
2015년 2월16일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서 일하던 김재기씨는 회사의 도급화에 반대하며 스스로를 불살랐다. 흔치 않은 노동자 분신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주요 신문과 방송도 김씨의 분신을 다루지 않거나 단신으로 처리했다. 일부 언론은 “부부싸움 뒤 집을 나갔다는 아내의 신고가 접수된 뒤”라며 김씨가 부부 싸움 때문에 분신한 듯 보도했다.
육신이 불에 탈 때의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한다. 그는 왜 이렇게 힘든 죽음을 선택했을까. 김씨에게는 동갑내기 아내가 있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쑥쑥 자라는 두 자녀도 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몸을 불살랐을까.
분신에도 잠잠한 현실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 2월24일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주 광산구 우산동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만평장례식장. 외진 곳에 위치한 장례식장 주변은 스산했다.
분신 9일째. 고인은 냉동실 속에서 말이 없었다. 빈소는 조용했다. 허망한 듯한 표정의 유족들도 지쳐 보였다. 한쪽에서는 직장 동료와 조합원들로 꾸려진 대책위원회가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지난 2월16일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 본관 앞에서 분신 사망한 김재기씨의 유서.
고(故) 김재기씨의 아내 정영아씨. 검은색 상복의 정씨는 빈소에 달린 작은 방 소파에 앉아 남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방 한쪽 작은 창으로 스민 햇살에 눈물이 반사됐다. 손수건으로, 휴지로 닦아내도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듯했다. 눈물이 지나간 그의 두 볼에는 희미한 얼룩이 드리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정씨는 기자와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탁상을 싸고 있는 비닐 식탁보 군데군데에는 금호타이어 로고가 눈에 띄었다.
먼저 간 사람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고통과 눈물이라는 회고의 대가를 알면서도 기억은 떠난 이를 쉽게 보내주지 않는다. 인터뷰 중간 중간 정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했던 추억과 함께할 미래가 담긴 이야기는 다시금 가슴 속에서 ‘한(恨)’으로 응고되는 듯했다. 그때마다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 종이컵 한 가운데에도 금호타이어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김재기씨의 아내, 어머니, 형제, 직장 동료. 장례식장과 집회 현장에서 김씨와 가까이 지낸 이들을 만났다. 그들이 김재기씨와 나눈 휴대전화 메시지와 노조 활동이 담긴 각종 자료를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 그리고 한 직장에서 20년을 일하며 노동자로 살아온 어느 남자에 관한 기록이다.
■아내 이야기
1990년대 초 어느 날, 광주에 살던 스무 살 정영아씨는 집 근처를 지나다 무단횡단을 했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전투경찰이 정씨를 불렀다. 전경은 정씨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했다.
정씨는 덜컥 겁이 났다.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주민등록증을 집에 놓고 왔다며 거짓말도 했다. 전경은 끄떡도 않았다. 정씨도 끈질겼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했다.
결국 전경이 졌다. “대신 제과점에서 따뜻한 거나 한 잔 사주소.” 전경의 말에 둘은 근처 제과점으로 갔다.
인연이었을까.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께 얘기를 하다 보니 묵직한 전경과 끈질긴 정씨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정씨와 김재기씨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인연이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풋풋한 시절을 돌아보던 정씨가 짧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고(故) 김재기씨의 아내 정영아씨. | 정희완 기자
“부부 싸움을 해도 제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어요. 외려 제가 그랬으면 그랬지. 물질적으로 못 살아도,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아내한테 변함없이 대해주고, 행동도 그대로고. 그게 부러워서….”
남편은 평소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담배만 조금 피웠다. 좋아도 크게 웃지 않았고, 싫어도 싫다는 내색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을 만 했으나 동료들을 욕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모함해도 “아휴”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것도, 남을 손가락질 하는 것도 싫어했다.
“옆에서 저 사람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면 그냥 놔두라며 말도 못하게 하는 성격이예요.”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아빠였다. 아내가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며 “점수가 잘 안나왔어”라고 하면 남편은 “뭐 그런 게 중요해”라고 했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뭐든 괜찮다.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고 했다. 남편은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B1A4’에 가끔 질투를 느끼는 ‘딸 바보’였다. ‘B1A4’가 음악 프로그램에 나오면 일하다가도 짬을 내 ARS 인기투표에 참가했다. 그리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 투표했네. 딸한테 말해 주소.”
지난 1월 아내와 딸이 ‘B1A4’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간다고 하자 남편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나섰다. 아내가 “돈도 많이 드는데 괜찮아”라고 하자 남편은 “가고 싶다”며 두 사람을 콘서트 장까지 바래다 줬다. 콘서트가 진행되는 3시간 동안, 남편은 밖에서 아내와 딸을 기다렸다. 친정 식구들에게도 남편은 기둥 같은 존재였다. 아내 정씨는 2남2녀 중 첫째다. 집안 행사를 남편이 도맡아 준비하는 등 정씨의 동생들과 모친도 그에게 많이 의지했다.

고(故) 김재기씨 생전 모습.
2013년 여름이 서서히 물러갈 때 즈음, 남편이 물었다. “노조 대의원 한번 해볼까.” 많이 고민한 듯 했다. 정씨는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다녀. 뭘 신경 쓰면서 그래”라고 했다. “그래. 나도 신경 쓰기 싫으니까 그러려네.” 대의원도 투표로 뽑는다고 남편은 말했다. 정씨는 생각했다. ‘저렇게 말 수 없는 사람이 대의원이 될 수 있을까.’
2013년 9월 어느 날, 남편은 노조 대의원이 됐다. 그 뒤부터 남편의 생활은 바빠졌다. 집에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자기 마누라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노조 다녀올게. 손님 만나고 올게”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고 바삐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일이 잦았다. 잠도 제대로 못잤다. 아내 정씨는 그런 남편이 야속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2014년 9월 공장의 위험한 작업 환경 문제를 꺼냈다가 징계를 당했다. 1주일 동안 회사 앞에서 항의 단식 농성을 한다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보고 싶었지만 그는 굳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한번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처자식 놔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투정도 부려봤다. 남편은 미안한 마음에 “1년 만, 한번만 더 할게”라며 달랬다. 남편은 2015년 여름까지만 대의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람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 혼이 빠진 것처럼. 집에 오면 가만히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고. 입맛 없다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어요. 잠도 몇시간 못자고. 빵 하나씩 먹고 가고….”
2014년 말, 남편의 힘든 기색은 더욱 역력했다. 평소 회사 얘기나 노조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도 대답은 짧았다. 그러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회사의 도급화 얘기도 꺼냈다.
“회사에서 날 무시하고 사장이 죽이려고 한다.”
남편은 회사가 자신을 표적 삼아 도급화를 한다고 했다. “나 때문에 다른 동료들도 다 죽을 수 있다.” 깊은 얘기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정씨도 평소처럼 장난치면서 웃어 넘겼다. 한편으론 회사 얘기를 잘 꺼내지 않던 남편이 ‘왜 그러나’ 의아했다. 하루는 집에 들어온 남편이 방에 누워 “회사에서 날 미행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 알아?” 남편은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라고만 했다. 분신 며칠 전에는 “나 광주 공장으로 갈까?”라고 물었다. 정씨는 “그래. 집에서도 가깝고 기름 값도 덜 들잖아”라고 답했다.
지난 2월16일. 남편이 오후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집 근처에서 오후 1시20분쯤 곡성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됐다. 광주에서 곡성까지는 약 40㎞.
무슨 일인지 남편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오후 1시가 넘어서도 연락이 없었다. 볼일을 보고 바로 출근했거니 정씨는 생각했다.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오후 6시 넘어서 집에 들어온 것 같아요.”
평소 같으면 한창 일할 시간에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연차를 썼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 이상했다. 기분도 몹시 안좋아 보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정씨의 툴툴대는 물음에 남편은 아무 말 없었다. 30분보다 짧은,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남편이 다시 집을 나갔다.

지난 2월17일 김재기씨가 분신 사망한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 본관 앞에서 곡성 공장과 민주노총 광주본부 조합원 등이 모여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 민주노총 광주본부 제공
“나 죽으러 가네.”
불안한 마음에 정씨는 서울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동생에게 전화해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위치추적을 하라고 했다. 동생은 사유가 분명해야 위치 추적을 할 수 있다며 싸웠다는 이유를 대라고 조언했다.
“부부싸움 안하고 사는 부부가 어딨어요. 제가 투덜대긴 했어도 갑자기 혼자서 자기 몸에다 불사르는 게 보통 일인가요. 그냥 가만히 있는 성격이라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게 꿈일까 생시일까….”
정씨는 이날 오후 11시가 넘어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분신한 본관 앞, 사람들이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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