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끝내 희망은 농업에 있다 임실의 신태근

참된 2014. 7. 5. 02:17

끝내 희망은 농업에 있다임실의 신태근

최용탁  |  kplnews@hanmail.net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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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2.18  08: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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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태근, 그의 꿈은 농촌을 서로 함께 사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선생을 만나기로 한 곳은 임실읍사무소 2층이었다. 읍민들을 위한 문화센터에서 선생은 한창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여러 서예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출중한 글씨 실력을 가진 선생은 서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했다. 정신집중과 건강에 좋은 취미이며 과거에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여러 어른들도 서예를 한다고 했다.

다정다감한 어조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선생의 표정은 담담했다. 일 년 넘게 뇌졸중으로 투병하고 있는 아내를 돌보는 중이라고 했다. 작년에 돌아가신 노금노 선생이나 역시 투병중인 이수금 선생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짙은 외로움이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선생은 오랜 세월 농민운동을 한 분답게 연로한 나이임에도 기억력이 또렷했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했다. 선생이 살아온 내력도 대단했지만 그 속에서 닦은 인품이 절로 배어나오는 즐거운 자리였다.

젊은 시절, 치즈와 만나다

신태근은 원래 전북 부안군 하서면이 고향이다. 193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일곱이다. 8남매의 셋째로 태어났지만 스무 마지기 정도의 논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를 곯지는 않았다.

부안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후 신태근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촌운동을 하고자 했다. 오랜 가난과 무지에서 깨어나 새로운 농촌을 건설하고자 하는 꿈은 당시 많은 생각 있는 젊은이들이 품었던 뜻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때로선 고학력인데다 머리도 좋은 아들이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신태근은 공무원 시험을 보았고 농업기술직으로 공채되었다. 하지만 공무원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으레 농민들을 깔보고 관료적으로 대했다.

“한 마디로 농민들을 위한 공무원이 아니었어요. 한 해에는 가뭄이 심했는데, 공무원들을 다 동원해서 대파를 하라고 하는 거요. 그러다 비가 오면 다 죽어버리거든. 안 되는 건 줄 알면서도 실적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걸 보고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

결국 공무원 생활은 4년 만에 접게 되었다. 거기에는 신태근 인생에서 중요한 하나의 만남이 있었다. 바로 지정환 신부와의 만남이었다. 지정환 신부는 벨기에 출신으로 1959년 12월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다른 신부들과는 조금 달랐다. 포교보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한국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신념이 우선이었다.

처음으로 부임한 부안성당에서 신태근과 만났고 다섯 살 위인 지정환과 두 사람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부안에서 간척사업을 통해 농민들에게 땅을 마련해주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펼친 지정환은 전북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인 임실로 부임한다. 그리고 임실의 농민들을 위해 생소하기 짝이 없는 치즈가공을 시작한다.

지정환 신부의 계획과 뜻에 찬동한 신태근은 고향을 떠나 임실로 이사를 왔다. 이미 결혼하여 큰 아들을 둔 서른 살 때였다. 임실에서 치즈를 만들기로 한 것은 임실이 가진 자연조건 때문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이고 오염되지 않은 땅과 물은 신선한 원유를 얻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축산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보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치즈라고는 미군부대를 통해 들어오는 극소량만이 국내에, 그것도 특별한 사람에게 유통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즈가 무언지도 모를 때였다. 신태근은 지정환 신부와 함께 치즈 생산에 매달렸다.

자신은 산골짝이 손바닥만한 밭 한 뙈기에 고구마나 푸성귀를 심고 산양 한 마리를 키웠다. 매일 얼마 안 되는 산양 젖을 짜 주전자에 담아 3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 치즈공장으로 가져갔다. 공장이라야 흙벽돌을 쌓아 만든 예닐곱 평 정도의 크기였다. 그 안에 무려 12미터에 이르는 굴을 파고 치즈를 숙성시켰다.

“처음 6, 7년 동안은 말도 못하는 고생을 했어요. 가끔씩 큰 형님네 가서 보리쌀을 얻어다 먹었어요. 치즈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당시에 냉각기가 있나, 전기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원유가 금방 상해버려요. 상한 원유로는 치즈를 만들 수가 없거든. 신부님이 프랑스로 이탈리아로 다니면서 기술을 배워오기도 하고 전문가를 외국에서 초빙하기도 하면서 겨우 제대로 된 치즈를 만들어냈어요.”

1967년부터 시작한 치즈공장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게 1973년부터였다. 그동안 운영한 자금은 지정환 신부가 본국의 친지나 친구들에게 구걸하다시피 얻어온 돈이었다.

치즈가 만들어져도 판로가 없으니 수입이 생겨날 리 없었다.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판로를 열어보려했지만 선뜻 제품에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참여농가 몇은 그만두기도 했고, 공장을 그만두고 미련을 버리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하루에 몇 덩이씩 만들어 냈지만 시중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몫이 되었다.

그러다 1973년 드디어 첫 판로가 열렸다. 처음으로 납품하게 된 곳이 조선호텔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에 납품하게 되자 이어서 신라호텔과 코스모스 백화점 등에도 납품이 이어졌다.

임실 치즈를 위해 정부에서는 치즈가공법을 만들어야 했다. 그만큼 치즈는 생소한 식품이었다. 임실치즈로 인해 코스모스백화점 지하 1층에 우리나라 최초의 피자가게가 생겨났다. 피자가게가 인기를 끌며 점차 늘어나자 치즈생산 물량도 점차 늘어났다. 이에 따라 축산 농가도 늘기 시작했다.

“몇은 떠나기도 할 정도로 암담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십 년 세월을 견뎌냈어요. 돈 버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죠. 하나의 생활공동체였어요. 농민들이 뭉쳐서 낙후된 지역을 살려보자는 성격이 강했어요.”

신태근이 가졌던 농촌의 꿈은 서로 함께 사는 공동체였다.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전문적인 교육도 이수했고 결국 현재의 임실치즈조합의 모태인 산양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으로 힘을 쏟았다. 연리 50%라는 살인적인 고리채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위해 신용조합을 운영하고 세 개의 협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농민운동가로 거듭나다

지정환 신부는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박정희의 독재와 반인권적 행태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굽히지 않아 인혁당 사건 때는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그는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을 지원했고 신태근 역시 일찍부터 평신도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운동에 함께 하게 되었다. 실제로 농촌 현장이나 치즈 생산과정 속에서 그는 반농민적인 농업정책과 늘 부딪치고 있었다. 농민을 살리는 게 아니라 농민을 죽이는, 그야말로 살농정책을 펼치는 당국에 맞서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농민운동을 하며 처음으로 가장 크게 당국과 싸운 일은 노풍 피해보상 투쟁이었다. 노풍은 통일벼 계통의 개량형 벼품종이었다. 오직 식량증산에 눈이 멀어 있던 유신정권은 1978년도에 검증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신품종을 농가에 강제적으로, 그것도 대대적으로 보급했고, 그해 여름 노풍 재배 농가는 대규모의 병충해가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전국에서 최초로 임실성당에서 노풍피해보상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신태근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이 기도회는 전국적인 보상투쟁의 봉화가 되었고 특히 전북 지역 농민운동의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기도회에 참석했던 전북 20여 곳의 신부들이 각자 자기 지역에 돌아가 농민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작은 임실지역이 농민운동의 성지로 불리게 된 계기였다. 임실에서 주도적으로 크게 일어난 또 다른 싸움은 고추투쟁이었다.

신태근은 당시 상황이 민란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래 임실이 담배 주산지였어요. 그런데 양담배가 수입되면서 고추 경작지가 확 늘어난 거지요. 외국농축산물 수입이 결국 고추 값 폭락을 불러왔고, 그 때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다 일어나서 모였어요. 우리가 40일 동안 싸웠는데, 싸움이 아니고 민란이었어요.”

1989년 1월 6일에 있던 투쟁에는 무려 600여 대의 경운기에 고추를 가득 싣고 수천 명의 농민들이 임실읍내로 모여들었다. 갑오년 농민전쟁이 되살아오는 장면이었다. 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행정력과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성난 농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겨울비가 내리는 중에도 농민들은 대회를 진행하며 농협지부장과 군수를 불러 면담하였으나, 그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하였다. 농민들이 군청으로 몰려가자 전경과 백골단이 달려들었다. 무자비한 폭력 속에 많은 농민들이 부상당하고 연행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농민들은 이 같은 만행에 항의하여 임실역 앞 국도를 점거했다.

“국도를 점거하고 있는데 다시 전경들하고 백골단이 덮쳤어요. 또 수십 명이 연행되고, 연행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밖에서도 계속 농성하고. 그때가 제일 치열하고도 신나게 싸웠지요.”

임실의 고추투쟁은 40여 일 후인 2월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까지 이어졌다. 수백 명의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진 대규모 농민대회에 임실에서는 무려 버스 34대가 올라갔다. 웬만한 임실 농민 전부가 올라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실 농민들 버스가 조금 늦는다고 대회 시작을 미루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고추투쟁은 농민운동이 단일대오인 전국농민운동연합으로 거듭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전국농민회가 출범하자 신태근은 가농에는 적만 둔 채 전국농민회에서 주로 활동하게 된다. 1992년 전농전북도연맹 의장을 맡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의장직을 맡을 마음이 없던 그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회의 도중에 회원들이 집으로 찾아와 잡혀가듯이 끌려가 의장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힘든 때였지만 조직의 명령이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맡았다고 했다.

“그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전주에서 집회를 하면 농민들만 오천 명에서 만 명까지 모였으니까. 워낙 힘이 있으니까, 정부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지금 같으면 폭도니 뭐니 하면서 몰아붙일 텐데.”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연행되어 종로경찰서 빼곤 모든 경찰서 구경을 하기도 했다. 어느 해엔가는 검문을 받다가 자신도 모르게 지명수배가 된 사실을 알기도 했다.

신태근의 생애에서 한우를 빼놓을 수 없다. 예순 살 무렵까지 젖소를 키우던 그가 한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루과이라운드로 쌀과 한우가 존폐에 처했다는 위기감이었다. 평생 농민운동을 했는데, 쌀과 한우조차 지키지 못하면 운동의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았다.

당시 한우 사육 두수는 130만 마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때부터 신태근은 한우 전도사를 자처했다. 친환경 사료를 개발하고 고급육을 생산하는 하이마블이라는 축산조합을 결성하고 육종사업을 펼쳐나갔다.

몇 년의 고생 끝에 한우가 늘고 소비자들이 찾게 되면서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육종 암소 40마리를 키웠는데 연봉으로 치면 1억원 정도 수입이 되었다.

“하느님이 처음으로 내게 보상을 주는가 싶었어요. 60대 중반이 되어 그간 쌓였던 빚도 갚고 그랬어요. 물론 한우 산업에 일조했다는 보람도 컸고.”

그는 인생 1모작을 치즈와 낙농으로, 2모작을 한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3모작을 꾸리고 있다. 그것은 친환경연합과 협동조합운동이다. 현재 임실군 친환경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여전히 농업이 미래임을 믿는다. 6년 전 귀농하여 한우를 키우는 맏아들이 있어 더욱 든든하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힘겨운 날도 많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갈 것 같아요.”

그를 보며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잎을 피울 느티나무가 떠올랐다. 선생은 이 땅에 뿌리박은 튼튼한 한 그루 느티나무였다.

글·소설가 최용탁

지난해 3월부터 격주로 연재한 ‘역사와 함께 인물과 함께’를 18회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