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1) 임실 오수 망루(2005.7.26)

참된 2009. 9. 27. 01:30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1) 임실 오수 망루

임실=이광형기자 ?hlee@kmib.co.kr     국민일보    

[2005.07.26 16:16]

 

 


 
백제 유적이 즐비한 전라북도로 근대문화유산 답사를 떠난다. 호남고속도로의 전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남원행 15번 국도를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나타나는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면사무소가 있는 이곳은 요란한 간판이 나붙은 몇몇 상점들과 슬레이트 지붕의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전형적인 읍·면의 중심지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면 전체 인구라고 해야 5000명에도 못미치는 이곳의 오수지구대에 지난 5월 20일 근대문화유산 제188호로 등록된 12m 높이의 망루(望樓)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전후에 건립된 이 망루는 주변 지역을 경계하고 비상사태시 사이렌을 울리기 위한 초소로 활용됐다. 이 작은 마을에 이런 시설이 왜 필요했을까.

전북도청의 근대문화유산 조사보고서와 임실군 향토지 등 각종 자료를 뒤적여도 정확하게 알수 없었던 망루 건립의 당위성은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강범(71) 오수 이장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부터 오수는 임실의 중심지였어요. 5일장이 열리면 군내 12개면 사람들이 다 모여들 정도로 번성했지요.”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할까. 오수는 조선시대부터 뽕밭으로 유명했다. 누에고치가 뽑아내는 이곳의 명주 비단은 한양에서도 인정받는 명품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오수로 몰려들면서 마을 가운데 순사주재소가 들어서고 동네 앞 원동산에는 신사가 생겨났다. 마을 주민을 통제하고 신사 참배객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망루가 세워진 것이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원통형(내부공간 지름 0.75m)으로 쌓아 올라가다 꼭대기 부분에서 6각형의 망대를 얹었다. 6개의 면마다 내다볼 수 있는 개구부를 만들어 사방의 조망과 감시에 유리하도록 고안됐으며 망루를 오르는 철제 계단은 안쪽 벽을 따라 빙 돌아가면서 설치됐다. 꼭대기에는 사이렌을 울리는 스피커 2대가 달려 있다.

수직 원통형과 6각형 망대의 결합이 자연스럽고,내쌓기를 통한 각 모서리와 상하단부의 띠 건축기법이 돋보이는 오수 망루는 일제 말기 순수 벽돌건축의 보기드문 사례로 꼽힌다. 게다가 주변의 건물보다 높이 솟은 망루는 면 소재지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도로에 위치해 오수의 랜드마크적 위상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이장 이씨의 증언이 계속된다. “오수리 지형이 꼭 부채모양이거든요. 망루에 올라가 좌우로 살펴보면 관내가 한눈에 들어와요. 일본 순사들이 꼭대기에서 감시하기엔 안성맞춤이었을 거예요. 일제 때 사이렌은 정오와 자정에 하루 2차례씩 울렸는데,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8㎞ 너머 마을에까지 들렸다고 해요.”

시대에 따라 용도를 달리한 망루는 굴곡많은 한국현대사를 웅변하고 있다. 일제시대 주민감시용으로 쓰이던 망루는 해방 이후 산불예방과 빨치산 경계에 활용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기습에 대비하는 초소로 이용됐다. 그러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수단으로 사이렌이 울렸다.

사이렌을 울리는 스위치는 지금의 오수지구대 출입문 안쪽 왼편에 설치돼 있다. 주민들은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했는지 알아챌 정도로 망루와 세월을 함께했다. 10여년전부터는 누전 위험 때문에 전기가 차단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망루에 올라 바람을 쐬곤 했다는 주민들의 설명이다.

팔순의 김정수씨의 회상. “일제시대에는 사이렌이 울리면 울던 아이들도 울음을 멈출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해방 직후 빨치산이 동네 전방의 경변하천을 넘어오는 것이 발각되면 망루가 가동되고 6·25전쟁 때는 사이렌이 수시로 울렸죠. 옛날에 산불이 나서 사이렌이 울리면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곤 했어요.”

오수 망루는 전국에 남아있는 망루 가운데 가장 높은데다 근현대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 오수 주민들 사이에서 ‘첨성대’로 불리는 망루는 그러나 관리 소홀로 비둘기들의 안식처로 변하고 말았다. 출입구는 벽돌로 막혀 있고 내부 통로는 비둘기의 분비물로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전체 외양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지만 오랜 시간 풍화에 의해 붉은 벽돌의 일부가 여기저기 떨어져나가 구조진단 및 보존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출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겨우 들여다본 내부 통로의 벽면에 설치된 사다리도 부식이 심했다.

한때 전주나 남원 못지않게 경제적 번성기를 누렸던 오수. 누에고치를 키우는 잠실(蠶室)이 빛바랜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곳을 외롭게 지키고 선 망루는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유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굴곡의 한국현대사를 지켜본 망루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꼭대기에 떼지어 앉은 비둘기만이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임실=이광형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