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임실군 여성농민회 최현정씨가 싸우고 일하면서 받아들인 농민의 삶

참된 2009. 2. 15. 15:49

[삶] 고추아줌마가 가꾸는 녹색 세상
한겨레 21  2000년08월23일 제323호

 


임실군 여성농민회 최현정씨가 싸우고 일하면서 받아들인 농민의 삶

 

 


(사진/손에 흙 한번 안 묻히던 새댁에서 여성농민운동가로 변신한 최현정씨.올 여름 작황은 안 좋지만 그래도 튼실히 익어준 놈들이 반갑기만 하다.)


그는 한입 가득 상추쌈을 문 채 방문객을 맞았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고추따고, 가지따고 나니 아침 먹은 것은 어디로 갔는지 헛헛해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전북 임실군 중금리 최현정(45)씨는 농부다. 농민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농민이다. 자신을 왜 인터뷰하느냐며 전화통화에서는 극구 사양했지만 내심 기다렸던 모양이다. 최씨가 혼자 마주하고 있는 점심 밥상에는 상추며 풋고추, 깻잎무침, 돼지고기 등이 장정 두어명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남편은 진작 한술 뜨고서 이날 오후 4시에 출하할 가지를 고르느라 나가고 없었다. 최씨는 먼길 오느라 시장할 텐데 밥부터 들라며 고봉밥을 퍼준다.

 

 

 

고추파동 계기로 농민운동가의 길로

 

 

길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살아온 내력을 물어보면 사연없고 곡절없는 이가 없다. 최현정씨는 평범한 사람이고, 또 그런 만큼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우선, 하나님만 아는 참한 전도사였던 최씨를 연고도 없는 임실땅에 주저앉게 한 4살 연하의 남편 조기현(41)씨에게 그는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다. 남편이 고추따는 옆에서 당시 유행하던 ‘월남치마’를 입고 양산 펴들고 서서 “저 하늘에 구름 좀 봐” 하며 하느작거리던 신혼 때의 모습과 농민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기세 좋게 투쟁을 선동하는 요즘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남편에게 최씨는 여전히 열렬한 구애의 대상이다. 또 임실군 여성농민회와 전북여성농민회에서도 최씨는 소중한 일꾼이다. 85년 신혼 첫해 소몰이 투쟁에 나서던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무섭다고 울먹이던 새댁이 89년 고추파동을 겪은 뒤로는 한해가 다르게 여성농민운동가로 변신해온 과정은 임실군 여성농민회와 전북여성농민회가 성장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89년 고추값이 사정없이 폭락했을 때 임실 사람들은 너나할 것없이 시위에 나섰다. 최씨 역시 애를 들추어업고 구경을 나갔다.

 

“한 700대 되는 경운기에 고추를 가득 싣고서 깃발 꽂고 나오는 광경을 보니 눈물이 다 납디다. 아주머니들, 할머니들은 애써 지은 고추농사 다 망했다고 펑펑 울고. 그 모든 장면들이 가슴에 콱 박히더라구요. 참 부끄럽더군요. 그 분들 매일 땡볕에 나와 농사일 할 동안에, 나는 한갓지게 애 안고 그늘로만 다니고, 도시로 떠날 날만 손꼽아 왔으니까.”

 

최씨가 스스로 농민의 아내임을 인식한 것은, 인정하긴 싫었지만 사실 그보다 한참 전이다. 소몰이 투쟁 때 남편이 3일간 구류를 산 일이 있었는데 소젖 짜는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팔순 노모는 몸이 그렁그렁하고 자신은 도통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고. 그래서 이웃에 살던 친척 아주머니가 와서 일을 거들어 줬다. 이른바 ‘여당 체질’이었던 그 아주머니는 “일이 밀렸는데 데모질이나 한다”고 구시렁대며 남편 욕을 해댔다. 최씨는 속에서 열불이 받쳤다. ‘저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유세 떠나’ 싶다가도 ‘내가 틈틈이 배워뒀더라면 이꼴저꼴 안 보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뒤로도 오랫동안 누가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농민이다” “농사 짓는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키우는 유기농산물


(사진/온 가족이 둘러앉아 출하할 가지를 고른다.왼쪽부터 '슈퍼엄마'최씨와 아들 은성(14).남편 조기현씨.딸 신애(11).)


그는 고추파동을 겪은 뒤로 농민 아내의 삶을 받아들였다. 한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평생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도 자식에게 번듯한 재산 못 남겨줬다고 미안해 하는 팔순 노모를 떠올릴 때나, 손이 갈퀴가 되도록 호미질하고 집안일하고 애들 건사하고도 항상 남편이나 아들 뒷전으로 밀리는 이웃 아낙들의 삶을 보면서 이것만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가슴속에서 드글드글하는데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겠고…. 그즈음이 막 전북지역에 여성농민회가 생길 때였어요. 김제에 장순자 언니나 부안 김숙례 언니, 순창 박찬숙씨 그런 분들이 앞장서면 저는 따라다니면서 배우기만 했죠.”

 

최씨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어머니>라는 여성농민의 삶을 그린 소책자의 내용이었다. 전북여성농민준비위원회에서 펴낸 이 책자에는 이 땅 여성농민들의 드라마틱한 삶이 갈피갈피 새겨져 있었다. 멀게는 갑오농민항쟁 때부터 가까이는 함평 고구마투쟁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농민운동사에는 남자들의 이야기만 나온다. 그 과정에서 함께 싸우거나 잡혀간 남편 대신 허리가 휘도록 일했던 여성농민들의 이야기는 단 몇줄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려져 있던 그네들의 땀과 눈물을 생생하게 그린 책은 김씨에게 서늘한 충격을 주었다. 그저 ‘어디댁’, ‘누구집’ 등 택호로만 불려 왔던 이웃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위대해 보인 순간이었다.

 

6월 말께부터 9월 서리내릴 때까지가 고추농사 짓는 이들은 가장 일손이 바쁘다. 최씨네의 주수입원은 고추랑 벼랑 소. 농지 800평과 하우스 600평에 고추농사를 짓고 오리 풀어 50마지기(1만평) 논농사도 한다. 소는 40두가량 친다. 그 밖에 유기농법으로 200평의 가지도 기르고, 포도, 참외, 수박 등 과일농사도 하우스 두세동씩 짓는다.

 

“유기농산물은 유통망이 없어요. 가격경쟁력도 없고. 박스 겉에다 ‘무공해 농산물입니다’ 하고 썼는데 지난해부턴 그것도 못하게 해요. 사람들이 알고나 먹으라고 박스 안에 편지를 써넣을까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고. 답답해요.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그래도 좋은 먹을거리 만들어내야 하는데.” 올 여름에는 날이 찌고 습기가 많아 탄저병이 많이 돌았다. 약을 팍팍 뿌렸다면 벌써 세물가량은 거두었을 터인데, 최씨네는 약을 안 쳐 작황이 안 좋다. 한물도 채 못 거뒀다.

 

입으로는 인터뷰하랴 손으로는 어지러운 집안을 치우랴, 그의 콧등에 땀이 송송 맺혔다. “농민도 파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죠? 한데 우리는 단 일주일만 일손 놓아도 한해 농사가 망해요. 농민들이 아예 한해 작파하면 정부든 사람들이든 신경좀 쓸까.”

 

모든 농사를 약 안 치고 하려니 손이 더 많이 간다. 새벽 5시 반에 눈 떠 밤 12시에 잠자리 들 때까지 정신없이 동동거리게 마련이다. 한데도 최씨의 일욕심은 끝이 없다. 몇년 전부터는 보험 영업도 한다.

 

“아는 사람이 시험이나 봐달라고 해서 밤새워 공부했죠. 제가 그래요. 누가 부탁하면 거절 못하고, 뭔 일을 시작하면 매달려서 해버려요. 시험 붙으니까 일하라 해서, 내 생업이 있는데 어떻게 하냐 했더니 그럼 설렁설렁 하래요. 실적은 없어도 거기서 얻어 들은 이야기 사람들한테 해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보험도 잘 알고 들면 좋잖아요. 사실 그 일이 제 생활을 훨씬 부드럽게 해요.”

 

 

 

슈퍼엄마, 열심이, 포근한 최현정

 

 

부드럽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그는 짧게 “해방과 자유”라고 답했다. 군농민회 사무국장을 맡을 정도로 열성 농민운동가인 남편이지만, 몸에 배인 가부장적인 태도는 어쩔 수 없다고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나돌아다니는 거 웬만한 농민들이면 안 좋아해요. 우리 남편도 예외는 아니고. 은근히 집에만, 자기 옆에만 있어줬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죠.” 그는 자신이 약간 ‘오버’하는 면도 없지 않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집에서도 논에서도 사회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정한 무리는 감수해야 한다고 여긴다. “누가 뭐래도 내 직업은 농민이죠. 나머지는 내 여가생활이고.”

 

그런 그를 아들은 ‘슈퍼엄마’라 부르고, 농민회 사람들은 ‘열심이’라 부른다. 그리고 동네 노인들은 ‘포근한 최현정’으로 부른다. 최씨가 틈만 나면 누구댁네, 누구엄마가 아니라 그네들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니 마을 할머니들도 그의 이름을 부른다.

 

헤어질 무렵 덩치 큰 9인승 승합차를 손수 몰고가서 포도를 한아름 따와 안겨주며 그는 “암 것도 내세울 게 없는데 요런 사연으로 기사가 되냐”고 재차 묻는다. 그래서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임실에서 고추농사 열심히 짓는 최현정”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서글한 눈매와 짧게 깎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오후 3시께 마당에서 온 가족이 붙어 앉아 가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빨래 안 걷냐”고 타박주자 일손 거들던 딸이 뛰어간다. 우사의 소들은 한여름 소낙비에 더위를 식히는지 앞다투어 콧김을 불어댔다. 온갖 생산물이 알차게 영글어 ‘열매의 고장’으로 불리는 임실땅의 바쁜 오후가 진한 흙냄새 속에 지나가고 있었다.

 

 

임실=김소희 기자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