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눈 내리는 마을 김용택

참된 2009. 2. 15. 15:18

    눈 내리는 마을

 

       김용택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마을을 덮고
산을 덮고 집을 덮고
온 세상을 다 덮는다
오늘은 명렬 당숙 딸래미 시집간다고
서울로 올라갈
돼지를 두들겨 잡아
내장을 소죽 솥에 푹푹 삶는다
돼지고기는 새끼줄에 꿰어 달아두고
돼지불알 까뒤집어
잉걸불을 긁어내어 구워
한 점씩 뚝뚝 썰어 소금에 찍어
후후 소주와 함께 먹는다
마루에 걸터앉거나
뜰방에 쭈그려앉아
후룩후룩 내장 국물을 마시며
오랜만에 식은땀을 흘리며
목구멍 때를 벗긴다
결혼잔치는 마을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
우리들은 이따금 이렇게
돼지를 키워 잡아
고기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내장 국물이나 얻어먹고 만다.

펑펑 끝도 없이
눈이 내린다
술들이 거나해지자
소죽솥 불을 끄집어내어
불가에 불알들을 녹이며
전두환이가 어떻고
청문회가 어떻고
그놈들이 순전히 도둑놈들이었다며
여당이고 야당이고
다 그놈덜이 그놈덜이라고
다 저그들만 위해서
저그들 잇속만 챙긴다고
모두들 큰소리치며
임실 고추싸움에서
군수가 도망가고
최루탄 터뜨리고
농성을 하고 있다고
우리도 가봐야 한다고
모두 큰소리치며
고래고래 전문가가 되고
노무현이가 질 똑똑허다고
고함을 치며
5공화국을 심판하고
6공화국을 욕하지만
붉게 취한 마음에
아아, 눈만 펑펑 퍼붓는다.

떠그럴 놈들
우리 위해 일헌다고
애걸복걸혀서
표 찍어 국회로 보내놓으니
저그덜 월급은 몽땅 올린다고 만장일치시키고
수매값은 병아리 눈물만큼 올렸담서
문딩이 콧구멍에서
마늘씨를 빼먹을 놈들
욕질을 하며
두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우리들의 빚은 올해도
저 내리는 눈처럼
저 응달의 쌓인 눈처럼
녹을 줄을 모르다.

잉걸불이 다 사그라지자
인자 저녁밥 일찍들 먹고 모여
민화투나 치자고
각자 집으로 가는 길
오라는 비는 안 오더니
제기랄놈의 눈만
왜 이렇게 퍼붓는데야
하나둘 눈 속으로 들어서서
눈 속에 빠진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아 내려라
우리들의 가슴속엔 어둠이 쌓이고
눈이 내린다
내려라 눈아 하늘 끝까지 내려라
눈아, 우리를 묻어다오
우리들의 슬픔을
우리들의 고달픈 일생을
하얗게 파묻어다오
저기 저
보리밭에
봄이 오면
파랗게 살아날
보리를 묻듯
우리를 하얗게 파묻어다오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