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임실 고추투쟁이야기

참된 2009. 2. 15. 04:00

아래는 오마이뉴스 블로그 아세만사(http://blog.ohmynews.com/asemansa/)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녹두장군, 혁명을 꿈꾸는 늙은 농부

아름다운 사람들 2007/08/26 17:52 사랑수

 

 

 

 
 
전국수세폐지 대책위원회, 전국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 총연맹, 전민협, 개혁국민정당 발기인, 전북민주화협의회 등. 이수금 선생은 여러 단체의 위원장과 공동대표와 의장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생각하면 열정과 투쟁, 정의와 평화, 개혁과 혁명 같은 뜨거운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런 선생에 대한 내 기억은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태우 정권 초기, 농민들이 모든 집회를 불허한다는 강경정책에 맞서 싸웠던 시절이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권력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겨울이었다. 이수금 선생은 정읍에서 첫 깃발을 올린 고추수매 싸움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다. 그의 구속은 더 큰 불길로 번져갔다. 도미노처럼 쓰러진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로 번지는 들불이 되고 말았다. 농민운동 역사상 가장 오랜 농성으로 남았던 ‘함평 고구마 싸움’을 능가한 40여일 동안의 ‘임실고추 수매싸움’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자동차와 경운기에 고추를 가득 실고 임실읍내 도로를 점령하고 말았다. 많은 날은 700여대가 군청과 읍내를 포위해 버리는 뜨거운 항쟁이었다. 허벅지까지 빠지며 물을 건너온 농민들을 태우고 읍내로 향하던 경운기들, 머리에 비닐봉지를 쓰고 겨울비를 맞으며 참여한 집회, 화가 난 농민들이 전주 남원간 도로를 점거하고 외치던 구호들, 식판으로 낙숫물이 떨어지는 성당 처마 밑에 앉아서 늦은 점심을 때우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내 카메라 앵글로 흘러들어간 사진들은 심장에 새겨진 연대와 연민의 산실이 되었다.

고추수매 싸움 첫 구속자 이수금, 그 이름과 그의 삶은 줄곧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의 현장을 지키는 성실한 투신으로 이어졌다. 어찌 엄살을 부리고 싶지 않았으랴, 가족부양을 이유로 운동 판을 떠나고 싶은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기 헌신의 수레바퀴처럼 민중의 현장을 억척스럽게 굴러 다녔다.

 
그래서 그를 생각하면 농민혁명가 녹두장군이 떠오르는 것일까. 농민들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혁명의 길을 갔던 전봉준, 칠순을 앞둔 노구지만 그 길을 목숨을 건 사람처럼 달려가고 있다. 갑오농민혁명의 격전지였던 정읍 태인에서 전봉준 장군처럼 살고자 고군분투하는 그를 만났다.

그와 함께 유기농업을 꿈꾸는 몇 사람이 한 부락을 찾아갔다. 저수지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벼꽃이 지는 자리마다 푸른 벼이삭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오후 5시였다. 다랑이 논들이 계단처럼 골짜기를 매우고 있는 고즈넉한 동네였다. 한 할아버지가 예취기로 논 두럭을 깎고 있었다.

“태인에서 온 이수금입니다.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수세폐지 싸움 때 집회장에 안 나오셨그만요.”
“저희 동네는 수세를 안 냅니다. 그래서….”
“근데, 연세가 꽤 많아 보입니다.”
“내년이면 여든입니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풀을 깎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녁 6시 30분,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 들판을 달려 읍내로 갔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평소와 다른, 집회현장이 아닌 식당이었다. 순수한 열정 같은 맑은 소주가 돌고 돌았다. 전경의 방패와 최루탄 속에서 마주 대하던 투사의 모습과 다른, 인자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가식이나 교만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진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는 소나무 같은 올곧은 정기가 펄펄 살아 있었다.

“농민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식량문제가 심각해 질 것입니다. 정부와 국민이 개발과 성장에 아무리 미친다고 해도 농업의 기초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핸드폰과 컴퓨터, 자동차와 비행기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쌀과 채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농업을 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쌀은 생명과 문화며 주권입니다. 신자유주의 WTO는 지구의 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주범입니다. 공산품은 지구를 파괴하고 착취한 결과물입니다. 한미 FTA는 모든 장벽을 허물어 더 많은 공산품을 수출하자는 것인데, 이는 더 많이 지구를 파괴하자는 것이고, 수없이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키자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멸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종종 빨갱이 농부라는 말을 들으실 텐데 왜 그 길을 가시는 거죠?”
“아버지가 민주당 간부였는데 이승만 독재의 탄압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아버지 영향으로 민주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죠. 이승만이가 물러나고 박정희 유신독재가 들어섰는데 이승만보다 더 독재를 하더라고, 여러 차례 연행도 되고 구속도 되었죠. 나 혼자만 잘 살면 그게 잘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농민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라도 있으시나요?”
“암요, YH사건으로 구속된 문정현 신부님이 석방되었죠. 전주가톨릭센터에서 환영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물었더니, ‘아 농민이니까 농민운동을 해야죠.’ 하는 거예요. 그 길로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죠.”

소주잔은 따르는 대로 한 입에 떨어 넣었다. 술술 잘 넘어가는 소주보다 더 맛깔스런 말씀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논 5만평, 밭 1만평이니 대농이라면 대농이죠. 친구들이 가끔 술을 사라고 해요. 저는 아무에게나 술을 안삽니다. 동지들 하고 먹어도 다 못 먹는 술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곳저곳을 후원해야 하니까 술값도 아껴야 하고요. 농민운동이나 조직운동을 할 때 말고는 술 마시는 것도 아낍니다.”

“여보. 손님 모시고 갈 테니까, 유기농 매실과 산야초 효소 두 병씩 담아 놓으세요.” 우리 일행은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20년 된 한옥을 옮겨 지은 집이었다. 상량에는 ‘정의’ ‘평화’ 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동안의 삶과 정신을 오롯이 표현한 상량이었다.

술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마술사, 최상의 기분인 선생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무용담을 털어 놓으시며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이래도 젊어서 힘깨나 썼지. 면민 체육대회 씨름에 나갔어. 체급도 없이 겨루는 경기방식인데 이 작은 체구에 염소 한 마리를 상으로 땄잖아. 아-, 근데 흑염소가 아니라 값도 없는 흰 염소를 탔지 않았겠어! 하-하-하-"

껄껄거리는 웃음에 덩달아 함께 웃었다. 무언가 보여주려고 팔 둑을 걷어 올렸다.
"이 알통 좀 봐."
"정말 힘깨나 썼겠네요."
"정말 보여줄까. 윗옷을 벗고 보여주지."
“쩍 벌어진 가슴과 감자 같은 알통에 v자가 끝내줍니다.”

 
손님으로 앉아 있는 다른 어머니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상의까지 벗고 ‘몸짱’을 보여주시는,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 너무도 재미있고 아름다워서 눈물을 찔끔거릴 만큼 웃었다. 칠순 할아버지의 육체미 자랑에 누군들 박장대소 하지 않으랴.

들판을 배경으로 멋있는 농부가 벽에 걸려 있었다. 93년도 전북지역 시민단체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지역의 재야 어른이 300만원에 산 것인데 작년에 그림의 주인공인 선생에게 되돌려준, 아름다운 선물이다. 농민운동가의 삶의 역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혁명가의 젊은 날의 초상이 어느새 백발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태어나 하늘과 땅과 사람을 섬기는 농부로 늙어감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