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모 선생의 길을 찾아서

[길을 찾아서] 일제나 미군정이나 알면 알수록 똑같더이다 / 정경모

참된 2009. 9. 21. 01:54

[길을 찾아서] 일제나 미군정이나 알면 알수록 똑같더이다 / 정경모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

한겨레

 

 

» 도쿄 맥아더사령부에서 한국전쟁을 지켜본 ‘3인의 민주화운동가’. 왼쪽 사진은 1952년에 함께한 문익환 목사와 필자, 오른쪽은 54년께 폐결핵 요양을 끝내고 사령부에 복귀해 신학 공부를 시작한 박형규 목사의 모습이다.

 

 

 

새삼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부(GHQ)에 있던 그 많은 사관들 중에서 후일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는 사람이 셋인데, 문익환·박형규·정경모였고, 그 셋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에요. 두 분은 목사님이시니까 물을 필요도 없으나, 나 자신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한때는 목사가 될 생각을 했으니 지금은 비록 주일날 성경·찬송 옆에 끼고 예배당에 가진 않지만 사고의 바탕은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한국 민주화운동은 미국 사람들이 멋대로 그어놓은 38선을 걷어치우고, 38선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부자 형제가 서로 피로 피를 씻은 비극을 극복함으로써 민족공동체를 되찾겠다는 운동 아닙니까? 그러니 민주화운동이란 어쩔 수 없이 그 밑바닥에 깔린 사상의 본질은 미국이 해온 짓에 대한 비판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미국 사령부에서 달러 원금을 받고 피엑스(PX) 출입 특권을 가졌으며 그때 보통 일본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자가용 차를 모는 등 미국 덕에 호강을 했다면 했다 할 수 있는 이들 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결과적으로 미국을 반대하고 미국이 지원한 자기 나라 독재정권의 박해를 받게 됐을까요?

 

일제 때 남북을 막론하고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장 중히 여기던 경전의 하나는 <구약>의 ‘출애굽기’였다고 할 수 있어요. ‘바로’(파라오) 지배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축복의 땅에 이르게 된다는 줄거리의 설화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해방과 구세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지요. ‘바로’는 바로 일본의 ‘천황’이었고 홍해 바다에 빠져 죽는 애급(이집트) 병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 군대였으니까요.

 

일본이 항복한다는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 경성방송국(JODK)을 통해 흘러나오던 1945년 8월 15일, 선친께서 온 식구를 불러 앉혀 놓고 눈물을 흘리시며 해방에 감사하는 한편, 주님의 뜻에 따라 일본을 무찌른 미국에 길이길이 축복을 내려 주십사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군요.

 

내가 유학한 에머리대학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었는데, 날마다 보던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이란 신문에 퍽 자주 나오는 워커란 군인의 글을 읽으면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아마 띄엄띄엄 한일회담이 열리던 때였지 싶은데, 그 워커는 무조건 일본을 치켜올리면서 한국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렸어요. 일본은 억울하게도 한국 땅에 막대한 재산을 남겨두고 왔는데 한국이 일본에 무슨 청구권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건 뻔뻔하고 파렴치한 행위라는 식으로 말이에요.

 

당시 나는 솔직히 정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던 때라 워커에 대해 별반 기억도 없었는데, 사령부에 와서 깜짝 놀랄 수밖에요. 그 사람이 바로 그때 한국에서 전투를 벌이던 제8군 사령관 제너럴 워커, 그 사람이 아니겠어요?

 

일본에 와서야 차차 정치 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고, 영어·일본어 할 것 없이 신문·잡지 등 다양한 자료를 접하게 됨에 따라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펼치고 있는 반한·반조선 정책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맥아더 사령부더라는 말이지요.

 

 

 

»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 뒤 한국전쟁의 기원을 깊이 캐 내려가면서 느낀 것은, 미국이 6·25를 아무 준비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맞이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지요.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착착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인데, 아까 말한 제너럴 워커의 기고만 하더라도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여 일본 정부와 주일 미8군이 손잡고 공동으로 추진한 언론홍보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6·25 때 목숨을 잃었는데,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이태원 거리에 워커 동상이 서 있었어요. 애국심에 불타는 한국인들이 세운 것인 듯싶으나, 그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기사등록 : 2009-05-06 오후 06:25:36 기사수정 : 2009-05-06 오후 07:2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