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2

참된 2009. 2. 15. 02:53

아래는 정광훈 의장님이 전농 농민의 길에 쓰신 글로써 무안군 농민회 다음 까페(http://cafe.daum.net/gunnong/MGH3/9)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1도 찾을 수 없고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2도 까페에 있는 글이 전문(全文)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부분은 찾을 수 없어서 아쉽다

 

 

 

정광훈의 농민운동 이야기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2

 

어찌 해남, 진도 고추 뿐이랴!

노태우 고추 값이나 농민 고추값은 땅에 떨어질때로 떨어졌다.

 

올해는 전국 전 지역이 고추 풍년인데다가, 가정마다 커다란 푸대에 가득 쌓아둔

마른고추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어쩌면 그렇게 희나리 하나없이 때깔도

좋고 매콤한 맛 또한 일품이었다.

 

흉년떡도 많이 나오면 싸다고 아무리 비타민C가 많으면 어떻고 태양초 양근이면

어떻고 화근이면 어떠리.......

 

홍일일품, 마냔, 청양, 추레홍, 청송고추 맛이 으뜸이니 순창고추 맛이 왕품이니

영양, 안동, 음성, 영월, 진천, 괴산, 충주, 제천, 정선 고추가 좋은들 무엇하랴.

 

올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고추 주산지며 고추농사만으로 일년농사, 전 소득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에겐 씨앗값도 못 건지는 판! 이른 초봄부터 안방에서 씨앗을 틔어

상자에 옮겨 심고 전열판 연탄보일러가 깔린 온돌방같은 비닐멀칭속에서 아기

키우듯이 물을 주었다, 담요를 씌웠다 벗겼다. 옷 잎이 다섯개가 되면 뿌리가 잘

자라도록 옮겨심고 본답에 옮겨심은 다음 늦서리가 맞을까봐 멀칭비닐을 씌운 다음

농약도 한두번도 아닌 여러번. 그뿐인가 고추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 옆순 가지치기며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말뚝을 박아 지주를 세우고 지주끼리 줄을 이어가며 그

사이에 고추모를 매고 고추가 익을 때는 어찌 날은 그렇게도 무덥고, 하필이면

울레줄레 빨갛게 익어가는지. 농촌일중에서 가장 힘든일이 한여름 고추나무 사이를

기어가며 고추따기일 것이다.

 

이렇게 딴 고추를 자루에 담아 무거운 홍고추를 밭두렁으로 꺼내 경운기까지

짊어지고 어둠이 짙어서야 건조기에 넣거나 태양초 양근을 할 때 비가 나리면 말리지도

못하고 썩혀 버리는 양이 태반이다.

 

자식같이 키우고 말린 고추값이 한 근에 팔백원 밖에 안 된다니. 팔지 못해 마루, 헛간

, 창고, 안방에 까지 쌓아둔 고추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농민들의 분노로 바뀌어

질 수 밖에 없다.

 

고추값이 오르면 비축양으로 때려치고 그것도 부족하면 칠레 멕시코산 수입. 풍년들어

과잉되면 나 몰라라~. 농민이야 죽던 말던 걱정이야 있건 말건 시장만 가리키며

손가락질 하는 놈들. 어찌 이들이 농민의 적이 아니고 농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가.

 

농민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물론 농민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참는 것도

잘 견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어서일까? 그래서 농민이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일어서면 세상이

끝이라고 했던가, 천지개벽이라고 했던가.

 

말씨도 "그랬시유~ 저랬시유~", "그랬타카니 그놈의 자슥들 주기뿔라."

"뭐시기 요놈들 매운 고추맛을 보여주잔께잉"

"우리 영월농민도 가만이 있을 농민이 아이래요. 한번 붙어 볼끼래요."

"하모, 맞대 맞대이~ 한번 혼을 내 줄끼라."

지역이 다르고 말씨도 달라도 농민들의 마음은 한통속.

 

네트웍 인터넷이 없어도 소문에 소문으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전국 고추농가의 농민들은 농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네트웍

인터넷이 없어도 소문에 소문으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농민운동 새내기 초보자들. 진도 해남 "풋나락 물감자"라고 한 대명사처럼 불리던 해남

산이면 사람들도 서울 농협중앙회 회장실까지 점거해 담판을 짓고 전량을 제값에 다

팔아먹었는데 농민운동 꽤나 했다는 '까타리 농민회'(가톨릭 농민회)가 잘 된다는

지역에서 체면과 위신이 있지 그대로 있을 수 있을소냐. 각 군 농민회들마다 대책위를

조직 했었다.

 

고대위(고추대책위원회), 수대위(수세대책위원회), 쌀대위(쌀대책위원회), 골대위

(골프장), 핵대위(핵폐기장), 경대위(경지정리), 뻘대위(김양식), 풍대위(태풍),

냉대위(노풍냉해), 땅대위, 도대위(목도열병), 설대위(스노우대위, 눈피해), 배대위

(배추), 쓰레기대위, 마늘대위, 양파대위, 피대위(피망), 바이킹대위(완도선상투쟁),

대파대위, 통대위(통일벼), 콩대위, 맥대위(맥주맥), 하대위(춘천하우스농가), 땅대위

(고창땅콩), 감대위(오원춘감자씨), 고구마대위, 감대위(제주감귤), 의대위(의료보험통합)

, 젖대위(젖소)......... 등등 수많은 대책위가 많았으나 고대위 계급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일까 , 전투 역시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고 전술도 다양했다.(전경대 말씀)

농민들 투쟁현장은 전경대들도 진압대책이 안 통한다. 큰길 막으면 샛길, 논두렁 길로

빠져 나가기, 원천봉쇄하면 삼삼오오 장보러 빠져나가기, 청소차로 막으면 트렉타로

넘겨불기, 덤프차로 막으면 트렉타 후진기어 넣고 밀어불기, 방패로 막으면 땡겨서

빼앗기, 하이바 벗기기, 시내진압 막으면 기차길로 경운기 끌고 들어가기, 철로 레루에

엔진오일 폐유뿌리기, 멍석깔고 넘어가기, 헌타이어 불태워 굴리기, 전경 연행조 따돌리기

, 논두렁으로 유인하기, 양쪽에서 토끼몰이 하면 물논으로 들어가 뒤제비까기, 순찰차

패트릭카 쫓아오면 권총 빼앗기, 경찰서장 체포령 내리고 특진현상금 붙이기, 

교회 미사가기, 부활절 메세지 유인물 나눠주기........

 

임실에서는 여의도 평민당사 농성에 들어 갔었다. 그들은 해결해 줄 힘도 자격도 없었다.

농민운동 하다가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을 하던 이길재 위원장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고

하루 빨리 농민회원들이 돌아가기만 기다리면서 하는 수 없이 먹여주었지만 대책은 없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모처럼 농민들이 고추로 농성왔으니 모아놓고 교육할 시간도

없고 이때다 싶어 강제로 의식화(?) 교육을 한다.

 

간땡이 키운 교육, 싸운 방법과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임실에서는 고대위들이

마을마다 경운기를 조직하여 고추싣고 아줌마 아저씨 싣고 임실읍으로 경운기 500대가

모여 들었으니 군수는 어찌할고 허둥댄다. 자기들 머리로는 해결책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청와대 노태우 고추도 떨고 있는데 임실 군수야 안 떨수 있겠느냐.

 

몸도 떨고 마음도 떨었다. 이제 경운기 대대는 전수 입성으로!!!

 

기찻길에 멍석을 깔아버리자!

 

경운기 시동 걸어라!! 놀란 경찰들은 도로를 막았다. 그러자 농민들은  "기찻길에 멍석을

깔아버리자!"   그때 당시 경운기 500대의 동원 시동소리는 산이라도 헐어 버릴 것 같은

정신 못차린 진동 소리였다.

 

동시에 정읍에서도 태인면 농민들이, 북인면 농민들도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원천봉쇄한 전경대와 갑오농민 전쟁 연습이나 하는 듯이 쇠스렁 삽, 호크를 들고 대치했다.

논둑길로 진격한 농민들을 체포하려다 농민들이 내리친 삽에 맞아 떨어진 놈, 논고랑에

쳐박혀 허우적 거린 놈, 흙탕물에 거꾸로 머리를 쳐박힌 놈, 논바닥에 흙탕범벅이 되어

허우적 거리는 놈, 경찰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시가전에서나  힘쓰는 경찰과 전투경찰은

논두렁 밭두렁 들판에서는 맥을 못추린다. 그때 경찰의 부상도 많았지만 농민도 많았다.

경찰서장은 큰 사건들 때문에 상부에 문책을 받을까봐 벌벌 떨기도 했다.

 

농민들의 대투쟁 후에는 후유증도 있지만 간땡이 큰 농민들은 용기백배 자신감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진도에서는 경운기로 군청인근을 빙 둘러 포위하고 경운기 가바나를 끝까지 땡겨

군청건물이 지진이나 나서 금방이라도 헐어질 것  같은 기세였다.

 

농민데모는 경운기 시동소리가 대장. 시끄러운 엔진소리에 말이 안 통한다.

지휘봉을 든 경찰서장 말도, 경비대장 무전기 소리도 경운기 엔진 소리에 말이 안 통한다.

고창에서는 어디서 땅콩가마니와 고추가마니를 사차선 도로 군청앞에 쌓아두고 고추

땅콩 대회를 하는데 서울에서 연설하기 위해 와야 할 문익환 목사님을 대회장에 제시간에

못가도록 잡아둔 바람에 시간을 메우기 위해 기다리다 지친 농민들에게 의식화 코메디

하느라 혼났었다. 그래도 안 오는걸 석양이 되서야 문목사 도착.

 

이순자 도적질 하는 말. 다이아 반지며 귀금속 모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이순자

치마속에 감춘 부정축재 이야기등 군사정권이 행하는 만행에 대해 시적인 구사로 대중을

휘잡았다.

 

고추타는 연기는 고창, 부안 고부군을 접수하고 지나가던 동학군들의 전쟁터 같기도 했다.

 

이기조, 황승수, 윤동현, 유정송, 김주익, 주성, 농민운동에 투신한 박성자 역할도 대단했다.

문정숙, 명수 부부는 부부싸움도 잘하지만 투쟁도 잘했다.

젊은 활동가들이 청년들이라 활동가들끼리 의견은 잘도 통했다.

저녁식사  끝날무렵 석양에 피어오르는 땅콩타는 연기, 고추타는 연기는 고창, 부안 고부군을 접수하고 지나가던 동학군들의 전장터 같기도 했다.

 

영양, 영광, 나주 세지 등에서 고추가마니를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고 전국에서도 호남지역

그 중에서도 농민운동이 가장 세다는 무안에서도 일판이 벌어졌다. 무안에서는 현경면

고추가 제일 많아서 일까. 망운, 내리, 해제에서도 고추가마니를 실고 나왔다.

 

여장부처럼 생긴 고성자 여농 회장을 비롯하여 김정옥회장, 배두목(배종렬)회장의 지휘에

따라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고 처음 시작한 군수 면담을 통해 협상까지 올라 갔으나 협상

테이블에 군수가 나타나지 않아 성질난 무안 회원들은 물때를 만난 듯이 군청을 점거하자며

우 몰려들어 전 군청을 점거하고 전 직원을 밖으로 몰아버렸다.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군수가 성실한 협상에 응하지 않는 관계로 확신을 가지고

점거를 하고 운동장엔 천막을 치고 아름드리 소나무 뿌리들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닥불을

피우고, 솥단지를 걸고 술국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동네방네 사람들은 집에 쌓인 고추가마니를 실고 군청으로 군청으로 모여들었다. 군청사무실과 군수실이며 민원실까지 고추포대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모여든 농민들이 각 면에서 동네에서 밥을 해가지고 모여든 사람, 동치미

김치를 가지고 오는 사람, 전기밥솥등 군청에서 살림살이라도 차리고 살 것처럼 모여 들었다. 그 날 농민 양길성 한 사람이 무안군청으로 건너려다 사고를 당해 점거 중 장례를 치뤘다.

 

고성자 회장님은 장기간 점거로 경찰과 싸우다가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습이 불가능 했고 배종렬 회장님도 혹시 회원들이 무리수를 두고 사고를 칠까봐 당부를 하면서 수습을 하는데 여간 고심을 했었다.

 

군수실 의자에는 아줌마들이 차례로 오늘군수, 내일 군수 돌아가면서 회전의자를 올려가며 책상위에 다리를 걸치며 '오늘결재 없음' 이라고 했다.

 

운남에 사는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덩치 큰 오대협씨는 일주일 군수로 하자고 하고 15일 농성기간동안 일일군수 일주일 군수도 많았다. 젊은 청년들은 신이 났었다.

공수부대 출신 재성이는 광주 5.18때 진압나온 이야기도 해 주었고 여간 말을 아끼며 조심도 했었다.

 

상현이, 진우, 용주, 봉섭, 고성자 회장님이 사시는 수양리 아줌마들은 군수실에서 아예

살림살이를 차려놓고 밥도 해먹고 지냈는데, 어영부영한 술취한 남자들이 들어와 밥도

얻어먹고 술도 마시다가 맨날 남자들이란 어영부영 농성도 지긋하게 못한다며 내쫓기기도 했다.

 

이봉기 군수만 성실하게 대해 주었다면 좋은 말로 협상하려고 했으나 군사정권이 꽂아 논

관성군수라 막무가내로 말했고 그에 분개한 고성자 회장은 군수 머리채를 잡아다녀 내쫓아 버렸다.

 

군수는 15일 동안 내내 군청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무안 경찰력으로 진압을 못하자 광주

서부경찰서 특공대들이 와서 일곱명을 연행해간 후로 사건을 종료 되었고

고추전량을 다 수매했다.

 

이렇게 해서 15일간 무안군청 접수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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