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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염쟁이 유씨’ 죽음을 통해 인생을 풍자하다

참된 2008. 3. 2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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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염쟁이 유씨’ 죽음을 통해 인생을 풍자하다

뉴스메이커 | 기사입력 2006.09.08 10:14 | 최종수정 2006.09.08 10:14


청주연극인 유순웅의 1인극 서울 나들이 공연 흥행몰이 작품 하나 들고 청주에서 상경한 연극인 유순웅(43)이 대학로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그가 홀로 출연하는 '염쟁이 유씨'가 국립극장에 이어 두레홀에서 7개월간 흥행릴레이를 펼치며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70여 석의 좌석이 모자라 무대 앞에 방석을 깔고 앉은 관객이 빼곡하다. 20~30대 관객은 물론 40~50대 중장년층도 눈에 띄고 승려, 수녀, 목회자, 군인 등 다양한 사람이 객석을 메운다.

 

 

 

연극 시작 전 매표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하나는 이 작품의 출연배우가 '왕의 남자'등에 출연한 유해진 아니냐는 작은 소동이다. 포스터 앞에서 부부가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실제로 유순웅은 유해진과 빼닮았다. 이름까지 비슷한 탓에 형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유순웅은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며 "유해진과는 고향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소개했다.

"서로 다른 극단에 있기는 했지만 청주지역에서 함께 활동했던 후배예요. 해진이가 서울에 올라오기 전엔 만나면 '우리같이 못생긴 놈이 떠야 하는데'라면서 농담을 주고받았죠. 그때도 닮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지금도 저를 유해진으로 알고 연극을 보러오는 분이 있다니까요.(웃음)"

흑자 거두고 서울연극제 인기상

서울 공연을 계획할 때 주변에서는 만류하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로 연극 현실상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지난 2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 작품을 공연했는데 서울만 못했거든요. 도전하고 싶었죠. 3개월 동안 1000만 원만 적자 보자고 생각했어요."

연극계 선후배들이 소매를 걷고 나섰다. 연극인생 20년 만에 처음 서울나들이에 나선다고 하니까 없는 형편에도 저마다 수백만 원씩 제작비를 댔다. 인쇄소 주인은 공짜로 인쇄물을 만들어줬고 고향에서 장의업을 하는 선배는 관부터, 수의, 만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의용품을 지원했다. 판화가 이철수씨는 병풍을 써줬다. 다행히 1000만 원 적자는커녕 매우 드물게 흑자를 낸 작품 반열에 올랐다. 올 서울연극제에서 인기상까지 수상했다.

'염쟁이 유씨'는 평생을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아 관에 넣는 일을 해온 염쟁이 유씨가 마지막으로 염을 하는 날의 이야기다. 몇 해 전 자신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에게 연락을 한 그는 기자에게 수시부터 반함, 소렴, 대렴, 입관 등 각 절차의 의미를 설명하며 염의 전 과정을 설명한다. 사이사이엔 조폭 귀신과 놀던 일, 오로지 장삿속으로만 시신을 대하는 장의대행업자와의 관계, 자신이 염쟁이가 된 과정, 아들 이야기 등 염을 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죽음에 대한 이야긴데도 객석에선 시종 폭소가 터진다. 이런저런 조폭으로, 얍삽한 장의대행업자로, 자신의 아버지 또는 아들로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그의 모습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즉흥적으로 관객을 무대로 끌어내 연기를 하게끔 만드는가 하면 관객에게 소주 한 잔을 권하기도 한다. 관객을 들었다놓았다 하는 재주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연상케 한다. 동시에 가슴 한켠에선 묘한 감동의 울림이 있다.

"지역문화가 살아야 한국문화 살아"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앞만 보고 내달리기 쉬워요. 이 작품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지요.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잖아요. 저 역시 연기를 하면서 반성을 해요. 젊은 시절엔 저보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삶의 무게가 버거워 터벅터벅 걷다가 그의 웃음 띤 얼굴이 담긴 포스터에 이끌려 극장을 들어섰다는 사람, 항암치료중이라는 환자도 그의 연극에 용기를 얻었다며 글을 남긴다. 극장을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관객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가 연극에 눈을 뜬 것은 고교 때 교회에서 촌극을 하면서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탓에 부모님은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다. 신학대학에 들어간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격동의 80년대 상황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탈춤반을 이끌면서 시위에 가담했어요. 1985년 구속돼 1년간 수감됐죠. 1987년 복학했다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려고 안양지역에서 공부했는데 그해 4월 폐결핵 진단을 받았어요. 청주에서 연극 활동을 하게 된 건 집으로 요양차 내려간 게 계기가 된 거예요."

1987년부터 청주시민을 대상으로 풍물과 탈춤을 가르치는 동시에 연극 활동을 했다. '작업장 타령' '막걸리 총각' '청남대 공화국' '빈 주머니 힘찬 주먹' 등 지난 20년 간 수십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배우로 출연을 하기도 하고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무대극과 마당극을 오갔다. 모두 창작극이다. 현재 그는 예술공장 두레 상임연출이자 전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다.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꺼려 대본부터 무대에 올리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져야 했어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많았죠. 하지만 연극은 마약 같아요. 일주일만 쉬면 또 하고 싶고 한 달간 쉬면 미칠 것 같거든요."

그는 지역에 정착해 문화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기형적 구조에 회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순웅은 "특히 지역문화가 살아야 한국의 문화가 사는 것"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아비뇽연극제나 에든버러축제 등은 수도에서 펼쳐지지 않잖아요. 우리나라에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축제가 없어요. 특히 지역문화는 아사위기죠. 어떻게든 지역문화를 살려야겠다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그 와중에 결혼도 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결혼 전 약속을 했다고 한다. 배곯는 연극쟁이와 결혼하는 대가로 육아와 경제 등 가정의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그는 극단으로는 드물게 월급제를 정착시키고 4대보험도 가입했다. 또 극단 이름으로 증평군 증평읍에 3층짜리 다세대주택을 매입, 단원 15가구가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했다. 지역에 남아 있는 후배들이 어느 정도 안정감을 갖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중심은 언제나 청주에 두겠지만 기회가 되면 영화출연은 하고 싶다고 한다. '염쟁이 유씨'는 10월 21일까지 두레홀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교도소와 교회, 복지관 등을 돌며 공연된다.

< 글/박주연 기자 kypark@kyunghyang.com >
< 사진/김세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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