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의 증언에서 나온 말은 민주노동당 창당과 운영과정에 북한 지령이 개입됐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수양당 중심의 한국정치 사이에서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노동자와 서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삶을 바쳐 한국사회 진보를 일궈온 노동-진보 활동가들에 대한 존경과 명예를 지키는 문제였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민주노동당이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두고 자신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유권자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했다. 민주노동당 1차 분당의 단초가 됐던 일심회 사건이 거론될 때는 처리 과정에서 자신이 역할을 못한데 대해 후회와 통탄의 말을 쏟았다.
4일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소송 17차 변론기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증인석에 앉은 그의 진술은 거침이 없었다. 74세의 권영길 전 대표는 면역력이 약해져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장시간이 걸릴 헌법재판소 증인 신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증언이 끝나면 바로 장기요양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 창당정신과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얘기할 땐 거침없는 목소리에 자존감이 실려 있었다.
민주노동당 1차 분당 당시 자신의 과오를 말할 땐 절절하게 아파했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정파를 두고는 평생 외롭게 한국사회 진보를 위한 서로 다른 방법을 놓고 우직하게 갔기에 자랑스럽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을 비판하는 법안에 기권해 종북이 아니냐는 식의 정부 대리인(검찰) 심문에선 자신과 민노당을 욕보이는 일이며 국민과 민주노동당의 의정활동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선 진보정당이 이룩한 한국사회 발전의 자부심이 넘쳤다. 권 대표는 특히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한 경험으로 한미관계와 대북관계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한 평화체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기도 했다.
▲ 참세상 자료사진 |
증언과정에서 나온 진보정당의 역사와 뒷얘기
권영길 전 대표는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을 거친 후, 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15대 대통령, 초대 민주노동당 대표, 16대, 17대 대통령 후보, 경남도지사 무소속 후보를 거치며 진보정당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권영길 전 대표의 증언에선 진보정당 운동의 산 역사와 뒷얘기가 흘러나왔다. 권 전 대표는 “97년 대선 당시 민주노총과 전국연합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진보적인 정치 조직체, 단체, 개인이 총결집된 조직이 ‘국민승리21’이었다”며 “하지만 대선이 끝나고 나서 모두 다 흩어졌다. 중앙선거대책본부에만 300명 이상 집결했지만 투표가 끝난 다음날 다 흩어졌다”고 회고했다.
권 전 대표는 “다 흩어진 이유는 이 땅에 다시는 진보정당이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는 거였다. 그때 ‘아니다 진보정당은 가능하다. 진보정당을 만들어야한다.’ 그것이 시대적 소명이었다”며 “18명이 마포와 성북동 골방에서 시작한 진보정당 건설과정이 거의 2년 가까이 됐다. 그렇게 세운 진보정당의 대원칙이 선거를 통한 집권이고, 가장 중요한 게 민주성, 대중성, 투명성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선거를 통하지 않고 다른 길로 진보정치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조직이나 개인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만들고자하는 진보정당은 철저히 국민의 뜻에 따라 지지받는 진보정당 건설”이라며 “간혹 선거를 통하지 않고 옛날처럼 혁명을 통해 진보정치를 이루고자 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몸담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 전 대표는 “민주노동당 의정활동은 철저하게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정책과 활동에 모범을 보이고,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정당이 되려고 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당 활동이 당원이 주인이 되도록 밑바닥부터 당원이 움직이는 당이 되도록 하고 국민 이해하는 정당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고 밝혔다.
권 전 대표는 특히 이른 바 엔엘(NL, 자주파)과 피디(PD, 평등파)로 구분되는 당내 양대 정파 구도를 두고는 “민주노동당의 자랑거리는 이른바 엔엘과 피디로 불려지는 그런 개인 또는 조직의 참여라고 생각한다”며 엔엘과 피디에 대한 자랑을 이어갔다.
그는 “대체적으로 엔엘은 통일 중심의 운동을 한 개인 또는 조직이며, 통일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지도 못하는 시대에 통일이란 말을 끄집어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박 대통령도 통일대박이란 말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용기가 필요했다. 모두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질 때 이 땅에 가장 필요한 분단을 깨트리고 통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젊음과 인생을 바쳤다면 그것은 자랑거리지 공격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조직과 개인이 모아진 것이 어떻게 흠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이 땅 노동자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70년대 15, 16세에 농촌에서 올라온 여성들이 15시간씩 일하면서 일으킨 것이 오늘날 우리 세상이다. 청계천 다락방에서 각성제를 맞으며 조국 근대화란 이름 속에서 희생했다. 그런 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몸을 던졌다면 그것은 자랑거리지 공격받을 일이 아니”라며 “결론적으로 민주노동당은 그 두 세력이 모였다. 그것은 자랑거리지 흠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랑거리가 패권적으로 가버린 것이 문제다. 정파가 문제가 아니라 패권이 문제란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단언했다.
권 전 대표는 2007년 대선 후보 출마 당시 코리아연방공화국건설이 핵심 슬로건으로 제시된 과정도 설명했다.
“선거가 끝난 다음 한 언론에서 권영길의 주 패배원인이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내 건 것이라고 해 사실처럼 규정됐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동안 대선후보로서 제가 책임질 부분이 있어서 반박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린다. 권영길 선대본부에서 처음 내건 슬로건은 ‘새로운 공화국’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공화국’을 다른 후보가 먼저 내걸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제7 공화국’을 내걸려고 하는데 ‘제7공화국’은 또 다른 후보가 내걸었다. 선대본부에서 누가 첩자가 있는거 아니냐 그런 얘기도 나왔다. 그래서 나온 슬로건이 ‘코리아연방공화국’이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내걸었지만 주요 정책은 민주노동당이 지금까지 펴왔던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바탕을 두고 토론을 통해 총정리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의 공식 후보가 되고 나서 ‘코리아연방공화국’ 선거포스터를 당의 공식 결의로 모두 폐기시켰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자칫하면 편협된 협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단순한 통일 정책의 하나로 연방제 통일을 내거는 것만으로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알려진 바와 전혀 사실이 다르다”고 말했다.
권영길 전 대표는 당내 일심회 문제로 터진 정파 대립이 분당 사태까지 이어진데 대해선, 2007년 대선 패배 후 자격지심 때문에 대의원 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당을 만들었던 주역의 한 사람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면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하는 뼈아픈 경험”이라며 “오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생명을 걸고 노력했다면 분당 막았을지도 모르고, 진보정당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 토로했다.
“2012년 야권연대, 가치의 연대 이루지 못해 비판적”
2012년 야권연대 협상을 두고는 비판적이라고 했다. 권 전 대표는“야권연대를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적 토론을 통해 가치의 연대를 했어야 한다”며 “단순히 어느 지역 누구를 단일 후보로 할 것인지에 대한 연대연합만 이뤄지고 경제민주화나 보편적복지가 국민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대단히 잘못된 협상이었다. 야권연대의 경로와 방법에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의 통일 방안에 관해선 “통일주체로서 북한은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분단된 체제 속에서 상호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며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대원칙은 민주노동당의 주장이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7.4 공동성명 정신인데 진보진영이 이야기하면 북한 지령을 받은 것인가? 대결과 전쟁이 아닌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원칙에서 통일운동을 하자고 얘기한 통합진보당과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북의 지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민주노동당이 매향리 투쟁,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 촛불 투쟁들에 적극 나선데 대해선 “참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으로 잘못한 게 두 가지로 하나는 한미FTA를 신자유주의 바탕에서 읽지 못한 것이며, 또 하나는 미국의 국익에 따라 추진한 미군기지 평택 이전,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동당 의회활동과 대중투쟁 사이 관계를 묻는 질문엔 “투쟁이란 용어가 들어가 잘못 이해 될 수 있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박수를 받아야 할 문제다. 오히려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금권과 패거리정치, 당의 공천만 받으면 의원이 되는 길을 바꿔야한다. 민주노동당은 철저히 국민과 함께하는 정신을 지켰고, 통합진보당도 그 정신을 이어받고 강화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권 전 대표는 정부 측 대리인(검사)이 국회 법안 표결 결과를 제시하며 민주노동당이 김정은 3대 세습 문제나 북한 인권, 북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고 제기하자 “질문의 의도를 잘 안다. 법안에 반대한 사람들을 잘 보라. 이재오 의원 같은 분들도 있다. 그 분들도 북의 지령을 받는 사람들인가. 법안의 제목과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하고,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그 정도의 수준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내용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고 제목만 가지고 권영길이 국회활동을 통해 북한을 옹호했다는 주장은 권영길을 의원으로 만들어준 유권자와 국민 모독이다. 의원으로서의 책임을 분명히 지고 있다”며 “선거과정에서 분단 상황으로 나타난 모든 부분이 유권자에게 하나하나 다 알려졌다. 저를 그렇게 규정짓지 말기 바란다”고 되레 당부했다.
권 전 대표는 이날 헌법재판소 증인석에 앉게 된 소회를 묻자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재판관님께 감히 외람되게 말씀드린다”며 “정부가 민주노동당을 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제 영혼을 짓밟는 것이며, 저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국민에 대한 모독이이며, 민주주의를 매도하고 민주주의 짓밟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통합진보당은 충분히 대한민국 헌법의 테두리에서 용해되고 풀어낼 수 있다. 국민이 심판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결정하면 비극을 씻어낼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한 헌법재판관은 권 전 대표 심문 과정에서 “증인께서 (보여준) 당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지만 증인께서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데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오는 25일 오후 2시에 해산심판 청구소송 청구인인 정부 측과 피청구인 통합진보당 측 대표의 최종변론을 듣고 변론을 종결하기로 했다. 정부 측 대표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통합진보당 대표는 이정희 대표가 직접 나서 구술 변론을 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