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운동

[스크랩] 진보신당 비례후보 이선근, 그에 대한 메모(2008.3.9)

참된 2013. 1. 22. 04:14

 

민생후보 이선근을 비례대표 1순위로 추천합니다!


추천사유:


이선근은 “민생”을 늘 전면에 놓고 진정성 있게 활동해온 검증된 전문역량이자, 총선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진보신당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이선근은 그동안의 활동경력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민생을 직접 국회로 그리고 의회권력을 직접 민생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인물이자 노동자 서민들의 민생고 문제가 가장많이 발생하는 민생경제영역을 직접 커버할 수 있는 진보신당의 훌륭한 정치역량입니다.

아래는 제가 아는 이선근에 대한 메모로, 민생후보 이선근을 비례대표 1순위로 추천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진짜 민생정치의 산 증인이자, 우리시대의 진짜 좌파!

- [내가 아는 이선근, 그에 대한 메모]



경남 창녕 출생(54년생), 경남중⋅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74년)까지 그의 이력은 그리 특별난 게 없습니다. 또래들에 비해 조금 공부를 잘하는 정도밖에...


그러나 그 이후 이선근의 삶의 이력은 늘 노동자 서민을 위한 삶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그의 반독재민주화투쟁 동참은 이른바 “1976년 김지하 양심선언문사건으로 구속(긴급조치 9호 위반 구속)”되거나 80-81년 당시 학생운동의 양대사건중 하나였다고 얘기되는 일명 “학림사건”(‘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으로 무기구형을 언도받고 3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고초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선근은 이와 같은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사회운동사에서 최초의 노동자신문인 [주간노동자신문] 발기인 및 재정위원장(87-88년)으로 역할하는등 이제 막 새롭게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했으며, 또 이 과정에서 전국민주노동자투쟁동맹 사건으로 수배(89년~)되기도 합니다(이 때문에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지 못하고 90년 제명처리됩니다).


설상가상 그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도 이 때 발생합니다. 간암중기 판정이 그것입니다.

생사를 걸어야 했던 상황, 그이의 아내가 내과의사였던 덕에 그나마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지 않은 상태에서 간암을 발견할 수 있었고, 기사회생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며 이선근은 운 좋게도 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선근을 만난 것은 바로 이 시절의 끝 무렵입니다.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킬 뻔 했던 간암을 어느 정도 털어 내고 사회운동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의 끝 무렵에 해당하는 93년초. 과거 학생운동⋅노동운동의 유능한 활동가이자 경제이론가로 이미 인정받고 있었던 중년의 이선근은 제 [자본론 강의]의 성실한 수강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좀 놀랐었습니다.

이선근이 “학림사건”, “전국민주노동자투쟁동맹 사건”등과 관련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저처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선근은 초기 학생운동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사회과학 전문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본의 아니게”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역자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이선근이 쌓아왔던 이론적⋅실천적 자양분들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들을 거꾸로 제가 열심히 배워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이선근은 오히려 제 [자본론 강의]를 성실히 수강하고 배우며 토론하고 공부하는 학생의 면모로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까마득한 후배에게조차 새로운 것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훌륭하고 성실한 학생의 면모로...


그렇게 저는 이선근을 만났고, 94년 이후 제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던 약간의 공백기(95년 및 97년 상반기 등)등을 제외하면 저는 늘 이선근의 정치적 행보와 함께하거나 때론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함께 경제민주모임을 창립하기도 했고, 현재는 진보신당 민생경제본부에서 본부장과 팀원으로 팀웍을 이뤄 일하고도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선근을 처음 만났던 93년 초부터 지금까지 이선근은 “한결같이” “줄곧”이라는 단어를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에 보탬이 되거나 또는 직접적으로 노동자 서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운동’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반재벌 및 노동자소유경영참가를 위한 활동의 시작(94년)이나, 부패방지기본법 제정 국민운동본부 대표간사로서 부패방지법 제정운동(95년~ : 01년 7월에 제정됨)을 추진한 것 등이 그러합니다. 비록 당시 운동들은 진보정당이라는 그릇을 만나지 못해 정치적으로 발전하는데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 것이었지만,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의미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선근, 그의 화두는 예나 지금이나 늘 노동자 서민들의 삶의 문제, 즉 “민생문제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적 정치운동”입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며 [자본론]의 타당성을 미친듯이 말하며 “칼 맑스의 이론적 결론이자 대안사회의 바람직한 상인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알리고자 노력했던 저와는 달리, 그는 노동자 서민들의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운동의 전개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어느 정도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 서민들의 삶의 문제를 진정성 있게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활동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 태동하는 ‘노동의 정치’ ‘진보정치’는 결코 노동자 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신뢰⋅⋅참여를 끌어내기도 어려우며, ‘맑스가 말하는 완벽한 경제혁명’(진정한 사회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힘도 얻을 수 없다”는 [자본론]의 이론적 응용에 이선근은 주목했고, 또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선근이 부여잡은 화두 “민생문제등”과 그리고 그의 전문적 능력에 대한 진보정당 영역에서의 첫 시험대는 “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성패여부였습니다.


사실 민노당의 전사를 형성하는 98년 국민승리21시절에 정책기획 되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99년에 출범한 “경제민주화운동본부”를 이선근이 맡았을 때만 해도, 그를 익히 아는 저의 확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선근이 진보정당 중앙당 활동가로서 누구보다 왕성하게 대안적 정치운동을 조직해 내리라고는 상상조차하지 못했었습니다.


정책담당자로서 본부설립과 활동방향 등에 대해 직접 정책기획을 했던 저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본부장직을 수락했던 이선근. 이런 그가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조직해낸 대안적 정치운동의 이름은 “재벌부채탕감 국민환수운동”(99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재계서열 12위였던 한라그룹이 문어발식 부실경영, 방만한 차입경영, 상호지급보증 등으로 97년 12월 부도 처리되었고, 이 과정은 98년 5월 만도기계 노동자들이 조합원총회의 결의를 거쳐 정당하게 파업을 단행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부당하게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고 애꿎은 노동자들이 피를 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선근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주목했고, 사후적으로라도 자본과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운동의 형태를 고민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재벌부채탕감 국민환수운동”이었습니다.

이선근은 한라그룹 정몽원 전회장 등을 상대로 2000여명의 국민들이 일인당 5000원의 소송비를 내어 참가한 사법사상 초유의 집단소송(6년을 끈 이 소송은 02년 11월 - 1심승소, 05년 2월 - 2심 패소, 05년 3월 - 패소후 대법원상고 포기조건으로 만도노동자들과 정몽원회장 합의안 성립으로 사건종결)을 끌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정부차원에서 부실재벌들과 경영진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닉재산 환수작업을 벌여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냅니다. 또한 이 운동은 동시에 데이콤 LG인수 반대투쟁 지원(99년), 삼성 에버랜드 사건 법학교수 STOP 삼성운동 지원활동(00년), 경영부실 주범 삼성 이건희 삼성차 부채해결 촉구운동(01년), 부실기업주 및 부실경영주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촉구하는 서울보증보험공사등을 상대로 하는 국민감사청구 운동(02년) 등 수 많은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2000년 1월, 이선근은 그의 진보정당 활동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99년말, 향후 당 창당(00년 1월 30일) 및 4⋅15총선(00년) 그리고 총선이후 당의 먹거리를 위해 “무언가 큰 거 하나 만들어 달라”는 권영길대표의 부탁에 따라, 제가 만든 정책기획안은 “상가임대차보호운동 정책기획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책기획안은 숨가쁘게 진행되는 당창당 흐름 그리고 “선거가 코앞이고 선거운동할 인력도 없는데 무슨 상가임대차냐” 하는 등의 반대에 직면했고, 정작 저를 믿고 일을 맡겼던 권영길 대표조차 반대 입장을 굳히게 됩니다.


제가 나름대로 당시 여러 가지 경제사회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등을 고려해서 최선의 안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상가임대차보호운동 정책기획안”이 쓰레기통에 쳐 박힐 처지에 내몰렸을 때, 이선근은 사직서를 들고 권대표등과 담판을 하게 됩니다.


이선근은 이제 막 한국사회에서 자기 발로 걷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최초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 “상가임대차보호운동”은 800만 자영업자들을 노동자계급과 진보정당의 튼튼한 우군으로 끌어 들이는등 진보정당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운동이 될 수 있고, 또한 이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최적기가 진보정당의 인력등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국면인 선거 직전에서 직후 국면까지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반재벌 운동에서 그가 보여주기 시작한 능력” 등을 필요로 하는 당시 민노당 대표단은 어쩔 수 없이 상가임대차보호운동의 추진을 승낙하되(추진의 승낙에는 현 노회찬의원의 공이 컸습니다), 정책담당자 1인(송태경)과 당시 경제민주본부의 실무자 3인의 역량(이선근, 채진원, 자원활동가 임동현)만을 투입하는 것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사실 당시 민노당 활동가들 대다수에게 토지자본의 권한남용과 횡포에 대항하여 세입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보다 바람직하게 개선하려는 임대차보호운동과 같은 광범위한 대안적 정치운동이 진보정당의 성장이나 선거 등에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갖는가에 대해서 인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일부 활동가들은 기회주의자니 개량주의자니 고통받는 민중들의 문제를 우선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위한 운동이니 하는 유형의 혹평을 스스럼없이 내뱉었을 뿐입니다.

또한 외부인들이었던 참여연대의 민생관련 활동가(김남근 변호사, 박원석 현사무처장, 안진걸 전간사 등) 정도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고작 4인을 투입하여 시작한 이 운동이 “민주노당만이 유일한 민생정당⋅정책정당”이라는 사회적 호평을 끌어 낼만큼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선근의 판단과 인식은 옳았고, 또 전문역량을 가진 운동의 총괄지휘자로서 한 때의 이벤트성 사업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꾸준히 일을 추진하게 됩니다.


더구나 이선근은 운동의 영역을 상가임대차로 한정하지 않고 주택등으로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부도공공임대아파트의 문제등에 대한 대안적 정치운동은 사실상 거의 혼자 주도하다시피 하면서 개척해낸 운동이기도 합니다(06년 5⋅31 지방선거 당시 광주 광산구에서 민노당 후보 4명 전원이 당선된 일은 임대아파트 세입자보호운동이 가져온 직접적인 정치적 결실이기도 합니다).


이선근의 정치활동에서 또 하나의 뚜렷한 성과를 가져온 운동은 고리대추방운동(2001년 3월~)과 가계부채SOS-신용회복운동(2001년 12월~)입니다.


2000년 말부터 눈에 띄게 확장되기 시작한 약탈적 대출행위(카드사와 제2금융권의 고리를 매개로 하는 공격적 대출행위 및 사금융 고리대부업체의 급격한 성장)와 가계부채 피해자(이른바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이선근과 경제민주화운동본부로 하여금 운동의 중심축 일부를 가계부채 영역으로 이동하게 합니다.


종전 한국 사회에서는 한 번도 있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사태였지만, 이선근은 법제의 정비와 직접적인 피해구제 활동, 문제해결의 대안들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보를 위한 활동등을 효과적으로 지휘해 냅니다.


그 피해자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저소득층 노동자와 사회적 취약계층들이었고, 노동자 서민들의 정당임을 표방하고 있는 진보정당이라면 마땅히 왕성하게 대안적 정치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

그렇지만 당시 경제민주화운동본부와 연대활동을 했던 참여연대를 제외하면, 노동⋅사회단체들의 실질적인 문제해결 노력은 거의 없고, 심지어 민노당 자체에서도 빈수레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인력⋅재정등을 전진 배치하지 않던 열악한 상황.


그렇지만, 이선근은 참여연대, 관련 분야의 변호사나 학자등의 외부전문가 그룹, 피해 당사자 등과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냅니다(당시 이선근과 경제민주본부가 고리대-가계부채 문제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데 물신양면으로 도움을 주셨던 전문가그룹 중에는 상당수가 민노당 자체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분들까지 있었지만!)


어쨌든 “진보신당”으로 옮겨온 지금도 왕성하게 진행되어야할 고리대추방⋅가계부채SOS-신용회복운동은 무려 20만명 가량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구제 상담을 통해 희망을 주었으며, 자체 프로그램인 “나홀로 빚 탈출” 지원활동을 통해 “개인회생⋅개인파산면책 절차”를 밟아 채무의 고통으로 해방될 수 있었던 사람만 무려 1만여명에 이르며, 심지어 개인회생제 도입, 개인회생⋅파산절차를 밟는 자에 대한 해고와 차별금지등 관련 법제를 개선 정비한 것만도 백여건 이상이 될 만큼 전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언론⋅방송등으로부터 고리대나 가계부채 문제의 해결하면 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현 진보신당 민생경제본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성장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이선근의 “민생문제와 이의 바람직한 해결을 위한 대안적 정치운동”에 대한 인식은 임대차나 가계부채 영역 등 민생경제 영역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선근의 “민생문제등”에 대한 인식의 핵심에는 늘 “노동”이 있습니다.

비록 노동영역과 관련해서 과거 민노당 내에서는 “노동위, 비정규본부”등의 고유 업무영역(민생경제영역을 담당하는 이선근등은 넘봐선 안될 영역)으로 인식되는 경향 등이 있었고 이 때문에 구체적인 실행에 나설 수는 없었지만, 이선근이 늘 놓치지 않고 있는 문제의식의 하나는 노동영역에서 보다 광범위한 대안적 정치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선근이 과거 민노당에서는 노동영역에서 직접적인 대안적 정치운동을 조직해내기 위한 일을 주도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선근이 노동영역에서의 민생문제들에 대한 대안적 정치운동의 전개를 방치해온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권한과 인력 및 예산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할 수 있도록 해왔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제가 중심이 되어 틈틈이 추진한 일들이기는 하나, 노동자기업인수운동 지원활동, 소유경영참가 및 경영민주화운동, 반재벌 운동 및 이의 연장선상에서 인수합병 관련 사업장들에 대한 노동조합 지원활동 등이 그러합니다.

즉, 데이콤 LG인수 반대를 위한 노동조합 지원활동에서부터 최근의 대우조선해양, 쌍용건설 인수합병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지원활동을 진정성 있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폴로산업, 현대차, 기아차우리사주조합 민주화등을 위한 노동조합⋅우리사주조합 지원활동에서부터 LIG손해보험, 한국가스공사등에서 우리사주조합에 대한 기업출연제도를 끌어 낼 수 있게 한 성과도, 부도등의 위기에 처한 사업장에서 임금과 퇴직금을 털면서까지 자신의 삶의 일터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자기업인수 지원운동에 제가 가담해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해 준 것도, 그 배경에는 이선근의 “민생문제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선근 그가 유독 노동운동⋅사회운동의 영역에서 대안경제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들(공기업 내부민주화와 열린경영의 촉진, 반재벌-민주적 참여기업화, 노동자인수 및 노동자소유기업 지원 법제화, 노동중심의 농협⋅수협등의 내부민주화,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법제화 등)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경우에 따라 절박한 민생문제의 해결 활동조차 잠시 미뤄두고 직접 행동에까지 나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선근의 “민생문제”에 대한 인식이 사회전체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선근 그에게 민생은 노동자 서민들의 삶 그 자체이며, 따라서 그에게 민생문제를 축으로 하는 대안적 정치운동이란 자본과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노동자 서민들의 삶을 보호하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바람직한 개편을 촉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대안적 소유지배구조를 촉진하고자 하는 운동은 이들 절박한 문제들을 직접 야기하는 사회적 생산관계를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려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민생문제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보면, 이선근 그가 민생문제의 정치적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의 핵심은 “이행”입니다. 예를 들어 부도공공임대아파트의 세입자 문제 해결의 목표는 주거권 확보와 임대보증금등의 완전한 보호등이 되며, 그렇다면 현재의 조건에서 이 목표로의 이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고 활성화시켜야 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선근 그의 민생문제에 대한 진정성과 전문역량,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활동의 하나로 전국민생탐방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명망가들이 노동자 서민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마는 보수정당들의 이벤트성 민생탐방과는 전혀 달리,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이에 대한 분명하고 설득력있는 정책대안들을 가지고 노동자 서민들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진보정당다운 민생탐방을 이선근 그는 저나 민생경제본주의 활동가들 못지않게 8년 이상 꾸준히 해왔습니다.


2000년 1월이후 햇수로는 8년간, 거리로는 지구 4바퀴 이상에 해당하는 16만Km 이상, 일자로는 800일 이상, 지역으로는 강원 및 경기 북부에서 제주의 끝자락까지, 직접 만나 얘기하고 소통하면서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정당의 필요성을 직접 느끼게 해 준 경우만도 수십만명, 그렇게 그는 진보의 씨를 뿌리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주로 접근하는 영역의 하나가 종사자 3-4인이하의 상가라는 점을 들어, 그는 중소자영업자나 소자본가들을 더욱 위하는 사람처럼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선근 그는 그의 상가탐방 활동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800만 자영업자들을 1400만 임금노동자들과 진보정당의 든든한 우군으로 끌어 들이는 활동이자, 바로 그 공간을 삶의 일터로 삼아 노동하고 있는 저소득층 노동자들(사실상 미조직되고 심지어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는 노동자들)과 진보정당의 정치적 소통을 위한 구체적인 첫 작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아는 이선근은 제가 그를 알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대안경제의 문제에서부터 심지어 쪽방촌 노인들의 주거⋅사회복지 문제와 같은 작지만 아주 중요한 영역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활동해왔으며, 실천해왔습니다. “민생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이라는 화두” 하나를 들고!


물론 이선근이 심상정, 노회찬, 김혜경, 이재영, 조승수 등등의 수많은 활동가들로부터 “진보정당의 자랑”이니, “서민들의 민생지킴이”니, “진보정당의 보물같은 존재들”이니, “감동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니, “진보정당의 자랑정도가 아니라 진짜 투사”라느니, “우리 시대에 진정한 의미의 진짜 좌파” 등이라고 호평을 듣게 된 데에는 이선근 그만의 능력이나 진정성등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팀웍을 이뤄 진정성 있게 함께 활동한 활동가들(송태경, 채진원, 임동현, 조인숙, 김진희 등) 및 이들의 활동에 호응해줬던 수많은 지역의 활동가들이나 전문가들, 그리고 이름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선근은 분명히 진보정당을 더욱 진보정당답게 할 수 있는 인물이자, 진짜 민생정치를 펼쳐온 우리 시대의 산 증인이며, 또한 그에게 적절한 권한과 역할 및 인력과 예산등이 주어질 수 있다면 진보신당의 더 큰 도약과 혁신 등을 촉진할 수 있는 검증된 전문역량이라는 점입니다.



송태경(민생연대 사무처장) 올림 2008년 3월 8일

p.s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삶의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삶(즉, ‘민생’)을 진정성있게 제대로 세심히 챙기지 않는다면, 진보정당은 결코 더 나은 더 바람직한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힘조차 얻을 수 없다”는 이선근과 나의 공통의 신념을 믿으며...






*주: [송태경 이외에, 이선근과 함께 팀웍을 이뤄 민생보호활동을 하고 있거나 현재도 함께 하고 있는 주요 구성원 소개]


- 채진원(99년~02년까지 활동): 상가임대차보호운동의 실무등을 현 진보신당 민생경제본부의 임동현과 같이 담당했다. 본부를 떠난 후에는 정치관계법 대안과 실무등을 담당했었고, 민노당 의정지원단 의정정책 국장 등을 거쳤다. 현재 박사과정중이다. 본부를 떠나기는 했으나, 팀웍을 이뤄 성실히 활동했던 사람으로 빼놓아선 안될사람으로 조건만 된다면 자신의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하는 묘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


- 임동현: 과거 민노당 시절 “민노당의 아이디어 뱅크”로 통했던 사람이다. 다른 팀원과 반드시 협의는 하지만, 사실상 실무기획과 순발력 있는 대응과 집회등에 대한 아이디어 대다수는 그의 머리와 실천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지혜로운 꾀돌이" "서민을 위한 꾀돌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적이 있었는데, 더 나은 별칭을 붙여도 무방한 사람이다.


- 김진희⋅조인숙: 서민금융, 개인회생⋅파산면책분야에서 최고의 상담능력보유자들이기도 하다. 삶 자체에서의 경험등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가꿀 줄 아는 사람들이다.


- 임진수⋅양규서: 과거 민노당의 민원실 책임자들이었으며, 직접적인 유관부서의 구성원이라는 특성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한통속이 되어 훌륭히 활동한 사람들이다; 기초노령연금 알리기 운동등 수많은 운동들을 가능케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 이00: 자원봉사자지만, 다른 구성원들 못지않게 역할분담하는 부분들을 훌륭히 소화해내는 사람이다. 그의 실명등을 소개하지 못하는 부분이 좀 아쉽다.

출처 : `서민들의 민생지킴이` 민생연대
글쓴이 : 송태경 원글보기
메모 :

이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