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꽃양은, 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부제를 줄줄이 달고 있는 테마들이 엎치고 겹쳐 엮어진 영상보고서이다.
남성노조원들이 대다수인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이 먹을 밥을 지으며,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3년에 걸친 이야기이다.
그녀들을 둘러싼 남성노동자, 노조지도부, 국가경제에 대한 곤란한 질문이다.
소수자를 억압하는 노동운동의 대의에 대한 때늦은 의의제기이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권력관계와
그 관계망에 대한 복잡한 탐색이다.
“밥”을 짓던 그녀들이 한순간 투쟁의 “꽃”이었다 희생“양”이 되어,
“밥”먹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3년. 그 난해한 시간들을 퍼즐조각처럼
맞추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화면이다.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끝까지 싸우자던 노조위원장이
277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277명 속에 들어간 144명의 무시당한 생존과 자존심에 대한 항변이다. 바로 그 도장을 찍은 노조위원장을 사장으로 섬겨야하는, 하루아침에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144명 여성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기억이다.
하청자리도 못 얻고 쫓겨난 133명의 남성 정리해고자와
끊임없이 비교 당하면서, 이기적이라 내몰리고,
경기 좋아지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꿋꿋하게 버티다 무참하게 짓밟혀버린
늙은 여성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 투쟁에 대한 지난한 기록이다.
노조 자율 식당이니까 144명 모두가 사장이라는 말 잔치로
뼈를 깎는 노력을 재촉하는, 사장이면서 동시에 노조대표인 두 얼굴의 남자들.
그들이 흘린 거짓말이 지그재그로 숨어있는 혼란스러운 넌픽션이다.
노.사.정 공동의 이해를 위해
무늬만 고용 승계 되어,
절반의 월급으로,
두 세배의 노동강도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밥을
몸이 부서져라 지으면서도,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하는
불안한 노동과 상처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녀들의 밥짓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십 수년 칼질로 손목 뼈마디가 시큰거린다.
김치다라이 오이 절인 박스를 냉장실로 넣었다 꺼냈다..
멸치 다시 국물 한 솥 큰 것을 들었다 놓았다.. 허리뼈는 삭아 시도 때도 없이 결린다.
제 때 밥 먹을 여가도 없어 “식당에서 일하면서 배고프다면 믿겠느냐?”며
그러면서도, 그녀들의 밥짓기는 계속된다. 왜...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연하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한 일, 단순한 생존 그 이상이다.
포기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인생이다.
길고 긴 시간 그 일을 몸에 부친 살벌한 자존심이다.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그녀들의 프로페셔널이다.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녀들의 전문성이다.
절대 한구석으로 대충 밀쳐놓을 수 없는 일의 영역-밥의 문제,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이 사회 한복판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녀들의 뜨거운 외침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일을 하건, 싸우고 지지고 볶던, 거창한 정치를 하건, 그 힘은 다 어디서 나오는가? 삼 시 세끼 밥을 먹고 만든 힘,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얀 쌀알이 익으면서 나는 뜨거운 냄새, 한 솥 국이 펄펄 끓으면서 솟아오르는 투명한 연기. 현대자동차 식당은 커다란 밥공장이다. 이 밥공장 주변으로 콘베이어가 돌아가며 하루에 몇 천대의 차가 뽑아져 나온다. 작은 나사하나, 부품하나, 조달이 끊기더라도 콘베이어 라인은 잠시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밥공장이 문을 닫으면 그 수만명의 에너지는 어디서 조달해야 하는가? 모두 회사 주변 식당으로 몰려갈 것인가? 양정동 일대 식당이 모조리 가동되어도 점심 한끼 해결되지 못한다. 부품 조달이 안되면 잠시 쉬면 되지만, 먹을 밥이 없으면.. 다시 상상해 보라. 매일 먹는 밥, 너무도 당연하게 먹었겠지만, 한끼 건너뛰면 사람이 처질 것이고 두끼세끼 그때는 쓰러진다. 이 소중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아줌마가 “밥꽃양”에서 말한다.
사흘 굶겨놔서 도둑질 안 할 사람 없다 그러쟎아요? 그럼... 먹는데 그렇게 많은 비중을 두면서 먹는걸 맛있게 만드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대를 받아야 되는지...? 직접 생산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임금을 많이 받아 가는 게 맞고, 밥을 하는 사람은 임금을 작게 받아야 되고, 똑같은 사업장에서.. 있어도 줄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은 가사노동을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거쟎아요? 결국은 그 고리 먼저 짤라내자고 하는데, 노동조합도 동의한거 아닙니까? 그러쟎아요?
어디에서 밥꽃양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내가 언제나 부딪히는 문제이다. 나의 머리 속에 하나의 시공간으로 들어차 있는 98년부터 2002년까지. 모든 순간이 아주 중요한 결절점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서도 어떤 시간의 문을 열어야 할지 여전히 망설여진다.
2002년 봄. 햇살은 화사하고 꽃이 피고있다. 98년부터 지금까지. 밥꽃양이라는 영상보고서와 더불어 5번의 봄을 맞았다. 작년 봄을 빼고는 한번도 꽃을 만져보지 못했다. 만져보기는커녕 꽃이라는 게, 봄 햇살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는 지는 안중에도 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의 큰아들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딴사람처럼 덩치가 변했다. “아들 밥도 안 해주는 엄마가 밥 이야기 할 자격 있는가? 웃긴다!”라고 독설까지 던진다.
2001년 봄. 그러니까 2000년 겨울 아줌마들의 단식을 이어 부치던 시간, 우리는 힘들 때마다, 작업실을 나서면 여기저기 널려있는 상추밭에서 상추도 훔치고, 언덕배기에 피어있는 꽃들을 꺾어왔다. 돈주고 사지 않고 생으로 훔치듯 꺾어온 꽃들을 유리컵에 담아놓을 때, 그 불노소득으로 흔쾌해지던 짧은 순간. 뿌리채 뽑아온 상추를 씻어 열심히 쌈 싸먹을 때, 그럴 땐 머리가 확 맑아진다. 그러나 화면을 돌려보기 시작하면 다시 악몽이 시작된다. 편집점을 결정을 할 때쯤이면 서은주 감독은 여지없이 “배가 아프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다”며 펄펄 끓는 몸뚱이를 이불 속으로 숨겨버린다. 새벽까지 5분 정도 분량을 부치고 “이제, 한번 봐”라고 이불을 들추면 밤새 소리는 다 들었다고 한다. 2000년 단식 화면을 볼 때마다 거의 하루도 거르는 일없이 몸살을 앓던 서 감독의 고통으로 나는 편집점을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98년 봄. 그때는 다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밥꽃양과 같은 현장인 울산시 북구 양정동 700번지, 현대자동차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 암울하고 스산한 110만평 회색 콘크리트 공간의 봄기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3만4천명 중의 144명에 대한 이야기- 밥꽃양은 나도 모르는 새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 IMF의 봄이었다. 사라질 기업은 사라져줘야 하고, 살아남은 기업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하는 구조조정이 시작된 때였다. 재빨리 군살을 제거하고, 노동시장은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데, 그 군살을 도려낸다는 것이, 곧 정리해고를 통해 노동자의 목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런 한국경제의 생존전략이 이의제기 할 틈도 없이 마냥 휘몰아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만 명은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공장밖에는 실직자가 200만명을 넘어섰고, 자동차 내수는 급격하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진보적인 교수들조차, 자동차 산업은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이기 때문에 생산규모 축소는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정리해고 반대"는 합리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충고들을 한다. 그 충고와 진단은 결국 노동자들의 목줄을 압박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작용했고, 모든 것은 "국가경제위기"를 우선 고려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전개되었다.
자동차 산업의 호황은 아예 끝났다... 이 불황은 장기화될 것이다...
이런 흉흉한 소문들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97년 11월에 발표된 "인력관리 운영계획"에 따른 거대한 인력 조정 시스템은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만명을 밀어내는 프로젝트가 카운트다운 된 것이다. 그 때 화면을 돌려보면 정리해고라는 긴 터널을 미이라처럼 지나가는 3만 4천명의 무채색 공포가 보인다.
당장이라도 공장 문을 닫을 듯 시도 때도 없이 라인이 멈추고, 그 라인이 서고 도는 대로 숨통은 강약을 반복하며 짓눌리고 있었다. 쪼았다 풀었다 다시 쪼았다.. 피를 말리는 공포가 조작되고 있었다. 그 “조작된 공포”는 노동자들에게 집단최면을 걸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나가줘야 된다, 그것도 무더기로..."
너나없이 이런 생각에 잠겨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6개월 안에 만 명을 정리하겠다는, 시간까지 정해놓고 벌리는 서바이벌게임이었다.
잔인한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공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촬영 진도를 서둘렀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기 때문이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저녁에 식당으로 들어서면, 아줌마들은 ‘라인에서 분위기는 어떻는지...’ ‘노동조합은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버텨야 하는지 나가야 하는지..’ 보고 들은 소식이라도 전해 달라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오곤 했다. 그러면서 밥도 듬뿍 더 담아주고 반찬도 수북히 덜어준다. 아줌마들의 수심을 눈꼬리만큼이라도 덜어줄 소식하나 건져오지 못한 우리는 연신 목구멍에 걸리는 밥만 꾹꾹 눌러 삼켰다. 그럴 때마다 왠 밥은 그리도 많은지.. 열심히 밥 떠 넣을 염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남길 수도 없었다. 고개 처박고 빨리 밥그릇을 비울 수밖에. 분명 내 잘못도 아닌데, 얼굴을 마주볼 수 없어, 왠만하면 공장 식당에선 밥을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음은 급한데 마음만큼 작업속도가 나지 않았다. 결국 98년 6월까지 공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봄이 끝나고 초여름이 시작될 때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 쾌적한 계절이 다가도록 우리 카메라에 담긴 것은 절망뿐이었다. 공포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표현하지 않는 무기력감 뿐이었다. 우리는.. 밥줄을 놓고, 생존을 놓고, 인간을 무기력하게 굴복시키는 정교한 심리극을 보게된 것이다. 8천 여명이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정리해고. 단 4글자로 표현된 이 제도가 실제 개인들과 만나 부딪히는 아주 복잡한 현실, 수천 편의 괴로운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함께 떠밀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주방 뒤에서 서성이는 아줌마들하고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공장을 돌아다녔다.
98년 4월 9일. 9200명을 줄이겠노라는 회사의 발표가 있었다. 그로부터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으로 폐기 처분되는 과정은, 사후기록으로 보면 자진 퇴사자 통계수치일 뿐이겠지만, 치밀하게 전개되는 한편의 거대한 싸이코 드라마였다. 그때 촬영노트를 보면 회색 진공 상태에 갇힌 유령들을 본 것 같은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스스륵 스르륵 라인이 서고 도는 대로 노동자들은 공황상태와 희미한 희망을 간헐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느리게 돌아가는 라인 앞에서 그들은 ‘누가 잘려 나갈것인가..나는 피할 수 있겠지..’라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창백해진다. 그러나 참고 버티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눈치보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웅크린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시 라인이 서는 것이다. 잠시 잠깐 속았다는 생각 때문에 더 비참해지는 감정. 그것조차 감추려고 이번에는 아예 표정을 없앤다. 이런 일이 수 차례 반복된다. 실신과 발작이 거듭되던 마음속은 마침내 만신창이가 된다. 심리적으로 이미 죽음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 심리적 죽음을 소화해내려 발버둥친다.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참아내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절망하지 않는 것, 미덕으로 삼아왔던 습성들이 고개를 쳐든다. 결국 엉터리 처방전에 속아 위장된 희망과 결탁해버린다. 수개월에 걸쳐 이미 겪을 만큼 겪었던 불안감, 더 이상 공포에 노출되고 싶지 않은 심리, 잘리느니 내 발로 나가겠다는 은폐된 자존심.. 어디 가서 굶어 죽으랴...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마침내 희망퇴직이란 그물에 걸려들어 썰물처럼 공장을 떠났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두통약을 달고 산다. 라인에 있는 어떤 아줌마는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쥐약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라 한다.
식당을 내리누르는 불안감은 이 보다 훨씬 더했다. 다른 게 있다면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공포감을 숨기는데, 아줌마들은 드러내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왜 불안한지를 표현했다. 식당을 하청화 시키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기에, 식당은 정리해고 0순위란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체념하면서 나갈 사람은 나가고 있었고, 남으려는 사람들 또한 그 결심이 만만한 게 아니었다. 부부가 함께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센터식당 어떤 아줌마는 남편과 오랜 고민 끝에 남편이 희망퇴직을 하기로 결정하고 아줌마가 남기로 했다한다. 단조식당 아줌마도 아들과 실갱이가 붙었다. 엄마가 희망퇴직 내라.. 아들 니가 내라.. 그러다 결국 최후로 불복하는 정리해고자 1538명의 명단에 모자가 나란히 들어가게 된다.
4월 17일부터 시작된 희망퇴직은, 파업중인 8월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7020명이었다. 간부급 권고 사직 및 자연감소 1330명까지 보태면, 모두 8350명이 제 발로 걸어나간 것이다. 8350명을 사라지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제거한 것이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아주 우아한 방법으로. 조용하게... 그러니까 정리해고 숫자에 대한 회사측의 부담은 새털처럼 가벼워져버린 것이다.
98년 여름. 그리고 파업이 시작되었다 1538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쟁점으로 부상했지만, 7월 20일부터 시작된 파업은 전혀 다른 게임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밀한 군살제거 작전은 고요하게 마무리되었고, 피를 말리던 몇 달간의 서바이벌게임은 승패가 판가름 났으며, 여유인원은 목표치만큼 착착 제거되었다. 인원문제에 관한 한 회사와 노조의 힘 대결은 이미 게임오버된 상태에서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7월 20일부터 시작된 파업은 전혀 새로운 게임이었다. 1538명을 붙잡고 규모를 줄이니 늘이니 하는 것은 그 게임의 핵심이 아니었다. 굳이 277명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숫자가 아니었다. 목표는 따로 있었다. 그 새로운 게임의 주요 아이템은 노조 대표의 사인이 들어간 합의서 였다. 그것을 손에 쥐는 것만이 정부와 회사, 공동의 목표였다. 이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협상 테이블은 오히려 숫자의 문제를 집착하면서 돌아가는 척했고, 결론은 277명으로 떨어졌다.
노조와 회사는 8월 24일 아침, 277명만 정리해고 하는 윈-윈 게임을 마침내 끝낸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사건인가. 이 절묘한 게임에서 회사와 정부는 노조위원장의 사인이 들어간 정리해고 합의문 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고, 노동조합은 살아 남았다. 나머지 1261명은 2년 무급휴직으로 밀려났으니, 일단 만 명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완벽한 인원감축과 합의서, 회사는 양손에 떡을 쥐고, 8월 24일 그날 오후부터 민첩하게 공장가동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277명 속에는 마지막까지 농성텐트에 남아있던 식당 아줌마 144명이 단 한명도 예외 없이 몽땅 포함되어 있었다.
그 144명중에는 둘 중에 하나는 남는다고 남편을 먼저 희망 퇴직시키고 끝까지 싸운 아줌마도 있었다. 젖먹이까지 포함해서 3남매를 남기고 15년 전에 세상을 뜬 남편 대신 입사해서, 식당 일을 하며 맞이를 이제 고3 까지 밖에 못 키운, 줄줄이 아이들 셋 공부시킬 일이 태산같이 걱정인 아줌마도 있었다. 실직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진 아줌마들이 많았음은 물론, 모자가 나란히 정리해고 명단에 들어, 아들과 함께 끝까지 농성장을 지킨 아줌마도 있었다. 그녀들은 희망퇴직 하면 금강이나 엘지에 우선 고용시켜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치고 죽어도 못나간다고, 끝까지 해보자고 독한 마음으로 살벌하게 자신의 모든 걸 걸어버린 144명의 늙은 여성들이었다. 공권력이 들어오면 찌르겠다고 대형 옷핀을 5개씩 나눠 갖고, 최류탄 막겠다고 수경까지 목에 걸고, 끝까지 남아있던 144명은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를 당해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대표가 그걸 합의해준 것이다. 대공장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그 거대한 대열 속에 파묻혀 있던 아줌마들-늙은 여성노동자들의 존재론적인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들이 겪어야 했던 것은 일자리나 생존이 유린당한 억울함, 그 이상이었다. 존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박탈감, 공허감 같은 것이었다.
98년 8월 24일. 왜 우리를 팔아 넘겼느냐고.. 왜 우리를 속여넘겼느냐고.. 노동조합으로 몰려가서 드러누워 있다, 뛰쳐나오는 그녀들과 마주친 것이다. 36일간의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이 마무리되던 날, 그날. 나 또한 쇠막대기처럼 목덜미에 내려꽂히던 한여름의 햇살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사라진 공장을 몰려다니던 그녀들의 까무라치던 눈빛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내달리다 내팽겨쳐진 징을 들고 부러진 각목으로 꽝꽝 두들기다 “깨진 징소리 깨진 우리들...”이라고 낮으막히 토해내던 탄식. 그리고 캄캄한 밤, 무언가를 마구 패대기치며 내지르던 늑대울음 같은 고함소리. 그 성난 생목소리들은 아직도 내 귓전에 뱅뱅 돌고 있다. 카메라를 끄고 자정까지 공장에 남아있던 그날, 화병을 못이기는 사람처럼 몸서리치며 울부짖고 또 울부짖는 그녀들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꼼짝없이 98년 8월 24일에 갇혀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밥꽃양은 신자유주의 여성노동자의 살아있는 텍스트라면서, 제작동기를 물었다. 그렇지만 나는 제작동기를 근사하게 요약할 수가 없다. 98년 여름의 악몽과도 같은 상황은 그 이후에도 강도를 더해가면서 144명의 식당여성노동자들에게서 일어났으며, 그 때마다 왜 이 영상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지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만 둘 이유와 계속해야 할 이유를 동시에 만들면서 갈등의 씨실과 날실을 꼬아오면서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엉긴 실타래를 한올한올 풀어가는 것까지만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귀기울이고 가만히 주목해보자고.. 아줌마들의 고통이 있었고, 그 뒤에 일그러진 우리 모두의 맨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고, 나는 그런 것 같다고, 아직은 찬찬히 더 뜯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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