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열망의 붓질, 민중의 가슴 다시 데울까 | |
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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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기자 | |
23년전 그린 그의 판화는 보기만 해도 눈이 델 것 같다. 이글이글거리는 불기운이 화폭을 태워버릴 듯 진동한다.
토끼꼴 한반도 대신 불끈 쥔 오른 주먹 치켜든 채 포효하는 한 사내 민중의 모습이 한반도가 되어 약동한다. 곰보탈 쓴 말뚝이 또한 몸에서 구름 기운 피워내는 한반도가 되었으니, 불 기운 어린 통일 춤사위를 피워낸다. 명상 판화를 찍고있는 작가 이철수씨가 84년 천에 찍은 목판화 <한반도>(2폭)는 지금과 전혀 다른 그 기운생동함, 뜨거움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오는 2월2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막을 올리는 ‘민중의 힘과 꿈-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전(2월19일까지)에는 80년대의 열망을 뒤로 한채 사그러진 그 시절 민중미술 작가들의 잊혀졌던 명품들이 등장한다. 이철수의 이 걸개판화 뿐 아니라 신학철, 임옥상, 황재형, 민정기, 오윤, 이종구씨 등 알려진 민중미술 작가 23명의 낯설었던 걸작들이 숱하게 내걸린다. 이 예사롭지 않은 컬렉션을 만들고 공개한 것은 80년대 정권의 폭압 속에 화랑들이 눈길조차 안주었던 이들 작품을 일일이 전시 현장을 돌며 사들인 사업가 조재진씨의 호의 덕분이다. 그가 청관재란 이름 붙은 과천 집에서 산다하여 청관재 컬렉션이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들 구입비는 당시 민중미술 작가들의 전시공간 ‘그림마당 민’의 유용한 운영자금이 되었다.
조재진씨가 80년대 수집한
컬렉터 회고전 격이지만 전시장을 돌면 명백하게 80년대 초중반 민중미술 운동가들의 초심과 이제는 식은 당시의 열정을 좇아가게 된다. 조씨가 가장 애착을 갖고 수집했던 신학철, 임옥상, 민정기, 황재형씨 등의 다기한 작품들을 1, 2층에서 보면서 젖게되는 감상의 소회는 반가움과 착잡함이 뒤섞인다. 조씨가 20점 이상 수집했던 신학철씨의 작품들은 단연 압권이다. 붉은 빛 화면에 수난의 우리 근현대사 군상들을 담은 대작 <한국근대사> 연작과 척박한 황야에서 하늘을 향해 땅이 손을 뻗어 절규하는 <타는 목마름으로>가 내걸린다. 신씨가 감옥살이를 할 때 도와주려고 샀다는 <일하는사람7>은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푸대에 싸서 급하게 가져오는 바람에 생채기처럼 푸대의 선 자국이 남아있다. 지금은 공공조형물 사업에 주력하는 임옥상씨의 재기어린 붓질이 들불로 나타난 79년작 <불>,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거대한 무를 이땅 농촌 풍경 위에 걸쳐놓은 <무>는 사실상 그림에서 손놓은 작가의 근황과 얽혀 복잡한 감회를 자아낸다. 80년대 중반 경기도 양평에 칩거하며 진경산수 그림에 몰두하기 전 화가 민정기씨가 알몸 남녀들의 군상도로 내놓았던 연작 <숲에서>의 원초적 매력도 여전하다. 반 고흐의 민중화를 떠올리게 하는 화가 황재형씨의 탄광 작업 부조와 회한어린 감동을 선사하는 유화<퇴근버스> 등을 재발견하는 기쁨도 못지않다.
지난 연말 기대를 모았던 민중판화가 오윤 전마저도 언론과 미술판의 냉담한 반응 속에 막을 내렸다. 참여미술 작가들은 시장의 냉기에 더욱 주눅 들거나 가위 눌린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론가 최열씨의 말마따나 “한국 미술에 기운생동을 회복시킨 민중미술의 잠재력”, 그 ‘힘과 꿈’이 시장에서, 평단에서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란 화랑쪽과 컬렉터의 기대감이 전시장 한켠한켠 행간에 서려 있다. 그만큼 이 기획전은 상상력의 궁기로 쪼그라든 현 민중 미술 진영의 현실을 되짚는 계기이기도 하다. (02)720-102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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