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깊은 그림

진실을 외치는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

참된 2008. 11. 15. 11:27

                

 

 

 

 

진실을 외치는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

 

글 | 이선화 기자

 

 

위 사진과 아랫글은 art(http://www.artinculture.kr/content/view/491/73/)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민중을 위한 삶, 민중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는 황재형. 민중미술의 중심에 선 그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6년 만에 개인전(12. 4~2007. 1. 6)을 갖는다. <쥘 흙과 뉠 땅>이라는 제목으로 60여 점의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태백의 산천과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작가가 외치는 진실과 희망의 메시지. 태백 작업실에서 작가를 만났다. 행동하는 리얼리스트 황재형은 무엇을 보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좇아가 본다.

 

“거 참 잘 그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어느 지물포 아저씨가 황재형의 작품을 보고 한 말이다. 유홍준은 글에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황재형의 태백 화실에 가서 <앰블런스>라는 제목의 작품을 구입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아내가 고른 그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작품은 저녁 즈음에 앰블런스 한 대가 불빛을 밝히며 산길을 지나고 있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앰블런스 옆으로 보이는 숲은 마치 요동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태백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는 아저씨는 앰블런스가 울리면 그림에서처럼 자신의 마음이 격렬히 동요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서울사람이지.… 당신은 몰라. 저녁나절에 앰블런스가 울리면 세상이 이렇게 보인다구. 산천초목이 흔들리구, 쥐죽은 듯이 조용하구. 나는 광부생활 20년 하구 이 가겟방 하며 사는데 지금두 이런 때면 소름이 돋아요. 제일 싫다구.” 이 일화를 전하면서 유홍준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미학적 척도로 황재형의 작품을 평가했던 것을 말이다.

 

 

 

‘진실’을 향한 조용한 저항

 

“지난 11월 13일 청량리에서 태백 행 첫 기차에 올랐다. 황재형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설레기도 했지만 마음은 또한 무거웠다. 1980년 태백에 정착해 27년 동안 태백인으로 살고 있는 화가. 3년 간 광부로서 탄부 생활을 했던 화가. 제도권 교육 체제를 비판하며 14년 동안 장애인, 어린이, 교사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행하고 있는 화가. 우선은 평범치 않은 인생 역정의 황재형을 만나기에 내가 체험한 지식 경험의 폭이 협소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너무 뚜렷한 작가의 가치관에 일종의 거리감이 알게 모르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그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흥 역시 한몫했다.


황재형이 화단에서 주목받게 된 시점은 지난 1982년 제5회 중앙미술대전에서 <황지 330>이라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광부의 작업복을 극사실 기법으로 세세하게 묘사한 <황지 330>은 소재가 주는 특이함을 물론 보는 이를 압도할 만한 강렬한 시각적 화면이 충격적이었다. 그가 체험한 탄광촌에서의 삶이 이러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황재형은 1970년대 말 삼척의 탄광촌을 견학한 후, 탄부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서린 탄광촌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곤 광부가 겪는 처절한 현장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스스로가 광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그의 ‘태백에 살어리랏다’가 시작되었다.


황재형은 예술에 대한 이념과 행동의 일치점을 찾는다. 외롭지만 따뜻하게 삶을 살아가는 광부들을 통해 우리가 ‘쥐어야 할 참 흙의 인간애’와 우리가 ‘누워야 할 땅’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변함없이 ‘쥘 흙과 뉠 땅’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개최한다. 합판, 삽, 판자, 용접 마스크, 철망 등 캔버스를 벗어난 다양한 설치, 오브제 작품을 선보였던 지난 80년대와는 달리 이번 개인전에서는 회화 작품만을 전시한다.


감각적인 컨셉트는 물론 눈을 사로잡는 매끈한 세련미가 부재한 작품에서는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가 감돈다. 기실 주위에서 왕왕 볼 수 있는 심미적 풍경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때문에 작품에 대한 감정이입이 쉽지만은 않다. 특정한 지역의 삶의 풍경을 화면에 옮김으로써 작가가 진정 원하고 추구하는 예술관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4시간이 넘어 도착한 그의 화실에 들어서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황재형은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감동이라는 것은 화면의 진실이기도 하고 그림 자체의 내용성이기도 합니다. 진실이 교감이 될 때 예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시절, 나는 불편한 잠자리를 자는 이들에게 안락과 안식을 주는 그림을, 너무 편안하고 답답한 일상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경각심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했어요.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지고 가야할 예술이라고요.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곱고 예쁜 것이 아닌, 그림에서 진정성이 제대로 구현될 때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에서 추함이 드러나고, 화면에서 추한 터치와 터치가 교차할 지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태백에 들어가 탄광촌의 현실을 체험하고 광부들의 땀냄새를 추억하며 사는 그에게 예술이란 인간이라는 본질 그 자체란다. 풍경화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황재형은 자신이 그린 태백이라는 특정 공간이 현실의 객관적인 풍경만이 아닌, 모두의 주관적인 풍경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탄광촌을 막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서울이 막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탄광촌이 막장을 상징화하지만, 나는 특정 장소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인간으로 서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느낄 만한 소외와 공허함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인간이 소비되는 현실’에서 황재형은 ‘인간을 위한 사회’를 부르짖는다. 그리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우리네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야 함을 피력한다. 이미 세속적 삶에 충분히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나는 사실 그의 말에 크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고 고백한다. 어찌됐건 그는 여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이것이 단순하게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함을 굽히지 않는다. 때문에 황재형은 태백의 노동자층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다. 또한 아이들 개개별의 특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실시되는 현 교육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프로그램에도 열심이다. 착한 눈빛과 강건해 보이는 풍채를 휘감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묵직하게 퍼져 울렸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

 

 

 

현장의 그림, 리얼리티의 획득

 

십년 하고도 6년 만의 개인전이다. 그 세월 때문일까 황재형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의 그림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할 이들이 많다. 그는 차분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작품에 대한 자신이 없어 개인전을 고사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진달래색 치마를 곱게 입은 부인은 이번 개인전을 여는 데 자신의 역할이 컸다며 활짝 웃었다.


전라도 광주, 부부는 백제미술연구소라는 곳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만났다. 서로를 “여보”라고 부르며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들이야말로 최고의 인생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서울에서의 안락했을 삶을 버렸을까. 그러나 현재 부부의 삶은 분명 20여 년 전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태백은 제2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기에 나는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인지 그의 최근 작품은 이전과 다른 조형적인 유연함이 묻어난다.


“관객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볼지 염려되지는 않습니다. 전시는 나의 과정, 내 삶의 궤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을 보길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실존을 보일 뿐이죠.” 전시를 앞둔 작가들에게서 으레 발견되는 초조함이나 묘한 두려움을 끄집어내고 싶었는데, 황재형은 대답은 이처럼 단호했다.


그럴 듯함. 작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는 이 단어에 내재된 위험성을 여러 번 느꼈다. 그것이 몰고 오는 편견, 선입견을 말이다. 황재형이 태백에 들어가자마자 많은 매체는 그를 ‘광부 화가’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연신 광부, 태백, 황지, 막장이라는 특정 단어를 되풀이하며 그를 평가하고 주목했다. 이것이 이슈가 될 수는 있지만, 본업이 화가인 그에게 광부라는 감투 아닌 감투는 결코 득만이 아니다.


작가 역시 “내가 화가인데, 내가 광부가 된다고 진정으로 광부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그들과 함께할 뿐이지 나는 광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광부, 태백의 산천과 같은 소재주의적 논의에서 벗어나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절감한다. 그리고 태백에서의 황재형의 삶은 그럴 듯함(seeing)이 아닌 그러함(being)이라는 것 역시. 그는 행동하는 리얼리스트이고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서 관망하는 이가 아닌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자라는 사실도 말이다.

 
예술에서 진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황재형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미학적인 허세로 꾸미거나 관습적으로 대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했던 샹플뢰리(Champfleury)의 이론은 물론 진실되고 정직한 표현법만이 살아 있는 그림을 완성한다던 쿠르베의 신념, 그리고 “미술은 허망한 기분풀이가 아닌 사회의 오점을 드러냄으로써 사회 개선에 봉사하고 빈곤, 위선 등의 사회적 부도덕을 노출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이상에 기여한다”고 단언했던 사회학자 프루동(Proudhon)의 철학이 떠올랐다.


한편, 미술사학자 정영목은 왜곡의 형식적/표현적 상징성을 기대하는 여타 민중미술 작가들과 달리 황재형은 정통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연의 민중미술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사고가 가미됐으되 그의 시선은 사회비판적인 태도를 넘어 치유의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직시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술의 진실함을 이야기하는 화가가 내 앞에 있었다.

 


어린이, 그 희망을 위한 교육


태백 신(新)주택 단지에 위치한 작가의 화실은 그리 특별나지 않은 평범한 주택의 외형을 띠고 있다. 낮은 높이의 하얀 색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황재형의 작업실이 오른쪽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사들이 연수할 수 있는 ‘태백미술연구소’라는 공간이 나온다. 사진 촬영을 진행하면서 나는 이곳을 오고가는 해맑은 미소의 어린이들을 여럿 만났다. 고사리 손들은 하나같이 미술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과 환경이 궁금해 한창 수업 중인 미술연구소의 문을 조심히 열었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채화를 그리는 중이었다. 석고상이며 아이들이 완성한 그림들이 벽을 가득 메운 교실 안 풍경은 여타 화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연 이 공간에서 황재형은 어떤 수업 지도안으로 아이들을 육성하고, 교사들은 어떠한 교육 방침을 토대로 지도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신문에 난 광고며 입소문으로 이곳을 찾은 선생님은 전국 단위로 포진되어 있다. 10년이 넘은 이 교사 연수 프로그램은 여름/겨울 방학 중심이며 참여 선생님 수는 약 40여 명에 이른다. 그리 큰 인원은 아니지만, 기존의 연수 체제에 익숙했던 교사들은 황재형식 프로그램을 한마디로 “충격적”이라며 입을 모았다. 또한 아예 태백 초등학교로 전근을 와 낮에는 초등학교에서 수업하고 저녁에는 이 곳 연구소로 모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선생님들까지 있었다. 늦은 저녁 시간, 나는 그들을 만나 간접적으로나마 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태백 하면 내가 가장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어요. 그저 잠깐 지나가는 곳이기를 바랬죠.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나는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너무 싫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광부이셨어요. 사택에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황재형 선생님 그림은 내가 눈을 감아버렸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내가 무시하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태백의 모습 말이죠. 그리고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내 속에 이 풍경들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는 것을요.”


태백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여상에 갔고, 그리도 그리던 서울 생활도 경험해 봤던 여교사. 그녀는 스스로가 그토록 부정했던 현실이 결국은 자기 긍정으로 변모하는 데에 황재형의 그림이 있었다고 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지난 일이 생각났는지 선생님의 눈가는 연신 촉촉했다. 그리고 서울 생활을 접고 태백으로 돌아와 오래지 않아 황재형을 무작정 찾아가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이야기며, 3개월 만에 전형적인 입시 교육 없이 황재형의 지도만을 믿고 대학 입시를 치렀던 일화를 전했다. 그녀에게는 당시 황재형이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선생과 제자 사이의 굳건한 믿음만이 아닌, 여기에는 기존의 정형적인 미술 교육을 넘어선 특별난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었다.


“교육에 대한 상식화된 틀을 깰 수 있었어요.” “아이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었죠.” “그동안 내가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육이 그들의 영혼을 짓밟았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 옆에서 선생님들은 저마다 피부로 느꼈던 감회를 풀어냈다.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수식어들이 오고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대답이 대다수였기에 나는 묻고 또 물었다. 구체적인 학습법은 물론 그것이 낳는 성공적인 피드백을 말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선생님도 미술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때문에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경험하지 못한 교사들은 유형화된 지도안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저 반듯하고 깨끗하게 점,선,면을 그리면 그만이고, 샘플과 똑같이 예쁘게 결과물이 나오면 칭찬하기 십상이다. 자리에 함께 한 선생님들은 하나둘 앞 다투어 말했다. 아이들이 긋는 선이 그리고 만들어낸 면이 그들의 상상력과 감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때문에 바른 교육의 키워드란 바로 아이들의 감성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어 주는 것이라고. 여기에는 선생님의 대학 전공도 그림 실력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간단한 해법인 듯하지만 기존 교육 시스템으로는 아이들의 변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들은 주저 없이 말했다. 무엇보다 교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설령 마음 속 풍경일지라도

 

나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3시간 만에 선생님들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어린 시절의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이 아이들의 의사 표현 및 사고 확장, 문장력 향상 등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 즉 그림 교육이 특정 과목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총체적 교육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황재형이 사랑하는 태백,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예술혼과 희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진실한 것인지를.

 
화실을 떠나기 전 나는 그의 작품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좀더 차분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처음과는 달랐다. 깊게 패인 주름살과 빨갛게 충혈된 눈의 <광부 초상>은 더 이상 이름 모를 광부의 모습만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광부 초상>을 보고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던 막내 여선생님이 생각나서 나 역시 기분이 이상해졌고, 눈보라가 일어나는 황량한 거리를 담은 작품들은 전혀 익숙치 않은 낯선 공간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애써 만든 편견과 미학적 잣대가 황재형의 작품을 읽는 데 그리 보탬이 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고 할까. 우리의 마음 속 풍경이 황재형의 그림 안에 있었다. 비록 작가는 현실을 직시한 직접적인 소통을 꾀했겠지만, 이는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가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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