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깊은 그림

막장에서 캔 ‘외로운 진실’…태백 탄광촌 화가 황재형 개인전

참된 2008. 11. 15. 04:10

                                    

           

 

 

 

막장에서 캔 ‘외로운 진실’…태백 탄광촌 화가 황재형 개인전

태백|글 임영주·사진 이상훈기자 minerva@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7년 12월 04일 17:36:32

 

 
“사택촌에 불이 꺼지고 비까지 뿌리자 사위가 깊은 어둠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 너머 탄광촌으로 가는 통근차를 기다리는 광부들이 우산을 펴들기가 귀찮은지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 서서 비를 피하는 모습이 가끔 서치라이트에 부상되었다가 없어졌다.”(황재형, 샘터 1985년 8월호) 통근차를 기다리는 광부 중에는 “달큰한 젖 냄새를 풍기던” 젊은 곽씨도 있었다. 한 방에서 온 식구가 자는 어려운 광부 살림이었기에 집에 갓난 아이가 있으면 남자에게서도 젖 냄새가 났다. 새벽에 아이를 떼어 놓고 나와서는 비 맞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화가 황재형씨(55)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꿈틀거리는 광부의 모습, 쓸쓸한 탄광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온 황씨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16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황재형-쥘 흙과 뉠 땅’ 전(4일~내년 1월6일)이다. 80년대 대표적인 민중미술가였던 그는 83년 가족과 함께 강원도 태백의 황지로 갔다. 한국 산업사회의 동력으로 기능하던 과거 탄광촌 마을 태백의 모습부터, 탄광이 대부분 문을 닫고, 사람이 떠나고,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선 지금까지의 모습을 24년째 지역 사람으로서 담아오고 있다.

“젊었을 때 구로공단에서 야학도 하고, 마산·창원 공단서 일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막장으로 선택하는 곳이 탄광인 것을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1차산업의 근원지기도 하고요. 내가 원하는 강렬한 인간 내음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한국은 아직도 제3세계입니다. 그 속의 또 하나의 제3세계가 탄광이에요. 탄광은 역사의 유배지, 산업사회의 유배지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인간의 애환이 숨김없이 질박하게 드러납니다.”

‘광부초상’ (2002)
작가를 잡아끈 태백이었지만 그 속에서 겪은 세월은 인간 내음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리얼리스트로서의 의지와, 현실의 갈등이 마음 아프게 부딪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처음 태백을 찾았을 때는 300만원을 옷 속에 넣어 꿰매고 광업사 폐건물을 전전하며 잠을 잤다. 화가의 아내는 자글자글 주름진 광부의 시커먼 목덜미를 보고, 참아지지 않는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화가의 이런 열병을 이해했다. 서울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멋있게 예술을 할 줄 알았는데 노동자들은 빵을 원했어요. ‘네가 예술지상주의자냐’며 덤비는 사람과 주먹다짐도 했죠.” 광부로도 일했던 작가가 탄진이 날리는 갱도에서 서로 안전등을 비추며 다른 광부들과 같이 먹었던 점심은 결국 작가를 이곳에 주저앉게 했다.

‘식사’ (1985)
현실에 발을 담근 자로서 치열한 갈등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그의 그림은 탄광촌을 담고 있되, 그것을 넘어서는 울림을 준다. 월급날의 탄광촌, 월급봉투를 받기 위해 몰려든 노동자들의 뒷모습,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언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 태백역에서 서울행 1시5분 기차를 기다리는 젊은 가족, 무심해 보이는 남편의 등 앞에 작은 어깨를 그나마 더 움츠리고 앉은, 젊다 못해 어린 아내, 그리고 떼쓰는 아이. 검게 흐르는 탄광촌의 시냇물 위에 아름다운 색을 떨어뜨리는 노을. 쓸쓸하고 슬프고 아름답기도 한 장면이다. “내가 소재로 하는 탄광은 단순히 광부의 삶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정신을 상징해요. 여성의 현실도 막장이고, 자본의 구조도 막장입니다. 노동자의 외로움, 여성의 외로움, 막장 같은 힘듦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걸 거예요.” 예술은 지게꾼이 봐도, 교수가 봐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이를 위해 “감각적으로 색을 잘 쓰는” 화가로서의 재능도 애써 누르고 있다. “이걸 눌러야 진정성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내놓지 않고 16년간 고민을 거듭하며 실험해온 그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느낌의 회화작품 60여점을 통해 이번에 공개된다. “리얼리스트로서 진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작가의 말대로다. 석탄, 흙, 돌가루 등을 사용해 두툼한 질감을 넣은 작품도 있고 유화의 광을 매끈하게 살려 그린 작품도 있다.

“내가 필요한 곳에 있어야죠. 서울에 잘 안 가는 이유예요. 나도 사람인데 예전 거리, 향수 냄새 나는 사람들 보면 흔들리죠. 브레히트는 시대가 진실을 가리고 있을 때 들춰 보여주는 자가 예술가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감해요. 다 자기가 잘났다고 예술한다면 가려지고 숨겨진 진실은 어떻게 할겁니까.” 작가는 계속 태백에 남아 진정한 미술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카지노가 들어선 탄광촌의 모습도 화폭에 담아낼 생각이다. 관람료 성인 3000원. (02)720-1020

〈태백|글 임영주·사진 이상훈기자 minerv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