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무크지 ‘미술과 생각’ 창간 주역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가 최근 미술 무크지(부정기간행물) ‘미술과 생각’을 엮어냈다. 그런데 성격이 독특하다. 창간글에서 “이 책은 민미협의 기관지도 아니고 미술잡지도 아니다”라고 했으며 “구어체 미술담론지”라고 스스로 정의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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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이전의 관념적인 한국 현대미술과 광주민중항쟁으로 상징되는 폭압적 정치상황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민중미술, 그리고 민중미술가들이 조직화된 단체인 민미협. 민미협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런 창간글 속에는 “이 땅에서 미술 혹은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부터 민족민중미술계가 갖고 있는 고민까지가 그대로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을 구상하고 현실화시킨 강요배 민미협 회장(56·사진)은 “이론을 갖고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 창작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사고와 이론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창간호는 주재환·황재형·김봉준 작가를 각각 집단 인터뷰한 ‘작가탐방’이 중심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로 뽑히는 작가들로 민중미술의 새로운 접근방식,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 문화종다원주의 등에 대해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평론가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 ‘작가가 말하는 작품, 작가가 인식한 사회’를 글이 아닌 생생한 말로 보여준 것이다.
강 회장은 “80년대 미술은 이념을 반영하고, 사회소통을 위한 미술을 지향했기 때문에 지식인적 성향이 있고 거기에 매몰됐다”면서 “정치적 예술로 몰리는 바람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우리한테 정말 맞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하나씩 쌓아가고 싶다”고 설명했다. 선정된 세 작가는 창작과 실천 면에서 성공한 이들. 창작의 결과를 놓고 말하고 그 다음에 이론을 만드는 역순의 길을 앞장서 보여줄 수 있는 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개념과잉시대의 미술에 대한 반성’ ‘20년 후 지금, 민족미술의 과제상황’ 등 평론을 작가탐방 뒤에 배치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강 회장은 “주재환 작가는 서구적인 근대성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틀기적 표현이 개성있고, 황재형 작가는 서양 전통화의 사실주의를 갖고 있으며, 김봉준 작가는 우리 전통 민화와 탱화 등을 접목시키는 등 각각 어법이 다르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각각 스타일이 다른 작가로, 민중미술이란 유파로 획일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민중미술’이란 정의가 때론 약으로, 때론 독으로 작용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이란 규정력을 견뎌내야 합니다. 견디지 못하고 규정을 받아내는 사람도 있고요. ‘그 말이 맞나?’하는 사람도 있죠. 자신감이 팽배하다고 할 순 없어요. 지금은 대안도 확실하지 않죠. 하지만 민미협 구성원의 저변에 깔린 생각은 ‘우린 쉽게 규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민중미술로 자꾸 규정하는 것은 ‘분류, 배제, 화석화’의 의도가 있어요. 우린 완성된 양식을 갖춘 집단이 아니라 연구하고 토론하는 예술조직이에요.”
이론보다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더욱 풍부한 가치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금은 의식이 주인 노릇을 하지만 목적의식 없이, 자연스러운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이것이 민족미술이죠.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 민중입니다. 각자 능숙하게, 연쇄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상황이 유토피아예요. 경제는 최소한으로 하고, 무의식적인 부분을 풍부하게 쓰며 따스하게 사는 것이 중심이 될 때 그제서야 우리가 이론가를 물리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 회장은 작가로서 지금의 문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17년 전 서울을 떠나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갔다. “50년 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진보가 아주 나쁜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계점에 도달한 듯해요. 미국 금융시스템 위기도 성장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예술인은 직감적으로 알죠. 제주도에서 보면 지금 사회는 지속 가능한 문명인지 의문이 들어요. 문명에 중독되면 모릅니다.” 시각적 이미지로 의사소통한 촛불집회에서 미술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는 그는 “거대 담론 내버리고 미시적으로 미꾸라지처럼 살면 무슨 소용이냐”며 ‘미술과 생각’을 통해 펼쳐나갈 일에 대한 의지를 비쳤다.
<글 임영주·사진 박재찬기자 minerv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