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사는 것 잠시 멈추고 광주에서 `공동체’ 꽃피울 것”
호탕한 말솜씨로 좌중을 사로잡는 배우 지정남 씨가 무대 밖으로 나와 노란리본을 달고 종횡무진 중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의 주 활동무대는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시민상주 모임’.
감독도, 대본도 없는 무대에서 ‘진심’ 하나만 믿고 가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드니 판을 벌일 밖에. 그녀는 ‘세월호 희생자
추모제’에서는 사회자가 됐다가 길 한복판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도 벌였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세월호의 진실을 일깨워주는
‘일인다역’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결심공판이 열린 27일 그를 만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으로 향했다. 구형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 법원 앞
한 카페에서 만난 지 씨는 초조한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 몇 달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한 마음으로 “무책임한 어른에 대한 무거운
단죄”를 외쳐왔고, 이날 그 결과가 확인되는 것이다.
그의 삶에는 이미 여러 번의 ‘외침’이 있었다. 놀이패 ‘신명’ 단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농민들이 벌이는 집회나 행사에서 마당극
공연을 하고, ‘도가니’ 사건으로 알려진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 때는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며 싸워왔다.
다음은 지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민상주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세월호 관련 큰 행사뿐 아니라 도시락을 싸고, 후원금을 모으는 일 등 ‘지정남’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드물 정도. 이렇게 발 벗고 나선 이유가 있나?
△잘못된 것을 아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안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줬지 않나?
대한민국은 국민과 별개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 스스로 안전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서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한 아이의
엄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이를 지켜주지 않는 나라다. 함께 싸워야 한다.
-그 싸움에 많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특히 광주는 일찍이 ‘시민상주모임’을 꾸리고, 4개월이 넘게 활동하면서 지역 사회 곳곳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창립회원으로서 ‘시민상주모임’을 평가한다면?
△작은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절망하고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놓는 모습을 본다. 매주 재판을 보러 오는 유가족들에게 손을 흔드는 일, 유가족들에게 힘이 되는 편지를
쓰는 일, 매주 마을촛불을 드는 일들은 돈 만으로는 할 수 없다. 자발적인 시민 한 명 한 명이 모여 자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취재를 다니면서 만난 시민상주들은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즐길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시민상주모임은 3년을 바라보고 가고 있다. 가고자하는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각자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존재이유가 흔들릴
것이다. 선도 자세히 보면 무수한 점으로 이뤄져 있다. 그 점들의 방향, ‘안전한 사회’라는 큰 방향을 향해 전진하고 있기
때문에 선이 쭉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는 것 같다. 나도
시민상주로 활동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됐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데, 개개인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사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기 직전까지 계획했던 일이 있었다. 배우로서 방송인으로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입지를 더
넓히고 싶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고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직 사회는 병들어있는데 혼자 살겠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시민상주로
활동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확고해졌다.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모이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앞으로 살아갈 삶의 기준, 인생의 방향도 달라졌겠다.
△그렇다. 지금까지는 내 삶을 위해 달려왔으니 이제 공동체를 고민하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싶다. 광주라면 가능할 것
같다. 인간의 몸만 유전되는 게 아니다. 생각도, 환경도 유전된다. 5·18민중항쟁을 치르면서 시민의 힘을 온 몸으로 경험한
광주다. 모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시민상주모임을 만들게 했다. 이제 시민상주모임을 잇는 다음 세대가 단 1cm라도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할 것이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월호 승무원 15명에 대한 결심 공판 결과, 이준석 선장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 살인 혐의가 적용된 항해사와 기관장 3명에겐 무기징역이 구형됐다는 소식이었다.
마음은 이미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 있는 지 씨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11월1일 진도 팽목항에서 열리는 ‘세월호 200일
팽목항 문화제’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인사를 나누자 마자 지 씨가 유가족들이 있는 법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 뜀박질을 보고 또 누군가는 그 뒤를 따라가리라.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