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거 아닌가, 잘못 들었나…내 귀를 의심”
등록 : 2014.09.18 20:33 수정 : 2014.09.19 09:02 한겨레
엄길정 현대자동차 울산1공장 대의원(왼쪽)과 박현제 전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머리를 맞대고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900여명 11년 만에 ‘정규직’ 판결
“미안하고 미안하다…” 전 지회장 주저앉아 울음 터트려
“결과가 좀더 빨리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안타까움도
“근로자 파견 관계는 원고들 전부에 대해 인정한다.”
18일 오후 1시50분께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정 동관 562호.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낸 수백명의 원고 명단 위에 재판장의 말을 받아적던 천의봉(33)씨의 손이 멈췄다. “미친 거 아닌가….” 46석 자리의 법정에 두 배 가까운 이들이 모여든 탓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던 4년차 해고자 황호기(42)씨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꽃처럼 피었다.
“다 이겼어”, “전승”, “전부 승소다.” 10분 만에 선고가 끝나자 법정을 빠져나온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천씨도 “재판부가 라인 구분없이 모두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잘못들었나 내 귀를 의심했다”며 좋아했다. 황씨는 “결과가 좀 더 빨리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일부 조합원은 “고생했어”, “끝났다”며 눈물을 훔쳤다.
법정으로 향하다 중간에 선고 결과를 전해 들은 황인화(37)씨는 법원 밖 단식 농성장으로 뛰어가 외쳤다. “야, 전부 이겼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2010년 분신한 황씨의 얼굴에는 지금도 화상의 흔적이 있다. 황씨의 화상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며 10년을 싸워온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는 2003년에 처음 생겼다. ‘불법파견 정규직화로 인간답게 살고싶다’던 사내하청 조합원들은 2004년 당시 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노동부는 불법파견을 인정했지만, 검찰은 불법파견 사용주를 처벌하도록 한 법률이 있는데도 2006년 무혐의 처분했다. 노동부와 검찰의 방관 속에 비정규직 지회는 2010년 25일 파업, 2013년 296일 철탑농성 등 싸움을 이어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에 하청업체는 114명을 해고하고, 원청인 현대차는 682명을 상대로 374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지기만 하던 싸움에 한 줄기 빛이 비췄다.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이를 계기로 조합원 수가 크게 늘었다. 이듬해 7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1900여명이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냈다. 3년의 기다림과 두 차례의 연기, 회사 쪽의 소송 취하 전략을 극복해 낸 이들은 18일 드디어 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다.
이진환(가운데)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 등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현대차와 사내하청업체들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10년 동안 투쟁하며 맞고, 구속되고, 해고된 동지들한테 미안하고, (천)의봉이랑 (최)병승이가 철탑 오른 것도 미안하고, 미안한 게 너무 많이 생각나서….” 이날로 ‘선고를 연기하지 말아달라’며 8일째 단식을 이어온 박현제 전 울산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끝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불법파견 박살내고 정규직 전환 쟁취하자.”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이 조합원들이 외치는 구호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