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예술

[j Story] ‘무당 설움, 무당으로 성공해 풀다’ …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

참된 2014. 1. 28. 18:37

[j Story] ‘무당 설움, 무당으로 성공해 풀다’ …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

[중앙일보] 입력 2011.06.25 01:30 / 수정 2011.06.27 10:26

“외국인들 대단하죠 … 내가 춤추면 머리 흔들고 막 춤춰요”

 

한국의 굿을 세계에 알린 ‘대한민국 대표 무당’ 김금화(80)씨. 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서해안 배연신굿, 대동굿) 보유자이기도 하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으로 미국에서 굿을 했다. 한국 무당의 첫 해외 공연이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지에서도 공연했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곡절도 많았다. 황해도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먹는 입 하나라도 줄이자’는 어른들 뜻에 따라 열넷에 시집을 갔다. 시집살이는 혹독했다. 3년 만에 친정으로 도망쳐왔다. 그 직후 신병에 걸려 ‘만신’(여자 무당)이 됐다. 무당이었던 외할머니에게서 굿을 배웠다. 그녀 나이 열일곱이었다. 주위 시선은 곱지 않았다.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인민군·국방군·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한때 가정도 꾸려봤지만, 남편은 ‘무당 마누라와 못 살겠다’며 떠나갔다. 무당의 설움은, 무당으로 성공하는 것 외에는 풀 길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정공법을 택했고, 성공했다. 그녀가 경험한 온갖 신산(辛酸)이 그 밑거름이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김금화씨가 인천 친수공원에서 풍어제 중 ‘대감놀이’ 를 하고 있다. 해학과 익살이 가득한 놀이라 웃음을 머금고 있다. [사진작가 이진환 제공]

대한민국 대표 무당

김금화씨는 서울 이문동 자택에서 분홍빛 고운 한복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그녀는 훤칠하고(키 1m67㎝), 자세가 매우 꼿꼿했다.

●연세에 비해 참 정정하십니다.

 “요새 가만 보니까, 남들은 나이를 3, 4년씩 줄이는데 난 그걸 못 줄였어요.”

●참 꼿꼿하신데요.

 “글쎄요. 굿하면서 춤을 많이 춰 그런가.”

●개인의 점도 보고 굿도 해주시나요.

 “그럼요. 어렵고 힘들고 마음 아픈 사람 끌어안는 게 무당인데요. 제가 나라굿을 하니까, 그런 걸 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개인 중에선 어떤 사람들이 주로 찾아오나요.

 “부부지간에 이혼하려는 사람, 며느리나 시어머니가 미워서 오는 사람, 참 다양해요. ‘참고 견뎌라. 친정어머니로 생각하고, 친딸로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말해줘요.”

●무당이 되려고 찾아오는 여성들도 있겠죠.

 “ 간혹 보면 신 내릴 사람이 전혀 아닌데 무속인한테 ‘신 받아야 한다’는 말을 잘못 듣고서 오는 사람도 있어요. ‘절이나 교회 다니며 기도하고 살아라’ 하고 돌려보내죠.”

●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군요.

 “그렇죠. ‘마음의 문을 열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도 잘 안 될 때는 욕심을 버려라’ 하고 말해 주죠. 그래도 힘들게 느껴지면 ‘정말 어려운 고비가 지나면 바로 좋은 일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야 해요. 가장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것은 ‘머잖아 좋은 일이 온다’는 증거거든요.”

 그것은 그녀 스스로 인생에서 체득한 진리 같았다. 두 번째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은 직후 김금화는 ‘무당생활을 접어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상을 받고, 매스컴을 탔다. 이후 김금화는 굿판이 아닌 정식 무대에서 작두를 타게 됐다. 국내외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김금화’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80년대 이후 그녀는 국내외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굿 아닌 공연을 하게 됐다.

200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벌인 김금 화씨 굿 공연 포스터.
●로마에서도 공연하신 적이 있죠.

 “공교롭게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하시고 그 달에 로마대학 앞에서 굿을 했죠. ‘선종하신 교황님, 좋은 데로 가시라’고 기도해 드렸어요. 거기 교수님들에게 포도주를 따라 드리니까, 교수님들이 술을 손으로 찍어서 사방에 뿌리고 그래요. 저도 같이 손으로 찍어 뿌리고 포도주 나눠 마시고 했죠.”

●외국인들이 선생님 굿을 좋아하나 봅니다.

 “유럽 사람들이 특히 대단해요. 내가 춤을 추면 관객들도 다들 머리 흔들고 막 춤을 춰요. 그렇게 정신없이 좋아할 수가 없어요. 끝나도 안 가는 사람이 많아요. 자기 남편이 사흘 전에 죽었다는 여자도 춤추고 갔어요. 한국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웃음)

●해외 공연을 하신 뒤로 국내에서 무속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죠.

 “많이 달라졌죠. 그래서 저도 공연할 때마다 ‘하나님 믿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고, 불교를 믿는 분은 부처님의 자비가 있으실 것이다’ 해요. 그러다 ‘우리가 하나로 마음을 모아 남북 통일 기원해 ‘만세를 부르자’고 해요. 그러면 개중에 교인들도 있을 텐데 다같이 ‘만세’ 부르죠.”

●외국인 중에서도 굿 해달라고 선생님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작년 정월에 하와이와 유럽 사람 여섯 명이 찾아와서 굿을 하고 갔어요. 제 신딸 중에 ‘안드레아’라고 있어요. 걔가 데리고 왔죠. 그 사람들이 여기 와서 굿하느라 과일도 사고, 돼지도 사는데 그게 다 외국 달러로 사는 것 아닙니까.”(웃음)

 김금화씨에겐 독일인 ‘안드레아’처럼 독특한 신딸이 여러 명 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갔다 신병이 생겨 그녀에게 내림굿을 받고 신딸이 된 한국인 여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여성은 신딸이 된 이후에 ‘한국 무속의 세계화’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다.

●신딸은 몇 명이나 되나요.

 “저에게 내림굿 받은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열심히 배우겠다’고 해놓고선 제대로 전수를 안 받고서 ‘김금화 신딸’이라고 간판만 걸어놓고 무당 하는 애들도 있고요. 그런 애들은 좋은 무당이 될 수 없죠. 진짜 열심히 하는 신딸은 40명쯤 돼요.”

●어떻게 하면 좋은 무당이 되 나요.

 “글쎄요. 김금화도 좋은 무당이 못 됐는데, 어디 말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 좋은 무당은 굿에서나 점에서나 늘 기도 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만신들이야, 기도 드려 남을 도와줄 수밖에 없잖아요.”

●보통 때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김금화가 건강해서 서해안 풍어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해주십사, 일본의 쓰나미(지진해일) 같은 재난이 안 일어나게 해주십사, 우리 신딸들 다 앞길 잘 풀리게 해주십사, 제가 풍어제 드리는 안면도 황도마을, 김포 대명포구, 인천 소래포구, 인천 연안어시장 모두 잘되게 해주십사 이런 기도를 하죠.”

●풍어제 전통이 유지되려면 결국 어촌이 잘돼야 하겠군요.

 “그럼요. 제가 안면도 황도는 30년 가까이 풍어제를 드리고 있어요. 이런 마을들이 편안해야 내가 편안할 수 있거든요. 제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공짜 희생이 없고 공짜 고생이 없어요. 다 그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지요. 그러니 정성을 들일 수밖에요.”

신산했던 인생 1막

김금화씨는 이름이 둘이다. 지금은 금화(錦花)지만, 본명은 ‘넘세’다. 황해도 연백군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넘세’에게 인생은 힘겨웠다. 일제 말기, 6·25 전쟁, 그리고 휴전 이후 시기를 겪은 이들에게 다 그랬듯이. 그런 그녀가 서른여섯 살 때인 1967년 ‘인생 2막’이 열렸다.

●‘넘세’란 본명이 특이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언니 낳고 저를 낳았어요. 집안에서 아들을 원했죠. 그래서 남자로 태어날 동생이 ‘넘석한다’(어깨너머로 들여다본다는 뜻)고 저를 ‘넘세’라 이름 지었대요. 제가 열세 살이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큰댁에서 ‘촌스럽게 이름이 넘세가 뭐냐’며 ‘금화’라고 새 이름을 지어줬어요. ‘넘세’라는 이름 덕에 제 밑으로 남동생이 생기긴 했어요. 걔가 일곱 살 때 죽긴 했지만.”

●열넷에 시집가셨죠.

 “ 식구 하나라도 입을 덜자고 일찍 시집 보낸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기운이 없었어요. 그래서 물동이를 이고선 여기저기 찔끔찔끔 쏟곤 했죠. 그러면 시어머니가 다짜고짜 빗자루로, 홍두깨로 저를 두들겨 패셨어요. 지금도 눈가에 맞은 자국이 남아 있어요. 시어머니가 좀 다혈질이셨어요. ‘저걸 죽여버려야 된다’ 이런 말을 여러 번 하셨어요. 동네에서 실제로 며느리를 때려 죽인 집도 있었죠. 그래서 시댁 어른들 눈치를 보다 뒷간에서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친정으로 도망을 왔죠. 안 그러면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외할머니에 이어 무당이 됐는데 집안에서 어떤 반응이었나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무슨 팔자가 사나워 딸까지 이러느냐’고 울고불고하셨죠. 외할머니도 ‘네가 뭘 안다고 건방지게 무당을 한다고 하느냐’ 야단치시고요.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죠. 하지만 결국 받아들이셨죠.”

●외할머니께 굿을 배웠겠군요.

 “할머니 하는 걸 옆에서 조금씩 보고 따라 배웠죠. 그리고 열아홉 살부턴 저 혼자 대동굿을 했어요. 그게 5박6일 동안 하는 큰 굿이에요. 그때는 젊은 남정네들이 ‘새 만신 손 좀 한번 만져보자’고 장난도 치고 그랬죠. 그럼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놈들. 괘씸하다. 저리 비켜 서라’ 했어요.”(웃음)

●당시엔 만신이 흔했나요.

 “몇 없었어요. 그때는 만신 보려면 사람들이 60리 길(약 24㎞) 걸어오곤 했죠. 일본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탄압해서 많이 없어졌으니까요.”

●6·25 전쟁 통엔 고생 안 하셨나요.

 “말도 못하게 많이 했죠. 피란을 못 가고 있었는데, 인민군이랑 빨치산이 와서는 ‘미신 행위 하는 사람들 나오라’고 난리였죠. 제 친구가 ‘피해 안 보려면 무슨 여성 부반장 같은 것을 하라’ 했어요. 그 친구가 위원장 하고, 또 다른 친구가 반장을 했어요. 나중에 인민군 물러가고, 서북청년이라고도 하고, ‘청방’이라고 하는 우익 청년들이 몰려왔죠. 저더러 ‘빨갱이 노릇했다’고 수시로 불러서 조사를 했어요. 그러다 국방군이 들어왔는데, 군인 한 명이 날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러곤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고 물어요. ‘난 무당일 뿐이다. 너무 억울하다’ 했더니 ‘뒤로 돌아서라’ 그래요.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데, 산 밑에서 다른 군인이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 할머니가 우리 단골이었어요. ‘죄 없는 사람을 왜 죽이느냐’고 말을 해줘서 겨우 살아났죠.”

●월남한 뒤에는 사정이 어땠나요.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피란을 나왔어요. 그런데 한참 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돼서, ‘미신 타파한다’고 굿을 못하게 했죠. 굿하다 파출소 끌려가선 ‘굿 안 하겠다’ 각서 쓰고 나오곤 했죠. 아휴, 오만 고생 많았어요.”

20대 때 찍은 기념사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다.
●스물다섯에 두 번째 결혼을 하셨죠.

 “제가 별 얘기를 다 하게 되네요. 누구 소개로 남자를 만났는데, 너무 불쌍해서 먹을 것 주고, 돈 주고 그렇게 도와줬어요. 그 사람이 자꾸 ‘결혼하자’고 해서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할 수 없이 결혼을 했어요. 내가 취직시켜 주고, 나중엔 토목공사 사업한다고 돈도 대주고 했죠. 제가 굿으로 번 돈을 그 사람이 다 털어먹었어요. 그러면서도 ‘무당이랑 못 살겠다’고 자꾸 ‘이혼을 하자’고 해서 서른여섯엔가 헤어지고, 빈손으로 쫓겨났죠.”

●67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는 어떻게 나가셨어요.

 “이혼하고선 빈손이 돼서 서울로 사글세를 얻어 나왔어요. ‘내가 무당이면 도둑질을 하냐, 사기를 치냐. 우리 할머니·할아버지가 하시던 순수한 우리 것인데, 내가 왜 이렇게 버림받고 짓밟혀야 되나’ 싶었어요. ‘그래, 내가 무당으로서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고향 선배이고, 봉산탈춤 하던 양소운 언니가 ‘이런 대회 하는데 같이 나가보자. 야, 바닷가에서 하던 소리 같은 거 뭐 없네?’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회에 나가 굿이랑 소리랑 섞어 공연을 했죠. 거기서 개인상을 받고서 제가 하는 서해안 배연신굿이랑 대동굿이 알려진 거예요.”

●인생 2막이 열린 거네요.

 “네. 차츰 자신감을 얻었죠. ‘무당도 무대에 올라 춤추고 소리할 수 있구나. 무당도 TV 방송에 나갈 수 있구나’ 싶었죠. ‘내가 무당으로서 긍지를 갖고, 옛날 어른들이 하던 것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인정을 받아야겠다’ 하는 사명감이 생겼어요. 인터뷰할 때마다 울었죠. 참 감사하기도 하고 서럽던 기억도 떠오르고···.”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공연도 곡절이 있었다면서요.

 “에밀레박물관장 하신 조자용 선생이 ‘해보자’ 하셨어요. 그래서 미국에 갔는데, 우리 영사관 사람들이 우리 옷차림을 보곤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느냐. 무슨 굿이냐. 당장 데리고 나가라’ 하며 무대엘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다른 공연 다 끝나고 카펫을 걷고 관객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는데, 조자용 선생이 우리를 떠밀어서 무대엘 올라갔어요. 죽기살기로 한두 거리 굿을 하고, 작두를 탔어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 무속문화를 제대로 선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해야 한다’는 일편단심뿐이었어요. 그랬더니 박수가 막 터지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공연 끝나고 조자용 선생이 ‘공연 끝났으니 이 사람들 데리고 한국 돌아가겠다’ 하니까 영사관 사람들이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하면서 붙들고 늘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2회 공연까지 해서 미국에서 26일 동안 공연했어요. 그렇게 해서 유명해졌죠.”

●다른 사람들 맺힌 한을 굿해서 풀어주고 계신데, 선생님 마음에 맺힌 것은 누가 풀어줍니까.

 “제가 스스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풀어야죠 뭐. 그리고 우리 제자들이 또 잘 풀어줘요. 자기들이 저랑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 그 아이들이 갈 길은 그래도 저보다는 수월했으면 좋겠어요.”

j 칵테일 >> “DJ 진혼제 내 돈 들여 했죠”

자기 미래를 가장 궁금해 할 만한 이들이 정치인이다. 사람들은 ‘정치인과 무속인 간의 교류’에 대해 궁금해 한다. j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 중에 선생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많죠.

“말이 돌까봐 그런지 많이 오진 않아요.”

●역대 대통령 중에서 선거 앞두고 찾아온 분은 없었나요.

 “사람을 시켜서 제게 물어본 분이 두 분 정도 있었죠.”

 김금화씨는 정치인들에 대해 말을 아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만 빼놓고.

 “1993년인가, 제가 호암아트홀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거기엘 오셨더라고요.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죠. 그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는 분이었어요. 복떡을 드리면서 ‘힘 내고 용기를 가지시라. 앞으로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죠.”

 이후 두 사람은 청와대에서 재회했다. “무형문화재들을 다 초청하셔서, 같이 가서 사진 찍고 그랬었어요.”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뜨자 김금화씨는 인천에서 진혼제를 지냈다.

 “그 진혼제는 제가 자비로 해줬어요. 민주당 사람들은 와서 절만 했지.”

 
 이듬해 6·2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했다. 절을 했던 사람들은 “그때 진혼제를 잘해준 덕”이라고 고마워했다.

 “그래서 내가 ‘굿 값 안 줘?’ 하고 물었 더니 그냥 웃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