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서경식_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 그리고 예술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서경식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그가 지금까지도 어떤 열정을 가지고 고집해온 주제이며,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지독한 대화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2세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아이덴티티’를 내면의 고통이 아닌 세계의 통증으로부터 구원해낸다. 서경식은 (누구나 시대를 살아내지만 그 시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고 기이하게 어긋날 수밖에 없는) 그 삶에 몸을 내맡겼던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내고,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사라진, 배제된, 억압된’ 삶을 역사를 가로지르며 마주한다.
서경식이 우리 근대사가 낳은 ‘디아스포라’였던 것처럼 세상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디아스포라가 된 사람들이 많다. 즉 이산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내몰리고 쫓긴 삶(들)이요, 그의 말마따나 “캠프에 사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법 외부로 쫓겨난 자들”이다. 그는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들의 삶을 그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과거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려 했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현재도 맞서고 있는 많은 사람과의 만남(대화)으로 일구어낸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을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국가주의’와 ‘국민국가’를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채널을 활발하게 통해 글을 기고하고 있고 시급한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강연과 대담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시대적, 사회․정치적 맥락으로 탁월하게 읽어낸 글을 많이 썼다. 글쟁이인 그가 “언어적 사유와 표현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관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 미술의 바로 그 매력은 역으로 그의 글과 만나 풍성해진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디아스포라 기행』등의 책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역사)와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증언하는 인물을 연구한 책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최근 그는 아트 스페이스 풀(7월 5일)에서 ‘디아스포라와 예술’을 주제로 강연했고, 대구미술관(6월 29일) ‘이쾌대 탄생 100주년 학술대회’에서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계간 《황해문화》에서 ‘우리/미술 순례’를 통해 조선 민족 미술가와의 인터뷰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아티클》과의 인터뷰에서 서경식의 지난 작업과 사유에 도달하기에는 더없이 부족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성심껏 응해주었고, 연구자 최재혁의 번역을 통해 마름질 될 수 있었다.
article(이하 a) : 디아스포라적 주체에 대해 선생께서는 “난민이란 난민 캠프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며, 근대 국민국가의 약속, 즉 인권이나 생존권이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국민국가의 법 외부로 쫓겨난 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미 수많은 책을 통해 서술하기도 했지만, 디아스포라적 주체에 관해 예를 들어 설명해 달라.
서경식(이하 서).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이 가장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병합’과 식민지 지배(1910년 이후)의 결과, 모든 조선인(당시의 대한제국 신민)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당시 대일본제국은 군주제의 다민족국가였고 ‘일본국민’ 중에서도 ‘야마토 민족(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계급(hierarchy)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즉, 조선인은 같은 일본국민이지만 제도적 차별을 받는 이등국민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을 겪으면서 차별적 다민족제국에서 평등한 다민족국가로 이행하지 않고, 자민족중심의 단일민족국가로 경로를 수정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끌고 왔던 식민지 출신자(조선인과 대만인)의 일본 국적을 부정했으며, 국내에 남은 조선인을 한시라도 빨리, 한 명이라도 많이 추방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그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일본에서 발휘할지도 모를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것이었고, 대부분 가난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국가의 재정부담을 덜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당시 조선반도는 분단과 내전 상태였기 때문에 양국 간 협정으로 재일조선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은 불가능했다(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교는 1965년까지 체결되지 못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국교는 지금도 맺어지지 않았다). 조선인의 일본국적은 법적으로는 1952년까지 유효했지만, 1947년 일본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을 발표하여 구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생활 근거지를 일본에 둔 조선인이라도 고향 방문 같은 사정으로 일본 국내를 떠나면(일본국적 보유자임에도) 재입국이 불가능했다. 이는 지리적 추방의 한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59년부터 ‘귀국운동’이 시작되어 총 9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이는 국교가 없었던 일본과 북한의 양 적십자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협정을 맺어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재일조선인을 ‘성가신 존재’로 여겨 의도적으로 적십자사를 부추겼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역시 ‘인도적’을 간판으로 내건 사실상의 추방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인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했지만, 지리적인 추방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국내에 머물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채, 무국적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래서 일본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누릴 수 없었다. 이는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난민화’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컨대 재일조선인의 ‘국민연금’ 가입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UN 난민조약’을 비준하고 국내법을 조정한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예만 보더라도 재일조선인이 난민이라는 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전세계에 편재해 있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를 실행했던 제국주의 국가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때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을 자의적으로 ‘국민’의 틀 속에 넣었다 밀어냈다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이런 문제를 전세계적인 반식민주의 투쟁의 과제로서 지속해서 인식함으로써 ‘국적의 유무=국민인가 아닌가?’로 인간의 차별을 당연시하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 전지국적 자본주의의 확산은 이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에게 다른 영토에서의 삶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한국도 1990년대 이후부터 다양한 이주자들이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자에 대한 국가(국민)적 법/제도(인식)는 억압적이고 배제되어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서. 한국의 사정에 밝지 않지만, 중국 조선족 동포와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상적 차별, 그리고 결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 같은 가슴 아픈 사례를 종종 접한다. 다문화가정의 경우, 앞으로 성장할 2세, 3세가 한국 사회에서 겪게 될 고통과 소외도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상황은 바로 그들보다 한 두 세대 앞서 재일조선인이 경험해 왔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우리 조선인은 기왕 식민 지배라는 고통을 받아왔기에 그 경험을 살리는 편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건 “두 번 다시는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라거나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식민지 지배와 차별의 경험자로서, 지배받는 자, 차별받는 자의 아픔에 공감대를 가져야 마땅하며, 그것이야말로 구식민지 종주국의 국민에게는 없는, 우리 조선인이 가진 귀중한 재산임이 틀림없다”라는 뜻이다. ‘우리’란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애매한 말이지만 노동 현장에서 혹사당하는 이주노동자를 볼 때, 혹은 서투른 말투로 필사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결혼 이주자를 만났을 때, 문화도 종교도 외모도 다른 그/그녀들을 ‘우리다!’라고 느낀다. 그 모습은 나의 부모처럼 재일조선인 1세의 모습 바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a.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디아스포라는 배제되고 억압된 삶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는 ‘국가주의’의 폭력을 성찰하고 ‘국민국가’의 너머를 상상하도록 하는 존재일 수 있다.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난민의 시대를 거쳐서 모든 사람이 국가에 속하지 않고, 즉 국민이 되지 않고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인간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서.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국민국가’는, 고작 200년 정도의 역사밖에 가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로서 사회주의가 있었지만,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시장경제주의로의 전환 사태를 거치며 ‘국가’를 넘어서는 제도를 구상하기가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 위한 시련을 경험하고 있다. 그 시련은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가혹하며 때로는(9.11이나 이라크 전쟁처럼) 피투성이의 투쟁을 동반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시련과 고통을 줄여나가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a. 많은 책을 써왔지만, 『나의 서양미술 순례』,『청춘의 사신』,『고뇌의 원근법』등은 미술가와 작품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이다. “미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서 있었던 것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를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해 왔다. 여러 장르의 예술이 있을 텐데,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당신에게 작가/작품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 의식적으로 미술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미술에 매료됐던 이유는 ‘언어’에 기대지 않는 예술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어’로는 전부 건져낼 수 없는, ‘비집고 나오는’ 것이 미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 르네상스기의 종교예술(예컨대 카라바조)은 명목상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면서도 (아마도) 화가 자신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그 영역을 일탈하여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렇지 못했다면 카라바조의 예술도 시시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예술의 기능, 즉 언어적 사유와 표현의 한계로부터 일탈하여 인간관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것에서 미술의 매력을 느꼈다. 글쟁이인 나는 항상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고 여겨왔다. 게다가 그것도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라는 감옥에. ‘미술’은 내가 지닌 언어표현의 한계를 자각시켜, 끊임없이 그 한계에 도전하게끔 재촉했다. 글에 미술작품이 종종 등장하지만 미술작품은 글의 삽화가 아니며 글도 미술작품의 해설이 아니다. 글과 미술 사이의 긴장감 있는 대화다. 그런 형식을 취함으로써 표현하고 싶은 것의 극히 일부일지라도 그럭저럭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a.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기적 해석을 주로 해오고 있다. “예술가의 주관적 의지와 열정을 강조하고 내용 중심적인 해석에 반해 형식적인 해석은 부족하다”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도 있다.
서. ‘전기적 해석’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미술의 형식보다도 그것을 제작하는 인간, 향수하는 인간에게 흥미가 있다. 더구나 ‘예술가의 의지와 열정’을 가장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의지와 열정이 있어도 시시한 작품밖에 만들지 못하는 예술가도 많다. 반대로 작가의 ‘의지와 열정’을 읽을 수 없는데도 작품에 이상하리만치 힘이 넘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미술의 재미있는 지점이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완성된 작품의 힘이다. 다만 그 작품의 힘은 예술가의 생활 배경과 그가 몸담은 사회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훌륭한 예술은 ‘언어’를 뛰어넘는 힘으로, 그러한 문맥까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는 점이다.
a. 많은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풀어낸다. (아트 스페이스 풀 강연에서 소개했지만) 재일조선인 예술가 중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잘 드러낸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서. 나는 ‘정체성’이라는 번역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민족적 ‘정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무엇에 동일화(identify)하여 이해하느냐는 점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고민’을 정면으로 표현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룬 사례는 솔직히 말해 많지 않다. 이는 이 문제 자체가 지닌 어려움을 보여준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경우와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상황을 주제로 삼는 예술이 나타날 수 있다. 문승근의 경우를 하나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재일조선인에게 처해진 현실은 조금 더 복잡하며 곤란하다. 젊은 세대의 많은 재일조선인은 (아티스트를 포함하여)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바꿔 말하면 자기 존재의 역사적 경위)에 기인한다고 자각하는 예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 존재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측면에서 구성된다. 국민적, 민족적 요소와 더불어 성적, 계급적, 세대적, 그 밖의 많은 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며 또한 그것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재일조선인에게도 아이덴티티란 민족적 요소만으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 즉 식민 지배를 받아온 민족 출신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위협에 놓여 있다는 요소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고립되어 있으며 역사를 배울 기회와 혜택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자각하여 주제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예술에 의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인’으로서(재일조선인임을 감추고, 혹은 본인 자신도 무자각인 채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의 작품에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포함하는 뛰어난 작품이 있다. 다수자에게 없는 민감한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인 미술가’라던가 ‘재일조선인 미술가’라는 파악하기 쉬운 분류로 미술의 ‘아이덴티티’를 결정짓지 말고 작품의 내용에 담긴 ‘질문’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a. 최근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쾌대가 본격적으로 화가활동을 시작했던 일본 유학시절에 주목해 ‘이쾌대의 일본 생활과 조형의 형성’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서 이쾌대는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
서. 이 발표를 통해서 이쾌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생겼다(발표요지는 다음 호 《황해문화》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쾌대가 특별하게 천재였다는 의미보다는, 이쾌대 속에는 동양과 서양, 일본과 조선, 전통과 근대, 남북 분단이라는 복수의 컨텍스트가 상호 대립하면서 흘러들어가 있다. 바꿔 말하면 조선 민족의 근대 경험이 이 작가 개인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그는 ‘월북작가’이다. 그래서 긴 세월 금기시되었다. 원래 ‘월북작가’라는 분류와 호칭은 분단된 민족에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월북작가’라는 존재의 리얼리티에 눈감은 채로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전체상을 밝혀낼 수 없다. 또한, 그가 1930년 후반부터 일본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지만 거기에서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라고도 부정적이라고도 아직 확실히 이야기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존 담론은 기왕의 일본의 영향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눈감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쪽 눈’으로 그려진 자기상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a.《황해문화》에 ‘우리/미술 순례’를 연재를 연재하고 있다. (몹시 바랐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조선 민족 미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그들을 직접 알아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신경호, 윤석남, 정연두 작가를 만났다. 조선 민족 작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던 경험은 어땠나?
서. 같은 민족의 미술가를 가까이 접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의 염원이었기에 그 바람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들 미술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란 누구인가, 조선 민족이란 누구인가’라는 생애에 걸친 물음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고민하게 된 여로이기도 하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즐거움과 더불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아티클》의 독자들도 꼭 연재를 읽고 함께 느껴주었으면 한다.
번역. 최재혁
서경식이 우리 근대사가 낳은 ‘디아스포라’였던 것처럼 세상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디아스포라가 된 사람들이 많다. 즉 이산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내몰리고 쫓긴 삶(들)이요, 그의 말마따나 “캠프에 사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법 외부로 쫓겨난 자들”이다. 그는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들의 삶을 그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과거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려 했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현재도 맞서고 있는 많은 사람과의 만남(대화)으로 일구어낸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을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국가주의’와 ‘국민국가’를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채널을 활발하게 통해 글을 기고하고 있고 시급한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강연과 대담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시대적, 사회․정치적 맥락으로 탁월하게 읽어낸 글을 많이 썼다. 글쟁이인 그가 “언어적 사유와 표현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관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 미술의 바로 그 매력은 역으로 그의 글과 만나 풍성해진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디아스포라 기행』등의 책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역사)와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증언하는 인물을 연구한 책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최근 그는 아트 스페이스 풀(7월 5일)에서 ‘디아스포라와 예술’을 주제로 강연했고, 대구미술관(6월 29일) ‘이쾌대 탄생 100주년 학술대회’에서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계간 《황해문화》에서 ‘우리/미술 순례’를 통해 조선 민족 미술가와의 인터뷰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아티클》과의 인터뷰에서 서경식의 지난 작업과 사유에 도달하기에는 더없이 부족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성심껏 응해주었고, 연구자 최재혁의 번역을 통해 마름질 될 수 있었다.
사진 박대성
article(이하 a) : 디아스포라적 주체에 대해 선생께서는 “난민이란 난민 캠프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며, 근대 국민국가의 약속, 즉 인권이나 생존권이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국민국가의 법 외부로 쫓겨난 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미 수많은 책을 통해 서술하기도 했지만, 디아스포라적 주체에 관해 예를 들어 설명해 달라.
서경식(이하 서).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이 가장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병합’과 식민지 지배(1910년 이후)의 결과, 모든 조선인(당시의 대한제국 신민)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당시 대일본제국은 군주제의 다민족국가였고 ‘일본국민’ 중에서도 ‘야마토 민족(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계급(hierarchy)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즉, 조선인은 같은 일본국민이지만 제도적 차별을 받는 이등국민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을 겪으면서 차별적 다민족제국에서 평등한 다민족국가로 이행하지 않고, 자민족중심의 단일민족국가로 경로를 수정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끌고 왔던 식민지 출신자(조선인과 대만인)의 일본 국적을 부정했으며, 국내에 남은 조선인을 한시라도 빨리, 한 명이라도 많이 추방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그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일본에서 발휘할지도 모를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것이었고, 대부분 가난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국가의 재정부담을 덜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당시 조선반도는 분단과 내전 상태였기 때문에 양국 간 협정으로 재일조선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은 불가능했다(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교는 1965년까지 체결되지 못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국교는 지금도 맺어지지 않았다). 조선인의 일본국적은 법적으로는 1952년까지 유효했지만, 1947년 일본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을 발표하여 구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생활 근거지를 일본에 둔 조선인이라도 고향 방문 같은 사정으로 일본 국내를 떠나면(일본국적 보유자임에도) 재입국이 불가능했다. 이는 지리적 추방의 한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59년부터 ‘귀국운동’이 시작되어 총 9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이는 국교가 없었던 일본과 북한의 양 적십자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협정을 맺어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재일조선인을 ‘성가신 존재’로 여겨 의도적으로 적십자사를 부추겼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역시 ‘인도적’을 간판으로 내건 사실상의 추방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인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했지만, 지리적인 추방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국내에 머물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채, 무국적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래서 일본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누릴 수 없었다. 이는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난민화’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컨대 재일조선인의 ‘국민연금’ 가입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UN 난민조약’을 비준하고 국내법을 조정한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예만 보더라도 재일조선인이 난민이라는 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전세계에 편재해 있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를 실행했던 제국주의 국가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때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을 자의적으로 ‘국민’의 틀 속에 넣었다 밀어냈다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이런 문제를 전세계적인 반식민주의 투쟁의 과제로서 지속해서 인식함으로써 ‘국적의 유무=국민인가 아닌가?’로 인간의 차별을 당연시하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 전지국적 자본주의의 확산은 이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에게 다른 영토에서의 삶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한국도 1990년대 이후부터 다양한 이주자들이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자에 대한 국가(국민)적 법/제도(인식)는 억압적이고 배제되어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서. 한국의 사정에 밝지 않지만, 중국 조선족 동포와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상적 차별, 그리고 결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 같은 가슴 아픈 사례를 종종 접한다. 다문화가정의 경우, 앞으로 성장할 2세, 3세가 한국 사회에서 겪게 될 고통과 소외도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상황은 바로 그들보다 한 두 세대 앞서 재일조선인이 경험해 왔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우리 조선인은 기왕 식민 지배라는 고통을 받아왔기에 그 경험을 살리는 편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건 “두 번 다시는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라거나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식민지 지배와 차별의 경험자로서, 지배받는 자, 차별받는 자의 아픔에 공감대를 가져야 마땅하며, 그것이야말로 구식민지 종주국의 국민에게는 없는, 우리 조선인이 가진 귀중한 재산임이 틀림없다”라는 뜻이다. ‘우리’란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애매한 말이지만 노동 현장에서 혹사당하는 이주노동자를 볼 때, 혹은 서투른 말투로 필사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결혼 이주자를 만났을 때, 문화도 종교도 외모도 다른 그/그녀들을 ‘우리다!’라고 느낀다. 그 모습은 나의 부모처럼 재일조선인 1세의 모습 바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a.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디아스포라는 배제되고 억압된 삶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는 ‘국가주의’의 폭력을 성찰하고 ‘국민국가’의 너머를 상상하도록 하는 존재일 수 있다.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난민의 시대를 거쳐서 모든 사람이 국가에 속하지 않고, 즉 국민이 되지 않고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인간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서.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국민국가’는, 고작 200년 정도의 역사밖에 가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로서 사회주의가 있었지만,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시장경제주의로의 전환 사태를 거치며 ‘국가’를 넘어서는 제도를 구상하기가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 위한 시련을 경험하고 있다. 그 시련은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가혹하며 때로는(9.11이나 이라크 전쟁처럼) 피투성이의 투쟁을 동반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시련과 고통을 줄여나가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사진 이미정
a. 많은 책을 써왔지만, 『나의 서양미술 순례』,『청춘의 사신』,『고뇌의 원근법』등은 미술가와 작품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이다. “미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서 있었던 것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를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해 왔다. 여러 장르의 예술이 있을 텐데,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당신에게 작가/작품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 의식적으로 미술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미술에 매료됐던 이유는 ‘언어’에 기대지 않는 예술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어’로는 전부 건져낼 수 없는, ‘비집고 나오는’ 것이 미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 르네상스기의 종교예술(예컨대 카라바조)은 명목상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면서도 (아마도) 화가 자신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그 영역을 일탈하여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렇지 못했다면 카라바조의 예술도 시시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예술의 기능, 즉 언어적 사유와 표현의 한계로부터 일탈하여 인간관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것에서 미술의 매력을 느꼈다. 글쟁이인 나는 항상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고 여겨왔다. 게다가 그것도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라는 감옥에. ‘미술’은 내가 지닌 언어표현의 한계를 자각시켜, 끊임없이 그 한계에 도전하게끔 재촉했다. 글에 미술작품이 종종 등장하지만 미술작품은 글의 삽화가 아니며 글도 미술작품의 해설이 아니다. 글과 미술 사이의 긴장감 있는 대화다. 그런 형식을 취함으로써 표현하고 싶은 것의 극히 일부일지라도 그럭저럭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a.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기적 해석을 주로 해오고 있다. “예술가의 주관적 의지와 열정을 강조하고 내용 중심적인 해석에 반해 형식적인 해석은 부족하다”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도 있다.
서. ‘전기적 해석’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미술의 형식보다도 그것을 제작하는 인간, 향수하는 인간에게 흥미가 있다. 더구나 ‘예술가의 의지와 열정’을 가장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의지와 열정이 있어도 시시한 작품밖에 만들지 못하는 예술가도 많다. 반대로 작가의 ‘의지와 열정’을 읽을 수 없는데도 작품에 이상하리만치 힘이 넘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미술의 재미있는 지점이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완성된 작품의 힘이다. 다만 그 작품의 힘은 예술가의 생활 배경과 그가 몸담은 사회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훌륭한 예술은 ‘언어’를 뛰어넘는 힘으로, 그러한 문맥까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는 점이다.
a. 많은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풀어낸다. (아트 스페이스 풀 강연에서 소개했지만) 재일조선인 예술가 중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잘 드러낸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서. 나는 ‘정체성’이라는 번역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민족적 ‘정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무엇에 동일화(identify)하여 이해하느냐는 점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고민’을 정면으로 표현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룬 사례는 솔직히 말해 많지 않다. 이는 이 문제 자체가 지닌 어려움을 보여준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경우와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상황을 주제로 삼는 예술이 나타날 수 있다. 문승근의 경우를 하나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재일조선인에게 처해진 현실은 조금 더 복잡하며 곤란하다. 젊은 세대의 많은 재일조선인은 (아티스트를 포함하여)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바꿔 말하면 자기 존재의 역사적 경위)에 기인한다고 자각하는 예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 존재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측면에서 구성된다. 국민적, 민족적 요소와 더불어 성적, 계급적, 세대적, 그 밖의 많은 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며 또한 그것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재일조선인에게도 아이덴티티란 민족적 요소만으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 즉 식민 지배를 받아온 민족 출신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위협에 놓여 있다는 요소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고립되어 있으며 역사를 배울 기회와 혜택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자각하여 주제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예술에 의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인’으로서(재일조선인임을 감추고, 혹은 본인 자신도 무자각인 채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의 작품에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포함하는 뛰어난 작품이 있다. 다수자에게 없는 민감한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인 미술가’라던가 ‘재일조선인 미술가’라는 파악하기 쉬운 분류로 미술의 ‘아이덴티티’를 결정짓지 말고 작품의 내용에 담긴 ‘질문’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a. 최근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쾌대가 본격적으로 화가활동을 시작했던 일본 유학시절에 주목해 ‘이쾌대의 일본 생활과 조형의 형성’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서 이쾌대는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
서. 이 발표를 통해서 이쾌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생겼다(발표요지는 다음 호 《황해문화》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쾌대가 특별하게 천재였다는 의미보다는, 이쾌대 속에는 동양과 서양, 일본과 조선, 전통과 근대, 남북 분단이라는 복수의 컨텍스트가 상호 대립하면서 흘러들어가 있다. 바꿔 말하면 조선 민족의 근대 경험이 이 작가 개인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그는 ‘월북작가’이다. 그래서 긴 세월 금기시되었다. 원래 ‘월북작가’라는 분류와 호칭은 분단된 민족에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월북작가’라는 존재의 리얼리티에 눈감은 채로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전체상을 밝혀낼 수 없다. 또한, 그가 1930년 후반부터 일본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지만 거기에서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라고도 부정적이라고도 아직 확실히 이야기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존 담론은 기왕의 일본의 영향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눈감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쪽 눈’으로 그려진 자기상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a.《황해문화》에 ‘우리/미술 순례’를 연재를 연재하고 있다. (몹시 바랐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조선 민족 미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그들을 직접 알아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신경호, 윤석남, 정연두 작가를 만났다. 조선 민족 작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던 경험은 어땠나?
서. 같은 민족의 미술가를 가까이 접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의 염원이었기에 그 바람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들 미술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란 누구인가, 조선 민족이란 누구인가’라는 생애에 걸친 물음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고민하게 된 여로이기도 하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즐거움과 더불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아티클》의 독자들도 꼭 연재를 읽고 함께 느껴주었으면 한다.
번역.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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