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교수

[서경식의 일본통신] 레 미제라블

참된 2013. 2. 22. 09:30

[서경식의 일본통신] 레 미제라블

한겨레   등록 : 2013.02.18 19:31 수정 : 2013.02.18 19:31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ㅌ은 내 제미(강의) 소속 여학생이다. 평소 그다지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편이 아니다.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생활에 쫓겨 아르바이트하기에 바쁘다. 그 수입은 시급 800~900엔 정도일 것이다. 간만에 얼굴을 본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말을 걸었더니, “영화를 두번 봤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 무슨 영화를?” “같은 영화를 두번 봤습니다.” “같은 영화를!” “두번 모두 울었습니다.” “무슨 영화인데?” “레 미제라블….”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ㅌ은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설명하는 데 서툰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라면 난 어릴 적부터 익숙하다. 한데 최근 영화화돼 히트한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영화의 어디에 ㅌ과 같은 ‘현대 일본의 보통 여학생’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걸까,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영화관에 갔다.

어떠했느냐고? 고백하건대, 나도 울고 말았다. 특히 바리케이드 전투 장면에서 혁명파 소년 가브로슈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 혼났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가브로슈는 최근 낙서 사건으로 보도된 들라크루아의 명화에서 자유의 여신과 함께 앞장선 모습으로 묘사된 그 소년이다. 그 장면은 1832년 6월폭동을 제재로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 뒤의 반동기, 복고된 7월왕정에 저항한 혁명의 한 장면이다.

ㅌ이 이 영화를 두번이나 봤다니…. 일본이 젊은이들에게 매우 살기 힘든 사회가 된 지 몇 해나 됐을까? 내가 아는 대다수 학생들은 저임금 아르바이트에 쫓기고 있다. 졸업을 앞두고 취직이 결정됐다고 알려오는 학생은 드물다. 격차(양극화) 사회가 일상화됐다. 비정규직 비율은 35%를 넘었다. 게다가 지난해 말 탄생한 새 정권은 소비세를 늘리고 인플레 목표를 도입해 물가를 올리는 한편 사회보장비를 억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면서도 방위비(국방비)는 증액하겠단다.

지금 일본은 프랑스 7월왕정과도 닮은 복고와 반동의 시대다. 다른 것은, 프랑스에는 반항과 혁명이 있었지만 일본에는 없다는 점이다. ㅌ과 같은 젊은이들은 그런 사회에서 자랐고 그런 사회밖에 모른다. 그런 ㅌ이 이 영화를 보고 두번이나 울었단다. 어디에 감격한 것일까? 이를 계기로 저 말없는 ㅌ은 눈뜨게 될까. 애처롭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었다.

뒷날 그 얘기를 학생 ㅎ에게 해 봤다. ㅎ은 ㅌ보다 조금 연상의 남학생인데, 재일조선인이다. 내 얘기를 듣자마자 그는 말했다. “선생님, 그건 아니에요. 그 영화는 장발장과 같은 ‘좋은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를 전할 뿐 세상을 바꾸라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크게 히트한 것은 관객이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 덕일 뿐이죠.”

으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초인처럼 완강하고 성인처럼 선량한 주인공의 활약과 가난한 매춘부의 유복자로 빛나듯 사랑스런 코제트의 행복한 연애 등 요컨대 전체적으로 ‘판타지’ 같은 얘기다. 원작자인 위고 자신이 사회변혁보다 종교적 자선의식 경향이 강하고, 강고한 애국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 원래 엥겔스는 이런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사실이 있는데,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는 그때 시작됐다. 자유주의 혁명과 식민지주의는 그들에게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었다. 근대의 양면성이며 기만성이다. 따라서 그래, ㅎ이 말한 그대로인 것이다.

그럼 나는 왜 울었던가? 나이가 들어 비판정신이 약해지고 눈물샘이 통제되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부정할 순 없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를 계기로 각성하리라고 기대한다면 평소 비관주의자를 자임하는 나답지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리케이드 싸움에서 패배한 젊은이들의 유해가 바닥에 줄지어 놓인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내게 광주 5·18을 연상케 했다. 1830년대의 프랑스 7월혁명(실제로는 그 훨씬 이전)부터 1980년의 한국으로. 전세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주검들이 그렇게 널브러져야 할까.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까. ㅌ도 ㅎ도 앞으로 그런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도 나이에서 오는 감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