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교수

[서경식의 일본통신] 동아시아 위기의 시대로(2012.12.24)

참된 2013. 5. 30. 01:09

[서경식의 일본통신] 동아시아 위기의 시대로

한겨레   등록 : 2012.12.24 19:18 수정 : 2012.12.24 19:18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이 글을 쓰는 16일 오늘은 암흑의 날이다. 텔레비전은 오후 8시부터 총선 개표 속보를 전하고 있다. 민주당 정권은 소비세 증세라는 마이너스 유산만 남긴 채 참패했다. 무참한 자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나는 민주당 정권이 무능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사회 혼란에 편승한 우파가 대두하면서 파시즘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고 거듭 얘기했다. 그 예감이 착착 현실화하고 있다. 지금 내 기분을 솔직히 얘기하면, 역시 인간은 이토록 어리석은 것인가, 이렇게까지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하는 암담한 심정이다.

반년쯤 전에 나는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특집 주제는 ‘이후의 사상’이었다. ‘후쿠시마 이후, 3·11 이후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검토해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요청에 응한 나는 그 인터뷰에 “‘이후’에 나타나는 ‘이전’-후쿠시마와 동아시아”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아래에 그 일부를 요약·소개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기보다는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또다시 펼쳐진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후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일본 근대가 다시 한번 머리를 쳐들고 눈앞을 가로막아 선 것이다. 원전은 모습을 바꾼 핵무기라고들 한다. 최근 1년 그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다. 안전성이 전혀 확보되지 않았고 비용이 싸게 먹히는 것도 아닌데 이를 계속 추진하려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고 있나. 그것은 이시하라 신타로나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등이 솔직히 얘기한 대로 잠재적인 군사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용후 핵연료는 단순한 산업폐기물이 아니라 무기의 원료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서 대두되는 의문은, 실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라는 게 진짜였던가, 그 ‘평화주의’와 전전 사이에 있는 것은 단절인가 연속인가라는 문제다. 군사력으로서 핵을 유지하려는 욕망 때문에 원전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건 잠재적인 전쟁이라고 해야 한다.

왜 ‘동아시아’인가. 일본, 한반도, 중국의 좁은 지역은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원전밀집지역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지역 어딘가에서 다시 후쿠시마와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면 피해는 전 지역에 미칠 것이다. 그러나 담론들은 국가의 논리를 당연시하고 ‘일본의 복구·부흥’을 얘기하는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란 어디를 가리키는가. 사람들은 단지 지리적 개념으로, 혹은 한자나 유교 등 문화적 동질성으로 동아시아를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동아시아’란 근대에 일본이 침략한 지역이다. 일본이 이 ‘동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가해의 역사를 청산하고 주변 민족과 화해해야 한다.

후쿠시마를 비롯한 3·11 사태를 ‘국난’이라며 전쟁에 비유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그와 정반대 방향에서 지금 사태를 통해 전쟁을 연상하고 있다. 현상이 잠재적 전쟁인 이상 탈원전운동은 반전평화운동으로 추진돼야 한다. 원전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이 중국이나 조선(남북한)에 대한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응용문제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동아시아 차원에서 생각하면 대답은 명확하다. 일본의 국가주의를 부추기면서 동아시아의 탈원전을 실현할 수는 없다. 탈원전 지향과 국가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여기서 어떤 특별한 얘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따분할 지경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본 국민은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자민당엔 다행스럽게도 극우파 정권이 탄생하게 됐다. 앞으로 민주당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그들 중 우파는 자민당에 흡수될 것이다. 리버럴 세력의 대결집은 쉽게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자민당과 일본유신회가 연립하는 거대 극우 여당이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극우화하는 일본은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항국가주의를 불러일으켜 지역 위기가 증폭될 것이다. 한국은 위기가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한국의 평화는 한 나라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 전체의 평화를 어렵사리 지켜내는 요새다. 여러분의 각성과 건투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