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노동중심성’의 수난

참된 2013. 8. 3. 08:13

‘노동중심성’의 수난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노동중심성을 탈피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중심성’과 노동귀족’은 쌍을 이뤄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낙인이 된다. 노동이 동네북인가.

  조회수 : 4,833  |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  webmaster@sisain.co.kr     시사인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302호] 승인 2013.07.03  07:00:56

 

덜커덕 구속됐다. 불행은 두 손 잡고 온다는 말이 있던데 딱 그 짝이었다.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지난 6월12일 밤 법원이 냉큼 받아들였다. 며칠 동안 숨 가쁘게 움직이며 구속을 막아보려던 노력도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부장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가 아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불구속이라는 사실이 약 올라서도 아니다. ‘노동’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여름 장맛비에 흠뻑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뜬금없는 ‘노동중심성’에 대한 대국민 사과문이 기분을 영 언짢게 했다. 대한문 앞에선 짓밟히고 끌려가는 노동자들이 연일 발생하는데 그런 한가한 소리나 듣고 있자니 화가 더 났다. 그동안 진보 정당들이 정규직 대공장 노조를 과잉 대표했음을 반성한다는 이번 사과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금속노조 사무처장 출신인 심상정 의원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그렇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현장 노동자들은 선거 때마다 세액공제사업은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진보정당의 발전과 뿌리내림을 위해 노력했다. 그야말로 돈 대고 몸 댄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진보 정당이 가장 빛났던 시기도 당명에 노동이 들어갔던 민주노동당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당명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넣는 것만도 얼마나 많은 토론의 시간이 필요했나. 진보정의당이 반성하는 노동중심성 탈피가 노동뿐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외연을 넓혀나가겠다는 것이었다면 굳이 노동을 짓밟는 표현을 써야 했을까. 정책적 방향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소외됐던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 대변하겠다는 의지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나.

한국 사회에는 자본과 보수 언론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노동조합 공격용으로 ‘귀족노조’가 사용된다.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귀족노조는 파업이 벌어지거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폄훼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가 된다. 너도 나도 귀족노조를 사용하다 보니 이젠 고유명사가 돼버릴 지경이다. 그래서 말이 무섭다.

1년 전에는 노동중심성 강화한다더니…

   
 

최근 <한국일보>가 장재구 회장의 배임 문제로 편집국이 폐쇄당하고 기자들은 용역들에게 쫓겨났다. YTN 해직 언론 노동자들은 국토순례를 하고 있다. 노동 현장뿐 아니라 언론 현장도 수년 동안 탄압을 당하는 마당이다. ‘노동’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 대접이 이렇다. 노동중심성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누구에 의해 유통되고 거래되는가. 바로 자본이다. 그래서 ‘노동중심성’과 ‘노동귀족’은 암맷돌과 숫맷돌을 이뤄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고 적대시하는 악마의 맷돌로 사용될 뿐이다.

통합진보당 당내 경선 문제가 정국을 뒤흔들고 난 뒤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심상정 의원의 발언을 기억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중심성’ 강화였다.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말이다. 1년을 사이에 두고 노동중심성은 강화에서 탈피로 좌표를 옮겼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없는 정치적 수사로 보일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만들었던 세력이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비판받아야한다. 또한 정규직 대공장 노조의 구실이 더 늘어나고 확대돼야 하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대공장 정규직 노조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정책을 궁리하고 제시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노동’을 동네북처럼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해서 남는 게 무엇이며 결국 좋아할 사람은 누구일까. ‘노동’ 함부로 차지 마라.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