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사입력 2004-06-08 오전 10:09:00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삼성과 싸웠던 걸 생각해보면...의원 10명과 함께 싸우는 것은 차라리 꽃길입니다"
윤종훈 회계사는 '1인시위 창시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00년부터 2001년 '삼성 이재용의 변칙 상속'에 대해 홀로 국세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다 '창시자'까지 돼버렸다.
참여연대 조세개혁 실행위원으로서 국세청과 무던히도 싸워왔던 그는 얼마 전 민주노동당으로 적을 옮겼다. <프레시안>은 민노당 정책연구원으로서 부유세를 비롯한 각종 조세개혁정책을 이끌게 될 그를 만나 보았다. 마침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관한 공청회를 참관하고 나온 직후라 약간 흥분상태였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했다.
"언론ㆍ사법개혁 아닌 경제분야서 우리-한나라당은 한 몸...289 대 10 싸움 각오"
프레시안 : 주로 재경위의 심상정 의원과 협력할텐데, 민노당이 재경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윤 : 우선은 입법 추진보다 악법 저지다. 법인세 인하만 해도 총선과 탄핵 와중에 은근슬쩍 이뤄졌다.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도 신자유주의 감세 물결에 계속 밀리게 되고 이는 결국 재정축소와 복지후퇴로 이어진다. 정부는 그동안 형평성 논란에도 '투자 활성화' 논리로 감세정책을 밀어붙여왔다. 복지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재벌들의 경제위기론'과 개혁 협박 방어하기 바쁘다. 열린우리당은 좌충우돌하고 민노당만이 확고한 원칙 있는데 힘이 약하다. 밀고 들어오는 탱크 앞에 죽창 들고 있는 기분이다.
프레시안 : 재경위 의원 1명 힘으로 저지할 수 있나.
윤 : 참여연대도 의석 1개 없이 성과를 내왔는데 민노당은 그래도 10석이나 있지 않나. 더구나 의원이 접할 수 있는 고급정보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솔직히 참여연대 있을 땐 맨땅에 헤딩이었다. 일개 개인이 정보공개 청구하 면 누가 들어주며 또 공무원은 아무나 만나주나. 국회 안에 들어가기도 지금이야 좋아졌지 16대 때는 완전 무슨 간첩 취급이었다. 지금은 24시간 국회 티비 생중계도 한다고 하지, 앞으로 함부로 쑥덕쑥덕 못한다. 결국 실력대결이 될 테고, 대중들이 판단할 거다.
우리당은 화면발 받는 언론ㆍ사법개혁 등에서나 개혁이지 적어도 경제분야서 우리-한나라당은 한 몸이다. 다 재벌입김에 놀아난다. 사실상 299중 289대 10의 싸움을 각오하고 있다. 민노당에 들어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고.
"시민단체는 순발력...당 정책은 통합적이어야"
프레시안 : 그래도 1996년부터 일해왔는데, 참여연대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뭐였나.
윤 : 참여연대의 한계는 일단 월급을 안 준다는 것이다(웃음). 이렇게 웃지만 중요한 문제였다(그가 받을 공동정책연구원의 월급은 1백80만원선) 참여연대는 상근자 외에 자비로 활동해도 무리가 없는 교수, 변호사를 주축으로 돌아간다. 형식적으로 회계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영어학원으로 생계비를 버는 나로서는 큰 애가 고등학생인데 생활자체가 힘들었다. 2000년도까지는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2001년 상반기까지 삼성과 싸운 이후로는 부분적으로만 활동했다. 그런 패턴은 올인해야 하는 성격상 체질에 안 맞았다.
게다가 이제는 원내교두보가 확보됐지 않았나. 시민단체는 순발력이다. 밤에 일이 터져도(?) 헌신적 활동가 몇몇이 그 다음날 아침에 대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전문분야로 나눠지고 수평적 분업화가 잘 돼 있어 통합이 어려웠다. 그러나 국가정책은 사실 통합적인 문제다. 시민단체보다는 훨씬 강도 있게 대안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민노당 활동방식과도 확실히 선을 다르게 긋는 문제다. 이념적 잣대로 정파대결하는 게 아니라 정책적 내용 자체가 방향을 정하게 해야 한다.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나.
윤 : 당에서는 현실적으로 우선 부유세의 구체적 내용을 채우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인프라 구축 없는 부유세는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사전에 일련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 전 단계 과제들은 사회시민단체와 공동연대로 풀어나갈 것이다.
"부유세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이자 상징"
부유세는 단순한 조세명칭이 아니다. 조세와 재정은 향후 민노당이 만들어갈 새로운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스웨덴과 독일 사민당은 조세-노동-복지-기업성장 정책 등이 맞물려 하나의 모델이 창출됐을 때 집권했다. 한국사회도 그런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일단 부유세로 나타난 대중들의 욕망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부유세로 상징되는 모델 창출의 요구지, 단순히 조세문제만 얘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3년 후엔 민노당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도부와 거시적 목표에 합의를 보고, 곧 업무분담과 조직체계 정비에 들어갈 것이다.
프레시안 : 총체적 사회구조 개혁은 장기적 과제다. 우선 국민들에게 2002년 대선때부터 민주노동당이 주장해온 부유세의 내용과 가능성을 보여줘야 도리(?) 아닌가.
윤 :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해서 지금 보여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금 3층이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를 위해 우선 1, 2층을 짓자는 얘기다. 현실적 인프라 없는 부유세 입법안은 만들 수는 있어도 무의미하다. 지금 상태에서 3층이 가능하냐 아니냐 논쟁보다는 1, 2층을 튼실하게 세우는 합의가 우선이다.
"재산파악 체계부터 만들어놔야, 부유세 과세시 재산 왜곡현상 안 일어나"
현재 부동산 외에 예금과 주식 등 금융자산은 파악도 과세도 안 되고 있다. 파악이 가능해야 부유세 과세시, 부동산을 떠나 금융으로 줄서는 재산왜곡 현상이 안 일어난다. 재산 파악 행정비용이 더 든다는 주장에는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 그럼 인프라 구축을 하지 말자는 얘긴가. 그런 주장은 기본적 철학 자체에 개혁 마인드가 없다는 고백이다.
프레시안 : 새로운 부유세의 도입보다는 기존 재산세의 엄격한 누진적 적용이 낫다, 이중과세 소지가 있다, 선진국에선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조세저항이 예상된다 등등의 반론은 어떻게 보나.
윤 : 부유세는 소득세의 보완적 기능이 있다. 삼성 이재용이 16억 내고 몇 조 먹었는데 부유세 도입하면 그렇게 못한다. 우리나라 세법의 한계가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는 거다. 결국 자기 재산 증식 부분에 과세를 해야 한다. 초기에 인프라 부족으로 소득세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유세 도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도 귀신같이 빠져나가니까...
"부유층의 조세저항? 그건 저항이 아니라 반역"
부유세는 법체계 자체가 열거주의냐 포괄주의냐에 따라 다른데, 법체계 자체의 맹점 때문에 빠져나가는 세금을 잡을 때 효과가 있다. 미국 같은 경우는 금융재산 추적 인프라는 갖췄지만 물리적 세법 체계가 허술했다. 그럴 경우 부유세가 효과를 발휘한다.
우 리는 인프라도 부족하지만. 그런 나라들에서 부유세가 없어지고 있다는 건 법체계의 허술함이 보완되고 있다는 것이다. 워낙 세법체계가 치밀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과거에 빠져나가는 놈 잡던 부유세를 없애는 추세인 것이다. 행정비용도 많이 드니. 그러나 우리는 인프라도, 치밀한 세법체계도 없다. 인프라 구축 후, 부유세 과세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해야 한다. 의지의 문제다.
부 유층의 조세저항 무서우면 아무것도 못한다. 조세저항은 용어부터 잘못 됐다. 저항은 권력자가 대중을 수탈하고 억압할 때, 약자의 생존권을 위한 마지막 반항이다. 저항은 가난한 대중들이 쓰는 말이다. 부유층이 세금 안 내겠다는 건 조세저항이 아니라 조세반역이다. 해외로의 자본유출도 그렇게 쉽게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각 나라 금융정보 분석원에서 조세회피로 인한 OECD 국가 협약도 있고... 어쨌든 부유세 논란이 생산성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삼성과의 싸움, 계란으로 바위를 치니 계란이 깨지더라"
프레시안 : 참여연대에서 삼성과 싸우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윤 : 우선 계란으로 바위를 치니깐 계란이 깨지더라는 것이다. 물론 과세에 성공을 했고 몇 백억의 세금을 물리긴 했지만, 삼성 이재용씨는 여전히 수 조원의 부자고 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대가와 싸움의 상처는 컸다. 시민운동의 성과는 컸지만 우왕좌왕 힘들 때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싸움을 책임져야 했었다.
홀로 싸우게 내버려두는 건 아니다 싶은 거다. 내부고발자도 마찬가지고 제도적 보호가 없다면 누가 함부로 계란을 치겠나. 백개를 치면 바위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백 개의 계란이 모이겠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운동권 내부의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좋은 의미(?)로는 이제 겁날 게 없다. 정부도 사실 삼성만큼 겁 안 난다. 삼성은 이건희가 '정부는 4류'라고 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조직력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사자하고 싸워서 살아남았는데, 의원 10명과 함께 하는 싸움은 차라리 꽃길이다.
"택시노동자일 땐, 잠자고 노동하고 노조활동하기 바빴다"
프레시안 : 회계사가 되기 전, 80년대에 택시노조 활동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윤종훈 : 84년 하반기에서 88년까지 현장에서 4년을 보냈다. 82년 강집으로 대학 짤린 후, 군대에 다녀오고 택시 정비공이 됐다. 옛날에는 택시 대수도 한정돼 있고, 수입도 대졸 대리급이라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정비공 2년하고 한 2년을 운전하면서 노조활동도 많이 했다.
그 때는 운동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삭막했다. 구소련의 공식 해체는 89년도지만 내용적으로는 86년 이후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좌절감은 엄청났다. 현장에 있으면 정보를 전혀 모른다. 뭐 NL-PD논쟁이야 시간남는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거고 하루에 12시간씩 노동하는 사람들이 논쟁할 게 머가 있나. 잠자고 노동하고 노조활동 하기 바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에 상부조직이 와해되면서 노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때 현장의 자괴감은 말도 못한다. 모임도 안 되고 조직화도 안 되고... 일개의 노동자로 남는 거다. 현장에서 나오면서 먹고 살길 찾고 있던 와중에 노태우 정권으로 바뀐 88년, '전두환 때 운동하다 짤린 애들' 복학조치가 취해졌다. 그 때는 '운동권 장학금'이라고 해서 한 학기 등록금도 무료였다. 집의 요구도 있고 88년에 결혼하면서 복학한 후 90년도에 회계사가 됐다.
"3천원짜리 된장찌개는 대중들의 삶...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나"
하여튼 그때 자괴감이라는 것은...너무 분하고 원통해 서 한 달 동안 밖에를 안 나가고 술만 먹었다. 22세부터 시작해서 내 청춘과 20대를 택시노조에 다 바쳤는데 그것이 한 순간에 한여름밤의 허망한 꿈인 게 드러났을 때, 그 좌절감이라는 것은...그런 것들은 그 세대들이 다 느꼈던 거고...사실 그런 것을 깊게, 깊게 느끼는 사람들은 쉽게 제도권 정치에 못 들어간다. 들어간다 해도 자기정체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는 심상정 의원하고 같이 다니면 그냥 편하다. 나하고 똑같으니깐, 지하철, 버스타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거고. 식당에서 밥 500원 더 비싼 거 따지는 것도 대중들하고 똑같고. 별 것도 아닌 게 본질일 수 있다. 학생회장 출신 의원도 많지만 의원 됐다고 보좌관이 차 문 열어주고 밥 몇 만원짜리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거다.
사람이란 게 간사한 거다. 2, 3만원짜리 밥 먹다가 3천원짜리 된장찌개가 먹히겠나. 그게 대중들의 삶인데. 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할까 싶다. 한복이냐, 양복이냐 옷차림은 비본질적인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삶의 모습은 그 사람의 지향점하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만 해도 90년에서 96년까지는 세월 좋았다(웃음) 돈을 많이 번 것 보다도 대접을 잘 받고 다녔다. 그 때는 너무 좋아 정신없이 즐겼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사장들이 양주만 사주니, 소주가 역할 정도였다. 지금은 반대로 됐지만. 이상하게 돈 많은 사람들하고 사귀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돈만 밝히고. 변하려니깐 변해지더라. 내가 그렇게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아는 변호사 분이 안타까워서 참여연대 들어가라고 한 것 같다...
2004년 민노당의 원내진출과 부유세로 시작한 이야기는 2000년 삼성과의 싸움, 96년 참여연대 참여, 90년 회계사시험 합격을 거쳐 80년대 택시노동자 시절로...역사 속으로 그렇게 굽이굽이 넘어가더니, 변한 이와 변하지 않는 이가 같은 시공간에 묘하게 존재하는 '2004년 한국'으로 겨우 돌아왔다. 변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변하지 않겠다는 현재의 다짐으로.
"저항이 아니, 반역이 심하더라도 정도를 가는데 못가게 하면 싸워야죠. 그러면 사건이 되는 겁니다"
진정성과 개혁성이 없다면 제 1당도 총선 끝나고 50여일만에 냉혹한 심판을 받는 나라에서 민주노동당이 일으킬 '사건' 역시 앞으로 국민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윤종훈 회계사는 '1인시위 창시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00년부터 2001년 '삼성 이재용의 변칙 상속'에 대해 홀로 국세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다 '창시자'까지 돼버렸다.
참여연대 조세개혁 실행위원으로서 국세청과 무던히도 싸워왔던 그는 얼마 전 민주노동당으로 적을 옮겼다. <프레시안>은 민노당 정책연구원으로서 부유세를 비롯한 각종 조세개혁정책을 이끌게 될 그를 만나 보았다. 마침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관한 공청회를 참관하고 나온 직후라 약간 흥분상태였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했다.
"언론ㆍ사법개혁 아닌 경제분야서 우리-한나라당은 한 몸...289 대 10 싸움 각오"
"아파트 원가공개? 당연히 해야죠. 원가공개안하고 자기들끼리 연동제하면 유착하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저만 해도 당장 건설현장에서 원가 부풀리는 방법 10가지는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그런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가면 안됩니다." ⓒ프레시안 | |
프레시안 : 주로 재경위의 심상정 의원과 협력할텐데, 민노당이 재경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윤 : 우선은 입법 추진보다 악법 저지다. 법인세 인하만 해도 총선과 탄핵 와중에 은근슬쩍 이뤄졌다.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도 신자유주의 감세 물결에 계속 밀리게 되고 이는 결국 재정축소와 복지후퇴로 이어진다. 정부는 그동안 형평성 논란에도 '투자 활성화' 논리로 감세정책을 밀어붙여왔다. 복지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재벌들의 경제위기론'과 개혁 협박 방어하기 바쁘다. 열린우리당은 좌충우돌하고 민노당만이 확고한 원칙 있는데 힘이 약하다. 밀고 들어오는 탱크 앞에 죽창 들고 있는 기분이다.
프레시안 : 재경위 의원 1명 힘으로 저지할 수 있나.
윤 : 참여연대도 의석 1개 없이 성과를 내왔는데 민노당은 그래도 10석이나 있지 않나. 더구나 의원이 접할 수 있는 고급정보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솔직히 참여연대 있을 땐 맨땅에 헤딩이었다. 일개 개인이 정보공개 청구하 면 누가 들어주며 또 공무원은 아무나 만나주나. 국회 안에 들어가기도 지금이야 좋아졌지 16대 때는 완전 무슨 간첩 취급이었다. 지금은 24시간 국회 티비 생중계도 한다고 하지, 앞으로 함부로 쑥덕쑥덕 못한다. 결국 실력대결이 될 테고, 대중들이 판단할 거다.
우리당은 화면발 받는 언론ㆍ사법개혁 등에서나 개혁이지 적어도 경제분야서 우리-한나라당은 한 몸이다. 다 재벌입김에 놀아난다. 사실상 299중 289대 10의 싸움을 각오하고 있다. 민노당에 들어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고.
"시민단체는 순발력...당 정책은 통합적이어야"
프레시안 : 그래도 1996년부터 일해왔는데, 참여연대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뭐였나.
그는 저녁식사를 건너뛰고 마시기 시작한 맥주를, 안주도 먹지 않고 급하게 들이켰다. ⓒ프레시안 | |
윤 : 참여연대의 한계는 일단 월급을 안 준다는 것이다(웃음). 이렇게 웃지만 중요한 문제였다(그가 받을 공동정책연구원의 월급은 1백80만원선) 참여연대는 상근자 외에 자비로 활동해도 무리가 없는 교수, 변호사를 주축으로 돌아간다. 형식적으로 회계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영어학원으로 생계비를 버는 나로서는 큰 애가 고등학생인데 생활자체가 힘들었다. 2000년도까지는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2001년 상반기까지 삼성과 싸운 이후로는 부분적으로만 활동했다. 그런 패턴은 올인해야 하는 성격상 체질에 안 맞았다.
게다가 이제는 원내교두보가 확보됐지 않았나. 시민단체는 순발력이다. 밤에 일이 터져도(?) 헌신적 활동가 몇몇이 그 다음날 아침에 대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전문분야로 나눠지고 수평적 분업화가 잘 돼 있어 통합이 어려웠다. 그러나 국가정책은 사실 통합적인 문제다. 시민단체보다는 훨씬 강도 있게 대안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민노당 활동방식과도 확실히 선을 다르게 긋는 문제다. 이념적 잣대로 정파대결하는 게 아니라 정책적 내용 자체가 방향을 정하게 해야 한다.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나.
윤 : 당에서는 현실적으로 우선 부유세의 구체적 내용을 채우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인프라 구축 없는 부유세는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사전에 일련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 전 단계 과제들은 사회시민단체와 공동연대로 풀어나갈 것이다.
"부유세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이자 상징"
부유세는 단순한 조세명칭이 아니다. 조세와 재정은 향후 민노당이 만들어갈 새로운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스웨덴과 독일 사민당은 조세-노동-복지-기업성장 정책 등이 맞물려 하나의 모델이 창출됐을 때 집권했다. 한국사회도 그런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일단 부유세로 나타난 대중들의 욕망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부유세로 상징되는 모델 창출의 요구지, 단순히 조세문제만 얘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3년 후엔 민노당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도부와 거시적 목표에 합의를 보고, 곧 업무분담과 조직체계 정비에 들어갈 것이다.
프레시안 : 총체적 사회구조 개혁은 장기적 과제다. 우선 국민들에게 2002년 대선때부터 민주노동당이 주장해온 부유세의 내용과 가능성을 보여줘야 도리(?) 아닌가.
윤 :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해서 지금 보여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금 3층이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를 위해 우선 1, 2층을 짓자는 얘기다. 현실적 인프라 없는 부유세 입법안은 만들 수는 있어도 무의미하다. 지금 상태에서 3층이 가능하냐 아니냐 논쟁보다는 1, 2층을 튼실하게 세우는 합의가 우선이다.
"재산파악 체계부터 만들어놔야, 부유세 과세시 재산 왜곡현상 안 일어나"
현재 부동산 외에 예금과 주식 등 금융자산은 파악도 과세도 안 되고 있다. 파악이 가능해야 부유세 과세시, 부동산을 떠나 금융으로 줄서는 재산왜곡 현상이 안 일어난다. 재산 파악 행정비용이 더 든다는 주장에는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 그럼 인프라 구축을 하지 말자는 얘긴가. 그런 주장은 기본적 철학 자체에 개혁 마인드가 없다는 고백이다.
프레시안 : 새로운 부유세의 도입보다는 기존 재산세의 엄격한 누진적 적용이 낫다, 이중과세 소지가 있다, 선진국에선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조세저항이 예상된다 등등의 반론은 어떻게 보나.
윤 : 부유세는 소득세의 보완적 기능이 있다. 삼성 이재용이 16억 내고 몇 조 먹었는데 부유세 도입하면 그렇게 못한다. 우리나라 세법의 한계가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는 거다. 결국 자기 재산 증식 부분에 과세를 해야 한다. 초기에 인프라 부족으로 소득세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유세 도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도 귀신같이 빠져나가니까...
"부유층의 조세저항? 그건 저항이 아니라 반역"
부유세는 법체계 자체가 열거주의냐 포괄주의냐에 따라 다른데, 법체계 자체의 맹점 때문에 빠져나가는 세금을 잡을 때 효과가 있다. 미국 같은 경우는 금융재산 추적 인프라는 갖췄지만 물리적 세법 체계가 허술했다. 그럴 경우 부유세가 효과를 발휘한다.
우 리는 인프라도 부족하지만. 그런 나라들에서 부유세가 없어지고 있다는 건 법체계의 허술함이 보완되고 있다는 것이다. 워낙 세법체계가 치밀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과거에 빠져나가는 놈 잡던 부유세를 없애는 추세인 것이다. 행정비용도 많이 드니. 그러나 우리는 인프라도, 치밀한 세법체계도 없다. 인프라 구축 후, 부유세 과세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해야 한다. 의지의 문제다.
부 유층의 조세저항 무서우면 아무것도 못한다. 조세저항은 용어부터 잘못 됐다. 저항은 권력자가 대중을 수탈하고 억압할 때, 약자의 생존권을 위한 마지막 반항이다. 저항은 가난한 대중들이 쓰는 말이다. 부유층이 세금 안 내겠다는 건 조세저항이 아니라 조세반역이다. 해외로의 자본유출도 그렇게 쉽게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각 나라 금융정보 분석원에서 조세회피로 인한 OECD 국가 협약도 있고... 어쨌든 부유세 논란이 생산성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삼성과의 싸움, 계란으로 바위를 치니 계란이 깨지더라"
지난 2000년 12월 벌인 최초 1인시위. 당시 국세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참여연대 윤종훈 회계사와 이를 지켜보는 국세청 직원들. ⓒ오마이뉴스 이종호 |
프레시안 : 참여연대에서 삼성과 싸우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윤 : 우선 계란으로 바위를 치니깐 계란이 깨지더라는 것이다. 물론 과세에 성공을 했고 몇 백억의 세금을 물리긴 했지만, 삼성 이재용씨는 여전히 수 조원의 부자고 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대가와 싸움의 상처는 컸다. 시민운동의 성과는 컸지만 우왕좌왕 힘들 때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싸움을 책임져야 했었다.
홀로 싸우게 내버려두는 건 아니다 싶은 거다. 내부고발자도 마찬가지고 제도적 보호가 없다면 누가 함부로 계란을 치겠나. 백개를 치면 바위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백 개의 계란이 모이겠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운동권 내부의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좋은 의미(?)로는 이제 겁날 게 없다. 정부도 사실 삼성만큼 겁 안 난다. 삼성은 이건희가 '정부는 4류'라고 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조직력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사자하고 싸워서 살아남았는데, 의원 10명과 함께 하는 싸움은 차라리 꽃길이다.
"택시노동자일 땐, 잠자고 노동하고 노조활동하기 바빴다"
그는 "당장 부유세 논란의 전면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실무를 하는 데 시간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며 부유세 논란을 비껴가려고 했다. "2년 후에 반드시 보여주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거듭 덧붙이면서. ⓒ프레시안 | |
프레시안 : 회계사가 되기 전, 80년대에 택시노조 활동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윤종훈 : 84년 하반기에서 88년까지 현장에서 4년을 보냈다. 82년 강집으로 대학 짤린 후, 군대에 다녀오고 택시 정비공이 됐다. 옛날에는 택시 대수도 한정돼 있고, 수입도 대졸 대리급이라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정비공 2년하고 한 2년을 운전하면서 노조활동도 많이 했다.
그 때는 운동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삭막했다. 구소련의 공식 해체는 89년도지만 내용적으로는 86년 이후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좌절감은 엄청났다. 현장에 있으면 정보를 전혀 모른다. 뭐 NL-PD논쟁이야 시간남는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거고 하루에 12시간씩 노동하는 사람들이 논쟁할 게 머가 있나. 잠자고 노동하고 노조활동 하기 바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에 상부조직이 와해되면서 노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때 현장의 자괴감은 말도 못한다. 모임도 안 되고 조직화도 안 되고... 일개의 노동자로 남는 거다. 현장에서 나오면서 먹고 살길 찾고 있던 와중에 노태우 정권으로 바뀐 88년, '전두환 때 운동하다 짤린 애들' 복학조치가 취해졌다. 그 때는 '운동권 장학금'이라고 해서 한 학기 등록금도 무료였다. 집의 요구도 있고 88년에 결혼하면서 복학한 후 90년도에 회계사가 됐다.
"3천원짜리 된장찌개는 대중들의 삶...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나"
하여튼 그때 자괴감이라는 것은...너무 분하고 원통해 서 한 달 동안 밖에를 안 나가고 술만 먹었다. 22세부터 시작해서 내 청춘과 20대를 택시노조에 다 바쳤는데 그것이 한 순간에 한여름밤의 허망한 꿈인 게 드러났을 때, 그 좌절감이라는 것은...그런 것들은 그 세대들이 다 느꼈던 거고...사실 그런 것을 깊게, 깊게 느끼는 사람들은 쉽게 제도권 정치에 못 들어간다. 들어간다 해도 자기정체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는 심상정 의원하고 같이 다니면 그냥 편하다. 나하고 똑같으니깐, 지하철, 버스타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거고. 식당에서 밥 500원 더 비싼 거 따지는 것도 대중들하고 똑같고. 별 것도 아닌 게 본질일 수 있다. 학생회장 출신 의원도 많지만 의원 됐다고 보좌관이 차 문 열어주고 밥 몇 만원짜리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거다.
사람이란 게 간사한 거다. 2, 3만원짜리 밥 먹다가 3천원짜리 된장찌개가 먹히겠나. 그게 대중들의 삶인데. 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할까 싶다. 한복이냐, 양복이냐 옷차림은 비본질적인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삶의 모습은 그 사람의 지향점하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만 해도 90년에서 96년까지는 세월 좋았다(웃음) 돈을 많이 번 것 보다도 대접을 잘 받고 다녔다. 그 때는 너무 좋아 정신없이 즐겼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사장들이 양주만 사주니, 소주가 역할 정도였다. 지금은 반대로 됐지만. 이상하게 돈 많은 사람들하고 사귀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돈만 밝히고. 변하려니깐 변해지더라. 내가 그렇게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아는 변호사 분이 안타까워서 참여연대 들어가라고 한 것 같다...
2004년 민노당의 원내진출과 부유세로 시작한 이야기는 2000년 삼성과의 싸움, 96년 참여연대 참여, 90년 회계사시험 합격을 거쳐 80년대 택시노동자 시절로...역사 속으로 그렇게 굽이굽이 넘어가더니, 변한 이와 변하지 않는 이가 같은 시공간에 묘하게 존재하는 '2004년 한국'으로 겨우 돌아왔다. 변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변하지 않겠다는 현재의 다짐으로.
"저항이 아니, 반역이 심하더라도 정도를 가는데 못가게 하면 싸워야죠. 그러면 사건이 되는 겁니다"
진정성과 개혁성이 없다면 제 1당도 총선 끝나고 50여일만에 냉혹한 심판을 받는 나라에서 민주노동당이 일으킬 '사건' 역시 앞으로 국민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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