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는 이소선이 짊어진 고단한 삶과 함께 귀엽고 유쾌한 낙관적인 일상을 담았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년 동안의 기록이다. 인디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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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민낯이 사무치네 |
[문화2] 이소선의 마지막 2년을 담담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어머니>
이선옥 르포작가 한겨레 21 [2012.04.16 제9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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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두고 갔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라는 형벌을 남겼고,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지고 가야 할 굴리다 만 덩이를 어미에게 얹어주고 갔다. 사람들은 그 아들을 ‘열사’라 칭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끔찍이 싫어했다. 어미는 죽은 아들 대신 세상의 모든 노동자를 자식으로 품었고, 그래서 40년을 단 하루도 아들과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이제 그토록 그립던 아들과 만나 살아서 못한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을, 생때같은 자식을 비로소 품에 안고 있을 그녀. 한 많은 어미의 이름은, 이소선(1929년 12월30일~2011년 9월3일)이다.
투사 이전에 그리운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 2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어머니>가 4월5일 개봉했다. 노동자들을 카메라로 쫓던 다큐멘터리 감독 태준식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색다른 모습으로 담아냈다. 한없이 크고 위대한 열사의 어머니인 줄만 알았던 그녀의 뜻밖에 따뜻하고 엉뚱하게 유쾌한 민낯을 볼 수 있다. 가진 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당당하고 고집스러운 투사였지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뒤돌아 앉는 반도의 흔한 여자요 어머니였다. 언제나 만나면 말보다 품 안으로 먼저 끌어당겨 안아주던 어머니가 생각나 영화를 보는 내내 속절없이 울다 웃었다. 그 작은 몸뚱이가 짊어졌던 40년 세월의 힘겨운 고통이 고단한 잠 속에 다 담긴 것만 같아 안쓰럽다가도,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농을 치는 모습에서는 귀엽고 유쾌한 어머니의 본색이 보여 절로 웃음이 났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웃고 노래하고 놀기 좋아했던 유쾌한 청년 ‘태일이’가 왜 천생 그녀의 아들인지 이소선을 보면 안다.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40년 넘는 세월을 수백 번씩 경찰서와 감옥을 들락거리며, 아비 없이 남겨진 세 자식과 졸지에 자식으로 품은 노동자 수천 명의 어미로 살 수 있었던 힘은. 웃음이 없는 이소선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놀라울 정도의 직관력과 혜안에서 나오는 입담은 언제나 못 가진 자들을 품는 데 쓰였다. 누구나 그녀 앞에선 웃었고 무장해제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이소선을 잘 보여준다. 200번이 넘는 연행 전력, 늘 쫓기고 얻어맞는 일상으로 뼛속까지 골병 든 노동운동가, “내 자식들 잡아가지 말라”고 외치다 먼저 잡히곤 했던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모습은 아주 적다. 대신 밭은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든 늙은 이소선의 모습이나, 고스톱을 치며 웃는 일상부터, 쓰러져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운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너무 작아 이름도 소선이었던 한 조그만 여인의 특별한 삶을 평범하게 다룬, 그래서 특별한 영화다. ‘투사’ 이소선이 버거운 사람에게도, ‘어머니’ 이소선이 그리운 사람에게도 모두 소구하는 것, 그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공교롭게도 다큐멘터리 <어머니>를 본 날 2010년 하청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라며 분신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의 병상 인터뷰를 봤다. 칭칭 동여맨 붕대 사이로 분신으로 타서 뭉그러진 입술이 힘겹게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너무 절박했습니다. 왼쪽에는 정규직, 오른쪽에는 저, 똑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똑같은 작업에, 똑같은 작업지시서에, 똑같은 공구에, 똑같은 작업재료까지 다 똑같습니다. 오로지 다른 건 정규직 앞에 ‘비’자 하나 붙은 것, 그거 하나 빼놓고는 다 똑같습니다.”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사람 차별하는 거라고, 사람은 다 귀하게 났는데, 다 인권을 가지고 있는데 왜 차별하고 무시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던 어머니. 불쌍한 사람을 본 날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다던 태일이의 심성은 그녀를 꼭 닮았다.
전태일은 죽는 순간까지 이소선에게 당부했다.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가 죽어서 그 캄캄한 암흑세계에 작은 창구멍을 하나 낼 테니까… 그 창구멍을 조금씩 넓히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그러면 빛이 보일 거예요.” 그 말을 하는 내내 목에서 피가 절절 끓다가 솟아나왔다고 한다.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내뱉는 자식의 마지막 한마디 한마디를 그녀는 심장에 새겼다.
글자 하나만 없었더라면
병상에서 쓴 황인화의 편지가 점거농성 중인 동료들에게 당도했을 때, 회사는 농성장의 전기를 끊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암흑 속에서 조용히 랜턴과 전화기로 빛 한 줄기를 만들어 분신한 동료의 편지를 끝까지 읽었고, 결국 불법파견 판결을 끌어냈다. 전태일이 죽으며 밝힌 빛 한 줄기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40년 세월 그런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 곁에는 늘 이소선이 있었다. 이제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라 전태일을 이소선의 아들로 불러야 할 만큼.
슬프지도 부담스럽지도 않고, 잔잔하며 때론 유쾌한 이 영화를 보며 즐겁게 이소선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었지만, 글자 하나가 결국 가슴을 무너뜨렸다. “이소선 어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마지막 자막. 그녀의 이름 앞에 조용히 따라와 앉은 ‘고’(故)라는 한 글자. 정규직이란 이름 앞에 붙은 ‘비’라는 한 글자 때문에 몸에 불을 붙였던 황인화처럼, 그 글자 하나가 너무나 사무쳤다.
글자 하나가 이리도 사무치다.
이선옥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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