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길을찾아서] 신군부 독재 헤쳐나갈 ‘역사문제연구소’ 발족 / 이이화

참된 2010. 12. 14. 05:52

[길을찾아서] 신군부 독재 헤쳐나갈 ‘역사문제연구소’ 발족 / 이이화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3

 

한겨레   기사등록 : 2010-12-10 오전 08:47:04

 

 

 

 

 

» 1986년 초반 출범 직후 서울 사직동 체신노조회관에서 열린 월례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회의 장면. 왼쪽부터 필자·윤해동·한상구·박원순·이균영씨의 모습이다.

 

1986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역사
문제연구소(역문연)의 탄생이었고 또 하나는 내 딸 응소가 ‘쉰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역문연이 나의 학문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뿐더러 나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만들어주었다면, 늦둥이 딸은 가정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주었다.

 

아치울 집에서 자유소득자로 글을 쓰거나 한문서당을 하며 지내던 그해 초, 임헌영 선생한테서 역사모임을 준비하고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원경 스님(박헌영의 아들)을 비롯해 임헌영·서중석·이호웅·김성동·천희상·박원순 등이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대중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작은 모임을 꾸려 토론을 하면서 함께 방향을 모색해보자고 뜻을 모았다고 했다.

 

 

특히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법대 1학년 때 학생운동에 연루돼 제적을 당한 뒤 단국대 사학과에 들어가 한국사 공부를 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된 뒤에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꺾지 않았던 그는 애초 역사 공부방을 만들어 대학원생 중심으로 ‘해방 3년사’를 파고들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런 계획이 진행되면서 나도 뒤늦게 김성동·서중석 선생의 추천으로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해 1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서 1박2일로 첫 준비모임을 했다. 이때 10여명이 참석했는데 우리는 두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는 정치가나 민주화 운동가보다는 역사학 전공자들을 조직의 중심에 두자는 것, 둘째는 연구소 형식을 빌려서 한국사를 중심에 두고 인접 분야인 각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조직을 만들되 이름은 ‘역사문제연구소’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역문연의 설립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해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이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 바로 그것이었다.

 

이어 2월21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대성학원 옆에 있는 옥빌딩에서 역사문제연구소 개소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 나가 보니 준비모임 인사들과 더불어 얼굴을 본 적 없는 변호사 몇몇도 참석했다. 뒤늦게 참여한 나는 선참자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다. 특히 박 변호사는 내 책 <허균의 생각>을 잘 읽었다는 말로 인사를 하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서로 격려하며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나누었다. 비밀집회는 아니었지만 맘놓고 모임을 할 수 없는 신군부 독재 시절이어서 보이지 않는 긴장감도 감돌았다.

 

처음 역문연의 소장으로 몇몇 중견 역사학자를 추천했으나 대부분 맡기를 꺼렸다. 영남대 이수인 교수의 제의로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같은 대학의 정석종 교수를 추대하고 임 선생이 부소장을 맡았다. 초대 이사장은 박원순, 자문위원으로는 강만길·김남식·김진균·송건호·유인호·이대근·이만열·이효재·조동걸, 운영위원은 김광식·박원순·반병률·서중석·이균영 그리고 나였다. 실무 간사는 반병률·윤해동·우윤이 맡았다. 박 변호사는 사실 이사장 자리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임시로 맡기로 했다. 화려한 면면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역문연의 첫 사업은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연구현황과 문제점’을 주제로 한 발표 겸 토론회였다. 매월 한차례씩 출판문화회관이나 학술진흥재단이나 방송통신대 등에서 장소를 빌려 열었다. 1년이 지나니 제법 전문적인 영역인데도 청중이 100명 또는 200명 넘게 참석해 열띤 분위기를 조성했다. 너나없이 목마른 시대상황을 탄 것이다. 그런 덕분에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불청객, 신군부의 경찰과 정보기관, 보수학계에서도 예민하게 주시하기 시작했다.

 

주제발표나 토론에는 한국사 분야에서 조동걸·강만길·이만열·조광·서중석·안병욱 등 중견이나 소장들, 북한사 분야에는 김남식·한홍구 등, 정치학 분야에서는 심지연·이종석·김광식 등, 사회경제사 분야에는 김진균·안병직·이대근·이영호 등, 문예사조사 분야에는 임형택·김시업·임헌영·홍정선·김철 등이었다. 대체로 진보학계를 거의 망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 내부적으로도 ‘해방 3년사’ ‘19세기 민중운동사’ ‘근대문학사’ ‘일제시대사’ 등 몇 가지 분야에 걸쳐 세미나 모임을 꾸렸다. 또 독립운동사·북한사 등 몇 분야에 걸친 월례발표회도 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역문연의 초창기는 유럽의 르네상스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기 지식인 모임, 또는 19세기 대한제국시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의 모임을 떠오르게 했다. 이때 참여했던 소장학자들이 오늘날 우리 학계를 이끌고 있다.

 

 

 

 

 

                      이이화 역사학자

 

 

 

 

 

기획연재 : 길을 찾아서

 

 

 

기사등록 : 2010-12-10 오전 08:4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