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길을찾아서] 한길 역사기행서 ‘지리산 저항사’ 강의도 하고 / 이이화

참된 2010. 12. 13. 14:38

[길을찾아서] 한길 역사기행서 ‘지리산 저항사’ 강의도 하고 / 이이화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0

 

한겨레   2010-12-07

 

 

 

 

 

» 영남 동해안 일대에서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유적비 옆에 선 필자.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의 생가 앞에 있다. 1985년 여름부터 한길사에서 주관한 역사기행 강사로 나서 역사인물 발굴을 위해 전국을 누비던 시절이다.

 

1982년
구리 아치울에 정착해 프리랜서 글쟁이로 지낸 10여년간 유유자적한 것만은 아니다. 글 쓰는 틈틈이 기행도 다니고 강연도 하느라 바빴다. 무엇보다 한길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70년대 초중반 동아일보사 출판부에서 일할 때 친분을 쌓은 이종욱 기자가 82년 창간된 월간잡지 <한국인>의 주간을 맡았다. 그는 나를 고정 필자로 삼아 한국사 관련 글을 꾸준히 연재하게 해주었다. 내 글이 독자들에게 호응이 제법 높고, 글만 써서 먹고살아야 하는 나에 대한 동정심도 작용한 듯싶다. 이 잡지는 문고판 형식에 쉽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서 <샘터>와 함께 당시 인기를 끌었다.

 

그즈음 대우에서도 사외 홍보지로 <삶과 꿈>을 월간으로 냈다. 여기에는 <경향신문> 해직기자 출신인 윤덕한이 이사, 같은 해직기자로 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이유환이 편집기자로 있었다. 두 사람은 내게 연재를 의뢰하고 원고료를 최고 수준으로 책정해주었다. 나는 근대사 중심으로 인물 약전을 썼다. 이 잡지는 몇만부 단위로 찍어서 전국에 무료로 배포한 덕분에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월간조선> 등 다른 잡지에도 많은 글을 썼으나 몇 군데 청탁은 거절했다. 당시 정부 지원으로 발행하던 잡지 <정화>와 <새마을>에서도 종종 청탁이 왔지만 나는 한번도 투고를 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을 돕는 홍보지에는 결단코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검인정 고교 교과서 <한문>에 ‘유신’이란 단어를 넣지 않은 의지와 마찬가지로 내 나름의 신념이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김언호 사장이 만든 출판사인 한길사와는 역사유적 답사로 처음 알게 됐다. 76년 은평구 불광동에서 출발한 한길사는 79년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을 펴내 현대사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영업이 잘되어서 안암동에 사옥도 마련한 한길사는 그 시절 책 출판 말고도 여러 가지 ‘돈 안 되는’ 사업도 의욕적으로 벌였다. 사회과학 또는 역사 대중화를 표방하고 정기적으로 시민강좌를 개설하고 역사기행을 다녔으며 민주화운동 관련 세미나 또는 학술 모임도 꾸렸다.

 

특히 나는 85년 8월 시작해 50여회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에 자주 불려나갔다. 기행은 봉건시대나 식민지시대 민중 저항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평민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영덕 영해 일대 신돌석의 유적지를 비롯해 주로 호남의 들판이나 영남의 산악지대가 답사 대상이었다. 기행에는 고은·송기숙·박현채 등이 자주 강사로 나섰고 이철(전 국회의원)·한정숙(당시 서울대 강사) 등이 자주 동행했다. 때로는 버스 2대를 꽉꽉 채울 정도로 참여자가 많았고, 현지에 도착하면 경찰이 미리 나와 우리를 점검하며 감시하기도 했다.

 

특히 지리산 기행이 의미있게 이뤄졌는데, 86년 5월의 기행은 내게 특히 인상이 깊었다. 화엄사에 피아골로 올라가는 여정이었고 강사로는 송기숙·박현채 그리고 내가 참여했다. 김 사장은 97년 써낸 <책의 탄생>에서 “이이화 선생과 박현채 선생의 지리산 강의는 정말 듣기 힘든 명강의로 기록될 것이다. 두 분은 강의 준비를 치밀하게 해와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었다”고 썼다. 특히 내 강의 주제인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는데 좀 길지만 그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 이이화 역사학자

‘지리산은 참으로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그 수많은 얘기를 우리의 작은 머리로 어찌 다 알아낼 수 있으랴. 더욱이 그 숨은 얘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기록해둔 것이라도 무수한 일들을 겪으면서 불에 타거나 휴지로 버려졌기에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 아무튼 이 산은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여느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지리산 속의 절들은 보존된 것이 거의 없다. 저항세력이 절을 거점으로 삼았기에 관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절이 불질러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지 않은 석탑 같은 것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연곡사는 일만 만나면 불 속에서 연기로 사라졌다. 승려들도 저항세력에 끼어들거나 협조를 하였기에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다. 이곳 산사람들의 성분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곧 세상을 피해 들어온 화전민 같은 사람들, 세상에 맞서 약탈을 일삼는 산적들, 봉건체제와 일제 침략에 저항한 변혁세력과 민족투쟁세력들, 끝으로 민족해방을 내걸고 인공 세상을 만들겠다는 빨치산들. 이들의 생활터전이었고 거점이었고 그리고 안식처였다.’

 

 그때 나는 이런 전제를 깔고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리산의 여러 얘기를 담아냈다. 청중들도 아주 진지했다.

 

 

이이화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