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길을찾아서] 리영희·송건호 함께한 병산서원 토론회 ‘성황’ / 이이화

참된 2010. 12. 13. 14:11

[길을찾아서] 리영희·송건호 함께한 병산서원 토론회 ‘성황’ / 이이화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1

 

한겨레   2010-12-08 오전 09:00:54

 

 

 

 

» 1985년 봄부터 시작된 한길사의 역사기행에서 최다 강사로 활약한 필자가 어느해 여름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천서원 답사에서 조선 전기 지리산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던 남명 조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맨오른쪽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모습도 보인다. <책의 공화국에서> 중에서

 

1987년 5월의 지리산 한길역사기행에는 70여명이 참가했는데
경상대 정진상 교수가 산행을 안내했다. 경남 산청에서 천왕봉으로 올라 백무동에서 잠자리를 잡았다. 산을 올라가면서 내 옆에서 함께 걷던 이은성 작가가 소설 <동의보감>의 원고를 한번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분이 학력이 없는 작가여서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가 기행에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초고를 검토하지 못했다. 그나마 책이 출간돼 베스트셀러를 기록해 다행스러웠다.

 

백무동에서 나와 고은 선생이 강의를 했다. 그런데 그만 그날 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기어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이철(국회의원)이 연달아 막걸리를 부어주어 산의 정취와 함께 취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선배인 박현채 선생에게 대들면서 “나는 서자야”라고 연달아 외쳤다. 그러자 박 선배가 괄괄한 성미대로 나를 안아들고 개울에 던지는 시늉을 했고 젊은 단골 참여자들이 밑에서 받으려는 시늉도 했던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 술이 깨서 나가자, 고은 선생은 늘 하는 대로 웃으면서 위로해주었고 박 선배도 내가 사과를 하자 흔쾌하게 받아주었다. 하지만 친분이 두터운 윤구병과 김철은 “무슨 짓이냐”며 나를 나무랐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런 얘기도 추억거리가 되는 것 같다.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기행 때 과일·술 등 간단한 제수를 준비해 와서 지리산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의 부탁으로 내가 제문을 준비했다. 제문의 제목은 전통 방식대로 ‘제지리산혼령문’(祭智異山魂靈文)이라 붙였는데 위에서 말한 내 기행 주제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운문을 섞은 제문 형식을 따른 문장으로 꾸몄다. 200자 원고지 30장이 넘는 분량이었는데 마지막 구절은 이랬다. “오늘 이 백면서생은 목소리를 낮추어 여러 혼령께 작은 위안을 드립니다. 그리고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소소 감응을 비옵나이다. 우리 이웃과 이웃, 친구가 오순도순 흉금을 헤치고 즐겁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주소서. 저 압제를 일삼는 자들을 황급히 잡아가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리소서. 그리고 지금 우리 후인들은 민족분단이라는 엄청난 민족비극을 겪고 있으니 통일을 이룩해 주소서.”(김언호 <책의 탄생> 참조)

 

그때 내가 제법 구슬프게 제문을 읽는 바람에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훗날 서울대 김진균 교수는 내게 서울대 답사반이 지리산 기행을 하면서 낸 자료집에 이 제문도 실려 있다고 일러주면서 “이 선생, 참 묘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게 칭찬에 인색한 김 교수의 덕담이었다.

 

한길사에서는 역사기행에 이어 학술 세미나도 열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작은 규모로 벌였으나 점차 수강생이 늘자 의욕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87년 8월10~12일 2박3일에 걸쳐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대규모 학술토론회를 벌였다. 아마도 바로 직전 6월항쟁의 열기 덕분이었는지 교수·문인·운동권 인사 등 80여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고 주제는 ‘학문과 사상의 민주화 문제’였다.

 

참가자의 면면을 보면, 송건호·이효재·김낙중·리영희·박현채·고은·강만길·김진균·백낙청 등 원로와 노장층, 조정래·박태순·박석무 등 중견층, 유초하·박호성·한정숙 등 소장층으로 각계 인사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공에 따라 세션을 나누어 토론을 벌였다. 나는 한 교수가 진행을 맡은 ‘통일반’에 들었다. 몇 사람이 통일이 곧 올 것이란 주장을 폈으나 나는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통일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 이이화 역사학자
뒤풀이는 냇가 모래밭에서 했는데 모닥불을 켜놓고 술잔을 즐겁게 기울였다. 참가자들은 흥에 겨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질러댔다. 열기가 밤 공기를 가득 메웠다. 밤이 깊어 병산서원 숙소에 돌아온 뒤에도 다시 술판이 벌어졌는데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박태순과 조정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더니 패로 갈라져 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일은 문인들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요, 독재정권 아래에서 쌓인 불만을 풀어보려는 ‘자기 카타르시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