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인터넷상에 있는 글로 글쓴이를 찾아보았는데 오마이뉴스 블로거 늑대별님인거 같았으나 블로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침에 범능 스님과의 통화가 되어 오후 5시 반 대진정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5시 25분 쯤 도착하니 스님은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어제의 그 보살님이 스님이 지금 오시는 중이라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5시 30분 쯤 되자 ENG 카메라를 맨 어떤 젊은 사람이 문앞을 기웃거리다가 날보고 말을건다. "스님 만나러 오셨어요?" 하더니 "오늘은 왜 LP 판 안 가져 오셨어요? "라고 또 묻는다.
그는 자신을 대전 MBC 이은표 PD라고 소개했다. 내가 가진 지구 레코드에서 나온 그 판에서 녹음을 뜰 것이 있다며 내일 방송국으로 갖고 와 줬으면 했다. PD라는 사람과 그를 따라온 아가씨와 함께 우리는 윗층에 있는 스님의 거처로 올라갔다.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내게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떻게 범능 스님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셨지요?"
아가씨의 핸드폰에서 금속성의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렸다. 내 혈관들 속으로 일제히 금속성 부딪히는 소리가 몰려왔다. 더는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만 다시 하자고 조른다.
"우리 세대는 전혀 국악의 세례를 받지 못 했습니다.그러다가 80년대 들어 우리 음악에 눈 뜨기 시작할 무렵 국악을 접목한 스님의 민중음악을 듣고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저벅저벅 올라왔다.
"어제 오셨던 분이세요?""아니,나는 다 없애버린 판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다니, 참"
자리에 앉았다. 스님과 잠시 환담을 나눴다.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아셨습니까?"
나는 신명님(국악 사이트 운영자)과 내가 인사동 <시인학교>에서 스님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전말과 전남대 국악과 후배인 신명님이 불교 사이트를 검색하다 스님이 계신 곳을 알고나서 내게 메일로 알려준 과정을 들려 주었다. "신명님이 말입니까?" 놀랍게도 범능 스님은 신명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깜짝 놀라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다. "제 후배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스님은 신명님과 나의 관계를 물었고 나는 국악 사이트 <신명나는 세상>과 나의 '굳건한 공조'에 대해 설명했다. "우린 한 번 공조하면 끝까지 합니다.결정적인 상황에서 공조를 깨뜨리는 일은 안 합니다. 하하하." 미리 준비해간 10개의 질문지를 꺼내놓고 스님과의 대담을 시작했다.
_전남대 국악과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지요?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과 서양음악에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청년회 <우리 문화 선교단>이라는 데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풍물도 배우고 탈춤도 배우고 하다가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학대학을 갈려고 했지만 차츰 우리 음악으로 가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판소리나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질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말입니다. 피리를 전공하면 우선 악기 값이 싸지 않습니까. 또 주변에 피리 전공한 분이 있어 피리를선택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피리는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기악이나 성악 전공자가 창작도 하지 않더냐. 피리는 그저 기본일 뿐이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_저는 군대를 늦게 간 탓에 전방에서 5.18을 겪었습니다만 스님은 어디에서 5.18을 겪었습니까? 그때의 경험이 이후 스님의 노래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전 그때 스무살이었습니다. 화순에서 광주로 출퇴근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아시아 자동차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화순에서 시위대 차량에 타고 너릿재를 넘어와서 시위에 참가했지요. 영향이야 뭐 그 시대를 산 사람이면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후 스님은 1985년 25살이란 늦은 나이로 전남대 국악과에 입학하여 1989년 졸업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빠듯하고 신산하게 생을 꾸려 나왔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_스님이 만든 노래패 <친구>는 지금은 해체된 걸로 압니다. 언제 만들었으며 소위 요즘 말하는 문화 게릴라로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요?
노래패 <친구>는 1987년에 만들었습니다. 시위 현장,파업현장이고 안 간 데 없습니다. 정기 공연도 했구요. 해체 시기는 자세힌 알 수 없지만 아마 98년도였을 겁니다.
1989년이었던가. 조선대생 이철규가 광주 제3 수원지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규탄하기 위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에 갔을 때였다. 밤 12시 넘어 전남대 병원 후문 큰 길에 주저 앉아 "5.18주점" 이 제공한 소주를 마시며 노래패 <친구>의 노래를 들었다.
<광주 출전가>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무엇이 두려우랴 출전하여라./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나아가 나아가 목숨을 걸고/출전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게 하는 그런 밤이었다. <친구>가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5월 광주를 알리는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을까를 생각하니 마냥 아쉽기만 하다.
_제가 정세현이란 민중가요 가수를 알게된 게 아마 극단 <신명>이 공연한 오월극 <일어서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꽃아 꽃아/ 아들꽃아/오월의 꽃아/꽃아 꽃아 /아들 꽃아/ 다시 피어나라....(후략)이렇게 시작되는 <꽃아 꽃아 >를 들엇습니다. 극단 <신명>이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_무형문화재 제 51호 남도 들노래 보유자이셨던 고 조공례씨에게서 "남도 들노래" 를 사사받으셨더군요.
89년 봄엔가 진도에 가서 햇수론 2년, 그러니까 만 1년 쯤 자취를 하면서 배웠습니다. 날마다 집에 가서 남도 들노래 뿐 아니라 토속민요 ,만가(상여소리)등 여러가지를 배웠지요.
_1997년 4월 조공례씨께서 타계하셨을 때 가셨는지요?
산문에 든 사람인지라 연락을 받지 못해 가지 못했습니다.
_입산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오월 광주'가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독실한 불자이신 부모님을 따르는 예정된 길이었습니까? 혹은 이 두 가지가 상호 영향을 준 것입니까?
무엇보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였습니다. 집안의 불교적 영향도 있었구요. 시대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건 작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_지금은 몸이 좋아지셨나요?
전 보다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_출가는 언제하셨으며 어느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하셨나요?
1993년 수덕사로 출가하여 설정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했습니다.
_어제 밤 이번에 내신 음반을 들어봤습니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전에 내신 음반에 비해 너무 관조적이고 침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번 음반의 특징을 말씀해 주시지요.
침잠이란 말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음악이 힘이 없다 그럽디다. 1집 <오월의 꽃>은 옛날 녹음이 너무 튀어서 다시 녹음한거구요, 2집 <먼 산>은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2집만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정만 두고 얘기하자면 침잠이다 뭐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맛이 있어야 해요.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음악을 생각했습니다. 고요하게, 허망한 대상에 빠지지 않고 관조하는 그런 음악. 사실 전에 낸 음반들이 너무 튄다해서 다시 낸 것 입니다. 삶의 원만함을 얘기하고 싶었고 대중에게 정화된 느낌을 안겨주고 싶었습니다.
스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침에 들으니 괜찮았습니다."
_이번에 오랜 침묵을 깨고 대중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92년도에 앨범을 내고 93년도에 출가했으니 9년만이군요. 불교적 입장에서 대중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내용을 얘기하고 싶었지요. 열정을 넘어서 자기의 내면을 관조해 보는게 필요합니다.
_올해 광주 공연이 언제였지요?
공연은 무슨 공연입니까.그냥 음반 출반 기념회였지요. 5월이었던가 4월 2째 주였던가 기억도 안나네요.
_국악인을 포함해서 외국의 민중가요 가수라든가 좋아하는 음악인을 얘기해 주시지요.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인은 없습니다. 다 좋거든요. 저는 음악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낼 것이냐? 이것만 고민 합니다. 결국에는 내 방식으로 풀어내지요. 그래서 서양음악이든 국악이든 북한 가요든 가리지 않습니다. 북한가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 바로 <꽃아 꽃아><광주 출전가>같은 겁니다.
_끝으로 앞으로의 음악적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전 모든 것을 수행의 일부로 봅니다. 음악도 결국 버려야할 자리다. 음악도 지극하면 도의 경지에 이르는 법입니다. 결국 어떤 대상이든 종교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수행의 요처지요. 집착은 안 됩니다. 아마도 앞으로 나이들었을 때 그때는 정 힘이 없으면 기악으로라도 노래할 겁니다. 아니면 편곡을 하든지.
스님과의 대담은 약 1시간이 걸렸다. 4층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왔다. 스님에게 슬쩍 물었다.
"스님은 언제 인터넷 배웠습니까?" "작년 9월에요.도심에서 포교하려면 뭐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대진정사 합창단 포스터가 붙어있다. "신도 수가 꽤 많은 모양이지요?' "신도들이 음악을 좋아해서 합창단이 없으면 절에 나오지 않겠다고 겁주는 분도 있습니다."
도로에 선 채 스님과 작별했다. 뭔가 빠트린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생각나질 않는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대진정사로 전화를 걸었다. 예불 중인 범능스님 대신 백련사에 있다는 범능 스님의 아우 선용 스님이 받았다.
"스님, 범능 스님의 학비는 누가 대셨지요?" "제가 외항선 통신사로 일해서 보탰습니다."
가난한 시대에 형제는 그렇게 힘을 보태면서 눈앞의 강고한 현실을 타개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닌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거름이 되기를 거부하는 삶의 진정성의 결여이다. 약간은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범능 스님의 피리 가락이 구비치고 구비쳐 어느 누리에선가 몽환적인 달빛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삶이 가혹할수록 노래는 더욱 더 마음을 홍건히 적시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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