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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앨범정보
| 앨범 수록곡 클릭하면 해당곡으로 이동합니다. 앞면 01. 말... 시작 02. 이 산하에 03. 타는 목마름으로 04. 솔아 푸르른 솔아 05. 말... 김경주 소개 김경주님은 화가입니다. 김남주님의 시 '노래'에 곡을 붙힌 분이기도 합니다. 아래 8번 곡이지요. 지금의 소개는 그냥 소개일 뿐 다음곡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06. 어머니의 손 07. 말... 소리모아 소개 08. 죽창가 09. 누가 저 거미줄의 나비를 구할까 10. 군중의 함성 11. 말... 민요곡 뒷면 01. 새벽길 02. 작업장 타령 03.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04. 민중의 아버지 05. 임을 위한 행진곡 06. 보람된 생활 07. 오월의 노래 1 08. 친구 2 09. 그날이 오면 10. 벗이여 해방이 온다 감상용 파일이 21 개 등록되어 있습니다. | ||
앨범 리뷰 첫번째 민중의 노래 발표회 실황입니다 |
광주의 노래 세상을 바꿨다 | ||
가수 김원중씨, 80년 거리서 불렸던 저항가요 해석 | ||
채정희 goodi@gjdream.com 광주드림 | ||
기사 게재일 : 2007-05-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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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그 치열했던 현장, 충장로·금남로 그리고 광주의 곳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던 노래들이 있었다.
저항가요(민중가요)라는 이름의 그 곡조들은 외로움을 이기고, 울분을 달래고, 총칼에 맞설 힘을 줬다. 오월 광주, 거리 곳곳에서 불려졌던 노래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17일 광주YWCA가 진행한 시민포럼인데, `노래에 담긴 5·18정신’이라는 제목으로였다.
민중가수 김원중씨가 설명하고, 노래하며 뜻깊은 자리를 이끌었다. 이날 이 자리에 참석한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은 2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했다. 79년 유신의 종말로 맞은 `민주화의 봄’은 군부의 야욕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위태로움에 빠졌다. 연일 시위가 벌어지면서 거리는 시민들과 노래들로 넘쳤다. 80년 이전엔 민중가요가 없었다. “이때 불렸던 노래는 양희은의 아침이슬, 그리고 애국가가 주였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 애국가를 거리에서 목놓아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관료화·공식화되면서 무게 있는 의식곡으로 전락, 배척받는 현재와 비교된다. 80년 이전엔 `아침이슬’ `애국가’ 불러 이른바 저항가요는 80년 오월을 겪은 뒤 태동했다. 그 중심에 김종률이 있었다. 김씨는 마당극패 `광대’를 계승한 노래패 `갈릴리’ 멤버였다. 81년 김종률은 광주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손수 창작한 저항가요를 무대에 올린 것인데, 군부독재 서슬퍼런 시절 상상키 어려운 시도였다. “김종률이 대학가요제 출신이에요. 같은 출신인 노사연·하성관 등을 초대했죠. 경찰들은 순수 음악행사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검열을 무력화시킨 작곡발표회는 `검은 리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나는 검은 리본을 달았지. 당신은 하얀 수의를 입었지.…>(중략) 라는 가사의 노래들이 거침없이 불려졌다. `오월에 산화해간 영령들께 이 음악을 바친다’는 대담한 무대가 가능했던 힘은 여러 곳에 있었다. 김민기가 연출을 맡았고, 황석영은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것. 81년 김종률씨 `검은 리본’ 발표회로 시동 큰 `사고’를 친 광대패 출신 무리들은 두번째 `작당’에 들어갔다. 망월동 묘지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 이들은 영혼결혼식을 명분으로 망월동에 모였다. 시민군 윤상원과 박기순의 혼례였다. 경찰도 막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황석영의 집을 아지트삼아 준비해온 거사가 실행된 것이다. 황석영의 집은 지금은 문예회관이 들어선 운암동. 이 집에서 `빛의 결혼식’이라는 이름의 테이프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저항가요 1호 `님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 등이 이 테이프에 담겼다. “백기완 글, 김종률 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류가 있습니다.” 김원중씨는 “`님을 위한 행진곡’ 작사자는 황석영”이라고 말했다.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등 몇구절서 백기완의 글을 차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황씨가 밤새워 글을 썼고 김종률이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광주지역 문화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젠 바로잡을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몇날을 새워 카세트로 녹음된 테이프는 500여 개. “이 테이프들은 광주가 아닌 서울 대학가에 뿌려졌고 그 곡 중 `님을 위한 행진곡’은 모든 대학으로, 그리고 민중의 아픔이 있는 세계의 모든 현장에서 불리게 된 자랑스런 광주의 작품이 됐다”고 설명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작사자는 황석영 광주의 저항가요는 정세현(범능스님)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통해 또한번 도약기를 맞았다. `갈릴리’의 문화활동가 오정묵을 중심으로 `광주여 오월이여’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80년 오월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 말로만 이뤄진 다큐물에 저항가요가 삽입되는데, `광주출전가’ `친구2’ `어두운 죽음의 시대’ `전진하는 오월’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요를 불렀던 이가 정세현·배은경 등이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노래패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름이 `친구’였다. 학교밖 노래패로는 전국 최초로 창단된 `친구’는 87년 광주YWCA에서 발표회 겸 공연을 가졌다. 공연의 주제는 `타는 목마름으로’. 배은경이 불렀던 같은 제목의 노래는 유신에 저항한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것. 오월 광주와 딱히 연관은 없었지만 곡조가 심금을 울리면서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친구’의 출연은 대학내 문화동아리 태동의 촉매제가 됐다. 이후 노래패·미술패·영상패·연극패 등이 속속 태어났다. 정세현씨 `광주출전가’ 등 발표 김원중은 83년 김종률·박문옥·김정식 등 당대 내로라하는 광주의 노래꾼들과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에 참여했다. 당시 김씨가 불렀던 노래가 바위섬. 84년 전국방송을 타면서 하루아침에 가수가 됐노라고 했다. “바위섬에서 오월 광주를 느끼시나요?” 이 곡을 만든 배창희씨는 “당시 외로운 섬, 고립된 섬인 광주를 바위섬에 비유했다”는 것이 김씨의 전언이다. `노래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김원중씨는 “오월의 완성은 통일”이라면서 그 염원을 담은 자신의 곡 `직녀에게’를 부르며 자리를 마쳤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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