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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에 깃든 ‘식민철학’ 그림자

참된 2009. 3. 5. 02:28

한국사상에 깃든 ‘식민철학’ 그림자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겨레   입력 2005.11.18 18:42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 유학(儒學)을 대표하는 학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꼽는다. 1천원권과 5천원권 화폐에도 그 '상식'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유학을 '주리' '주기'로 단순 구분한 일제 어용학자의 주장과 잇닿아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카하시 도오루(1878~1967)의 발자국이 우리의 지갑 안에 접혀 있다.

 

 

 

 

 

다카하시는 한국 사상을 처음으로 근대적 시각에서 연구한 학자다. 유교를 비롯해 불교, 금석, 서지, 민요, 민속, 한글 등 거의 모든 한국의 사상적·문화적 유산을 섭렵했다. 그가 조선총독부 문화정책의 기틀을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유학 대표하는 퇴계·율곡
주리파·주기파로 단순화해
당파싸움·국망 원인 몰아
이제라도 비판적 연구 통해
주체적 한국철학 출발점 삼아야


그는 "조선의 사상과 신앙사는 모두 중국의 사상과 신앙사에 종속된다"며 조선 사상의 특성으로 △옛 사상에만 머무는 고착성 △창조적 사상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비독립성을 꼽았다. 조선인의 또다른 특징으로 당파성·형식존중·문약성·심미관념의 결핍·공사의 혼동·낙천적 성격 등을 지적했다. 일제 말기에는 '황도유학(皇道儒學)'을 주창했다.

반년간지 <
오늘의 동양사상 > 이 최근호에서 다카하시 도오루를 정면으로 다뤘다. 8편의 논문을 통해 아직도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카하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한국 성리학사를 주리파·주기파·절충파(농암문파)로 분류하는 삼분법이 지금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답습되고 있다."(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몇몇 후학들이 이를 반성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일본과 남북의 학자 대부분이 (다카하시의 방법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조선 주자학의 요체를 표현하는 데 적절치 못한 '주리'와 '주기'라는 용어를 어떤 의혹도 없이 사용하고 있다."(이형성 전주대 강사)

이상호 계명대 교수는 중등 윤리 교과서에서 다카하시의 흔적을 건져 올렸다. "초기 윤리 교과서는 한국 주자학을 파쟁과 당파의 원인이자 국망의 원인으로 바라봤고, 70년대 말까지는 아예 한국 철학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며 "이는 토착화된 우리 사상에 대한 전반적 회의를 반영하는 것이자 다카하시의 영향력이 개입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도 여전히 "내용적 측면에서는 다카하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영향력은 왜 문제인가. 이성환 계명대 교수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민족적 에토스는 다카하시의 논리에 의해 '화석화'됐다"고 평가했다. 최영성 교수는 "(다카하시의 연구는)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에 치명타를 가하려는 저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사 왜곡보다 한국유교 왜곡이 더 효과적이고 근본적"이라고 지적했다.

다카하시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다카하시를 비판해왔다. 비판논리의 핵심은 다카하시가 한국 유학을 기계적으로 단순 구분했다는 데 모인다. 이형성 강사는 "조선 주자학자들이 방법론적으로 사용한 주리·주기를 차용해 이황과 이이에 연결시키고 이를 조선 주자학의 전 범주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조선 주자학의 독창성을 무시하고,
양명학과 실학을 경시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러나 식민사학 극복을 토대로 한국사학을 새롭게 정초했던 역사학계와 비교하자면, 철학계의 노력은 지지부진하다. 다카하시의 학문적 성취가 간단히 극복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오늘의 동양사상 > 은 '다카하시 극복'의 새로운 길도 모색했다. 김기주 계명대 강사는 "다카하시의 전체 틀을 무너뜨리고 '인성론'을 중심으로 조선 유학사의 새로운 계통도를 그리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고희탁 글로벌컬쳐연구소 연구원은 "자기만족적 변명보다는 다카하시라는 '타자'의 눈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타자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기주 강사의 표현을 빌자면 다카하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주체적 한국 철학의 출발점"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평생 조선학 몰두…언문 철자법 제정에도 참여

다카하시 도오루는 누구

한일합병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조선을 연구했다. 다카하시는 그 첫 세대를 대표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불러들인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1903년 대한제국 초청으로 관립중학교 교사에 부임하면서 다카하시는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일본 패망 때까지 조선에 남았다.

한일합병 직후, 조선총독부의 '촉탁 학자'로 활동했던 그가 삼남지방 유생들의 동향을 살피다 한국 성리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총독부의 명을 받아 의병운동에 뛰어든 유생들을 '살폈던' 다카하시는 영남 의병들의 책상 위에 한결같이 <
퇴계집 > 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학문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학'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그가 한글 철자법 제정에 참여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다카하시는 1912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한글 철자법 위원으로 참여했다. 1913년에는 위암 장지연과 '공자교와 유학'이라는 주제로 지상(紙上)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에 대한 그의 연구는 < 조선유학대관 > (1925)과 < 이조유학사에 있어서 주리파·주기파의 발달 > (1929) 등의 논문으로 대표된다. < 조선유학대관 > 은 통사적 가치가 높고 < …주리파·주기파의 발달 > 은 조선 유학의 근대적 구분법을 정초한 저술이다. 이밖에도 조선의 고문서와 규장각 도서를 정리한 < 조선도서해제 > (1911), 조선 불교사를 집대성한 < 이조불교(李朝佛敎) > (1929) 등도 썼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대학에서 한국 사상사를 강의했고, 1950년에는 '조선학회'를 만들었다. 국내에는 그의 주요 논문을 모아 펴낸 <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유학사 > (예문서원·2001년), < 조선의 유학 > (소나무·1999년) 등의 책이 나와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다카하시 도오루 연표

1878년 일본
니가타현 출생

1902년 일본 동경제국대 한문학과 졸업. 조선학 전공

1903년 대한제국 관립중학교 교사로 초빙

1910년 조선총독부 종교조사촉탁에 임명

1911년 조선총독부 조선도서조사촉탁에 임명.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수

1912년 조선연구회 초대 평의원. 조선총독부 한글철자법 위원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장

1919년 동경제국대에서 < 조선의 교화와 교정 >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1921년 조선 총독부 시학관에 임명

1923년 경성제국대 창립위원회 간사

1926년 경성제국대 법문학부 교수. 조선어문학 1강좌(조선유학사) 담당

1939년 경성제국대 정년퇴임

1940년 경성사립혜화전문학교 교장. 조선문화공로훈장 수상

1944년 조선유도(儒道)연합회 부회장

1945년 일본 귀환

1950년 일본 텐리대 교수. 한국사상사 등 강의. 조선학회 부회장 취임.

196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