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목소리로 늘 집회 현장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노동계의 최민수 박준 동지. 적의 심장을 뚫을 듯한 강한 눈빛과 파르르 떨리도록 꽉 쥔 주먹으로 소나기처럼 집회 분위기를 휩쓸어 버리는 몸짓 선언. 많은 조합원들이 한번쯤 술 한잔 마시며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들은 우리 노동자들의 문화에 대해서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고, 전문 문예일꾼으로서 어떤 전망들을 가지고 있는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어떻게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눈 뒤 내가 조합원들이 이들을 왜 만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스스로 왜 만나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노동자 문화는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겠지요”
민주적 기관운영을 위해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소아마비정립회관 투쟁에 몸짓 선언이 연대한 적이 있다.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는데 우비도 입지 않고 비를 맞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렇게 하다가 오래 못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격렬하게 율동을 하는 몸짓 선언과 문예 일꾼 가운데서는 연배가 꽤 되는 박준 동지의 건강이 궁금했다.
정은진 저희가 그 날 집회할 때는 순서가 앞이어서 그렇게 했는데 조합원들이랑 같이 있다가 (순서가 되면 율동을 합니다) 문화패들이 보통 그렇게 해요. 따로 대기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우비는 몸 푸는데 찢어질까 봐 안 입은 거구요. 얘(김정희), 침맞았데요, 오른 쪽이 다 아파가지고 얼굴에 침맞고. 저도 부황뜨고 대구지하철 내려가기 전에. 선배(박현욱)는 얼마 전에 온 몸에서 피 뽑았잖아요.
박현욱 여름 더울 때 딱 공연을 하고 나오면 당분간은 거의 패닉상태예요. 사람들이 막 “고생하셨어요”하는 말이 공명처럼 울리고 하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몸짓 선언이 하는 동작들이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좋은 동작들이라.
박 준 현장에서 민중의 가수랍시고 소개를 받을 때 값있게 해야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농담 삼아 “민중가수가 쪽팔리게 립싱크 할 수는 없잖습니까”라고 얘기해요. 정말로 한계가 느껴질 때는 또 뽑아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건강 좋아요. 오늘 자전거 타고 왔잖아요.
박현욱 5년 전에 시작할 때 5년 후에 이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시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요. 그런데 집회 현장에서 싸움이 붙거나 그러면 동지들이 말리고 그러세요. “몸 지켜야지”그러면서. 그렇게 지켜서 5년 더하는 거 보다는…. 몸을 관리하는 건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과 별개로 해야죠.
김건태 몸짓 선언은 제가 친하고 잘 아니까. 중간에 노래사이에 맨트를 길게 하면 ‘아, 제네 지금 엄청나게 힘들구나’ 생각하죠. 사람들이 “뭐 말을 그렇게 많이 해” 그러는데. 그런 걸 이해 해줘야 되요.
박현욱 또 하나가 저희가 가지고 있는 율동이라는 매체가 한계가 있는데. 준이형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조합원들 사이에) 들어가서 같이 호흡하고 그러는 부분이 없어요. 딱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지켜봐야 되는 형태거든요. 문선은 공연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다른 형태. 아예 길게 하면서 같이 배우고 그러지 않는 이상 길어야 세곡이거든요. 그리고 말을 하면서 호흡이 돌아오게끔. 호흡이 어느 단계까지 와야 다음 곡을 느낌 있게 나갈 수 있으니까 그걸 기다리는 거예요.
박 준 현욱 동지가 얘기한 것처럼 같이 호흡하고 싶은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흘러간 노동가요도 있고 욕지거리도 다시 하는 이유도 현장에서 토해낼 수 있는 거를 만드는 것은 문예일꾼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귀 옆에 해드셋이라는 걸 차게 된 것도 참 용기를 내서 하게 된 건데 한통계약직 때, 인도에 한번 모이면 7,8백명 정도 모였어요. 음향이 좋지 않았고. 7, 8백 인도에 딱 앉아서 맨 앞에 삐죽이 서서 노래한다는 게 싫어지는 거예요. 음향이 열악한데 (집회 대오) 반정도 지나가면 안 들려요. (해드셋하면) 줄이 없으니까 옆에 가서 같이 호흡하는 게 낫고. 짧고 굵게 얘기함에도 불구하고 몸짓하는 사람은 몸짓이나 하고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나 하지…. 좀 그렇죠?
박현욱 그런 말은 사실은 복합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만 하고 율동하는 사람은 율동이나 하지” 자본주의 문화에서 가수를 돈을 주고 불러가지고 즐거움을 찾는 이런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 문화도 그렇게 이해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노동자 문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는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저희도 그 사슬에서 못 벗어나는데. 우리가 앞에서 율동하는 걸 보는 조합원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대상화시키고 있구나 느껴요. 노동자 문화 그러면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고 향유하고 같이 투쟁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건데 자꾸 자꾸 자본주의 문화처럼 그냥 보고 즐기고 시간 떼워주고. 노동자 집회 때 갈수록 현장문선대가 줄어들고. 집회보다는 행사라고 표현하는 노동조합도 많잖아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해갈지가 우리가 다같이 해결해야 될 과제라고 생각해요.
김정희 예전에는 자유발언대나 이런 게 많이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제가 늘 경험한 집회는 정해진 연사에 정해진 패. 집회 자체도 그렇게 되고 있는 거 같아요.
김건태 난 (이 자리에서) 나가야 될 것 같아. (내가) 요즈음 집회판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주범인데.(모두 웃음)
“더 힘든 현장을 알리는 것도 우리의 역할”
박 준 요즈음 노동자들한테 문화가 있나? 얘기하기 되게 어렵다. 쓸쓸해요 척박하고 내가 볼 때는. 쳐지는 얘길 수도 있겠지만. 너무 지쳐있는데 무슨 노래를 할까. 예전에는 노동자 문화가 굉장히 많았잖아요. 우선 요즈음은 동지애가 없는 것 같아요. 함께 죽고 함께 살고 라는 의미도 느끼지 못하겠고. 문화하는 사람들끼리만의 안위적인 것을 나는 참 많이 보거든요. 민족극 한마당이라든가 가서 보면 그 사람들만 나와 있어요.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노력을 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박현욱 그 전에는 있었다. 왜 없어졌을까 하셨는데. 없다기보다 안 보인다고 말하고 싶어요. 노동자 문화가 없다는 것은 노동자 집단의 변별적 특성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노동자 집단의 정체성이 흐리기 때문에 문화도 안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노동자 내부의 계급성과 변혁 지향적인 자기 특성 자체가 희석되거나…. 예전에는 노동운동이 그 특성을 분명히 하고 전투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갈수록 노동자 계급성 자체가 국가, 사회, 시민 틀거리 속에서 모호해지고 스스로가 그렇게 되는 구조 속에서 특히 더 안 보이는 게 아닌가.
박 준 큰 공장 가면 현장 문화패들이 있잖아요. 풍물패든 노래패든. 예전에는 항상 그들이(문화패) 움직이면 조합원들이 같이 움직이고 아울러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격리돼 있는 거 같아요. 철거민들이 한 참 싸우고 나면 전경 애들을 불러요. “야 끝났으니까 니들도 막걸리 한잔해라” 이것이 서민, 민중의 문화였어요. 노동자들도 그랬어요. IMF라는 것이 동지애마저도 다 가져갔구나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수도 없이 현장을 다니기 때문에 조금 더 힘든 현장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라면 해야한다는 거죠. 그 때 상황과 지금의 상황과 단절된 부분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좀 만들어내야 되고. 그런데 현장에 가보면 그나마 있는 풍물패는 풍물만 치고 조합원들은 가만히들 있고. 아무리 만들려고 해도 잘 안 보여요.
정은진 보통 현장 문예패가 꾸려져서 강습을 들어가면 처음에는 경쟁적이에요. 내 동작이 더 예뻐야되고 내가 튀어야 되고 내가 더 앞에 서야되고. 그런데 매주 만나고 강습을 하고 연대를 다니다보면 그런 게 없어져요. 공동체 문화라고 얘기해야되나. 대체적으로 투쟁 사업장에 많이 결합하고 연대한 동지들일수록 공동체 문화가 많이 형성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을 같이 만들어나가고 찾아나가고 그런 부분들이 그나마 좀 있지 않을까.
김건태 노동자 문화가 없어졌다는 게 스스로 굉장히 괴로운 얘기에요.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노동운동과 함께 노동자들 사이에 그들이 필요해서 만들어졌고 살아 숨쉈던 문화들이 90년대 올라와서 상대적인 물질적 풍요 속에서 많이 사라졌죠. 웬만한 조합원들 다 차 끌고 다니고, 차라는 게 노동자 분절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사람 한사람을 철저히 따로 따로 찢어가지고 만들어내는 시스템들. 상대적으로 다양해진 대중문화들이 더욱 힘들게 만들고. 촛불집회 나오는 걸 보면서 가능성도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뭔가 부족하고. 분절화되고 파편화 되고 일상적인 구조조정이라든가 실질적으로 현장에서는 아주 퍽퍽할 것 같아요.
박현욱 강습을 들어가면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노동자 정체성인데. 저는 사소한 것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지라는 표현이 굉장한 문화적 코드거든요. 동지라고 하면 신생노조에서는 막 웃어요.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 동지가 회사가면 상하 수직관계인데 노동조합 해보니까 머리 희끗희끗한 연맹위원장도 동지라고 그러더라. 이런 문화적 코드를 접하는 거거든요. 요즈음에는 자꾸 집회를 행사라고 해요. 집회하면 꼭 격려사, 내외빈 소개가 들어가요. 누가 누구를 겪려하냐. 또 내외빈. 오는 사람들이 손님이 아니잖아요. 연대 투쟁하는 거지. 말 바꾼다고 바뀌냐 그러는데 저는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런 개념들을 노동자 문화 개념으로 대체해 나가는 걸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문 문예 활동을 하게 되기까지
박 준 현장에서 전문 문예활동하기 전에는 80년부터 명동성당 청년회 활동을 해왔어요. 그 시기 때 살벌했지요. 명동에서 88년 조성만이라고 할복 투신한 후배도 있었고. 87년까지 6.29 속이구 전까지 명동은 굉장히 치열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명동성당 옆에서 거리 공연도 하게되고. 그러다 김호철 선배 만나게 되고 제안도 받고.
김건태 들리는 소문에 심장병 어린이 돕기 하신다고…. “수와 진” 전에.
박 준 85년에 시작한 거예요. 후배 병문안 갔다가 말로만 듣던 심장병 아이들 만났고. 이 녀석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5살짜리였고. 괜히 발걸음이 다가갔고 이름이 뭐냐, 뭐 갖고 싶냐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숨 안 쉬고 항상 밝게 웃고 있는 곰인형을 갖고 싶다는 거예요. 심장병도 100여가지가 넘는데 그 중에 제일 어려운 수술, 3차 수술을 겪어야 완전히 치유가 될 수 있는데 대부분 2차, 3차 수술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많아요. 이 녀석 2차 수술 받고, 성탄절 잔치를 11월에 했어요. 곰인형 못 사줄까봐. 성탄 잔치하고 나서 성탄절 오기 전에 먼저 하늘나라 갔어요. 왜 겨울만 불우한 이웃이 있습니까. 왜 연례행사처럼 해야합니까. (심장병 어린이 돕기 거리 공연을 하면서) 그렇게 지내다가 99년도에 집사람하고 김호철 선배가 제안을 하고. 쉽지 않게 결정했어요. 명동에서 20년 세월을 있었어요. 저한테는 제2의 고향이죠. 민주노총 공식 음반을 처음 제안 받은 건 아닌데. 개인 음반 또다시 앞으로 이후에, 금신이 노래한 이후에 현장에서 다시금 IMF이후에 빡시게 불러야할 될 노래들이 요구되는 것 같다는 제안을 받고 이러면서 현장에 들어오게 됐어요.
박현욱 명동 별곡 책하나 내야겠네.
박 준 권영길 대표 민주노총 마지막 할 때 명동에 텐트치고 그럴 때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명동 안에서. 거기서 집회만 있으면 모든 전기와 전화를 다 따줬어요. 한통 싸울 때도 그렇고 그런 역할 할 수 있는 거에 대한 고마움. 워낙 살벌했으니까. 그런데 거기를 접었죠. 현장 다니면서 할 수 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현장 들어와서 내가 모르고 내가 기대했던 것들이 깨지는 걸 많이 봤고, 시간이 갈수록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허탈한 게 많아요. 노래 몇 곡 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얘기해요. 노래 몇 곡 하러 온 놈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하고 싶으니까 땡기면 동지들도 같이 땡겨주고 집행간부들 다리 꼬고 있지 말고 같이 호흡하고. 어떨 때는 앞에만 있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하자 그런 얘기도 하고 좀 싫은 얘기도 많이 해요. 요즈음은.
박현욱 저희는 몸짓 선언이 아니라 선언이라는 팀이거든요. “노동예술단 선언”이라고. 91년도부터 노래 선언팀이 활동하고 있었고. 제가 제대하고 지금 문화적인 코드가 많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는 노래나 풍물이 나름대로 노동운동 속에서 기반을 잡았던 반면에 율동 활동인자가 없다 그래서 처음에 저는 그걸 가지고 어떻게 운동을 하냐 그랬었어요. 노래선언 선배들 제안으로 현장에 강습을 99년부터 들어갔어요. 원래 몸짓 선언도 공연보다는 현장 강습하면서 현장 율동패 견인하고 내용을 공급하는 활동가들로 고민됐던 거고 여러 계기를 겪으면서 발빠르게 문선하는 팀도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다가 지금 정은진 동지말고 김정희, 이종희 두 동지하고 현장에서 만나면서 의기투합이 돼 가지고 몸짓 선언을 결성하면서 공연을 시작했죠. 그리고 노동예술단 선언이라는 형태로 다시 조직을 정비해서 띄우자 했던 게 1999년 10월 말이었어요. 그리고 2001년부터 정은진 동지가 결합했구요.
투쟁 이야기
박 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종로구청 앞에서 상용직 노동자 처음 모인 자린데. 상용직, 다 알잖아요. 나이도 드시고. 그 때 이 양반들 고개를 어떻게 하면 들 수 있을까. 투쟁적인 노래만이 투쟁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그네 설움을 처음 불렀어요. 내 생각에 문화를 하는 사람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분들과 같이 호흡하고 싶은데 그 사연은 그 노래에 담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나서 했어요. 그 분들 고개가 들리면서 박수치면서. 이게 하나가 됐다는 거예요. 그 다음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대우 1,754명 깨질 때, 담 넘어 들어가서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는데 한 간부 동지가 울면서 그런 얘길 해요. “박준 선배님 민중가요 신물이 납니다. 오늘 하루종일 뽕짝만 불러주면 안될까요?” “접목해서 합시다” 그 얘기가 팍팍 와닿죠 마음에. 그래서 그 때 나그네 설움을 불렀고. 나그네 설움 가사의 의미보다는 힘들 때 달랠 수 있는 것들. 과정이니까. 생각하면 끝도 없죠. 제일 맘에 남는 것은 상용직 나이 드신 선배들, 슬슬 고개 들려지면서 박수칠 때 그때처럼 마음이 뭉클했을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잊을 수가 없어요.
김정희 저는 롯데호텔 파업할 때하고 작년에 리베라 투쟁이 생각나는데요. 둘다 제가 강습 들어갔던 데고. 거의 매일 갔었는데 그 날 지방공연 갔다가 새벽차를 타고 오면서 롯데호텔 앞을 지나가면서 ‘여기서 내려서 사무실 들어갈까, 내일 아침에 오자’ 그러고 갔어요. 뉴스를 못보고 아침에 왔는데 조합 사무실이 쑥대밭이 돼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깨졌는데도 명동성당으로 한 명 두 명씩 오더니 거기를 꽉 채우는 거예요. 그 동지들이 78년도에 호텔 만들고 민주노총으로 99년에 바꿨어요. 그 전에는 한국노총에 있다가. 그러고 첫 파업이었어요. 그 동력이 칠십며칠 갔잖아요. 그때가 기억이 가장 많이 나고요. 그리고 리베라 투쟁, 작년에 했었는데 조합원이 130명 정도 됐는데 중간에 다 복귀했어요. 결국 14명 정도 남았었는데요. 기물관리라고 설거지하시는 분들, 주로 아주머니들이 14명중에 9명이었어요. 젊은 동지들 다 들어가고 했는데. 싸움이 졌어요. 그냥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서. 14명 남았던 사람들 대부분 해고를 당하거나 그만 두거나 했어요. 가슴이 아파서….
박 준 그 안에서도 가장 열악한 사람들 아니에요. 그 안에서 같이 보듬지 못했다는 게 가슴이 아프지요.
정은진 저는 문선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때는 구로에 천지. 한 동지가 “50일째 단식하는 날 꼭 선언동지들이 와서 문선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길 하셨어요. “힘있는 몸짓이 보고 싶다” 그래서 일정 다 빼고 갔었는데 안에는 구사대가 바글바글했고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흰 소복을 입으시고 그늘막 같은 거 치고 철문 앞쪽에 누워계셨어요. 바로 옆에 서가지고 동지가를 하는데 정말 이거는…. 손이 그렇게까지 떨렸던 적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싸움으로는 제일 오래 결합하고 제일 많이 봤던 동지들은 한통 계약직 동지들이구요. (한국통신계약직노조 투쟁)백서에 이름 나왔어요.(웃음)
산으로 산개한 조합원을 내려오도록 하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대오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밤새 술먹고 내려오라고 소리치다가 결국 말도 못할 만큼 심한 성대결절에 걸렸던 99년 지하철 파업, 수많은 공권력과 대치하면서 천여 명의 싸움을 80일 동안 이끌면서도 “옆에 너라도 없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조선소노조 위원장, 공권력 침탈 규탄 집회에 조합원 보호한다며 참석하지 않는 공투 사업장에 가서 울면서 연대를 호소하던 일. 박현욱 동지의 투쟁 이야기를 쓰다보니 한쪽을 훌쩍 넘겼다.
박현욱 OO관광이라는 사업장에 99년부터 강습 들어갔는데요. 관광회산데 공항에서 물류하는 분도 있었고 면세점에서 있는 분도 있었고 본조는 관광여행사였거든요. 물류담당하던 분들 매각하던걸 본조에서 싸움을 못했어요. 그 다음에는 면세점을 용역화시키는 게 진행됐어요. 면세점 동지들이 이미 그것을 다 동의한 상태였어요. 그 사업장에서 4년 동안 만나왔던 친구이기도 하고 동지이기도한 조합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서서 면세점 지부를 만들고 독자적인 투쟁을 해야 본조를 견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친구가 다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동지를 오랫동안 설득을 했어요. 결국 동의서 다 쓰고 나가는 상황에서 이 동지가 지부장 하겠다 그래서 지부 결성해서 투쟁을 시작했어요. 결국은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돼서 몇몇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본조가 복귀하고 심각하게는 면세점 동지들을 본조 조합원들이 막아야하는 상황까지, 폭력적 상황까지 가면서 결국 면세점 동지들이 고용승계가 안되고 흩어져 버린 일이 있었어요. 가슴이 아픈 게 맨 날 연대 다니면서 투쟁하자고 선동하고 하지만 사실 그것에 대한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피부로 느꼈고. 동의서 쓰고 나가려고 했던 동지들 막고 설득해서 투쟁했는데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었는지 상당히 고민이 많이 됐었고.
공연은 필요 따라, 공연비는 지불능력 따라
김건태 생계를 어떻게 꾸려가는 지 궁금해요. 문화활동가 동지들은 개런티 개념 공연 수고비 아니면 차비의 개념 이렇게 다양할 것 같아요. 정해진 가격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서는 돈을 줄 수 없는 어려운 사업장도 있을 것이고 많은 조합비를 가지고 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박 준 (인터뷰를 녹음하는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강습 좀 하고 싶어요. 제한 두지 말고, 열심히 할 수 있어요”(모두 웃음) 먼저 현장의 상황을 물어봤던 것 같아요. 창립행사 같은 경우는 예산을 먼저 물어봐요. 기획자나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놓은 것이 없어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아끼면서 살아요. 자식 키우고. 저 같은 경우는 선택하고 이 길에 섰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좀 문예일꾼들한테 편하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 그냥 쥐어짜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별로 얘기 안 하죠. “정말 상황이 열악한데, 와서 문예로라도 힘을 줄 수 있다면 고맙겠습니다. 돈은 없습니다.” 좋다 이거예요. 또 (어떤 사업장은) 정말 문예일꾼들한테 연락하기조차 힘든 상황인데 개런티를 물어보지 않아요. 그래서 가면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을 줘요. 마음 아닌가 싶어요. 문예가 주는 힘이고 그것을 올곧게 보지 않으면 그렇게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즈음 마음에 힘든 게. 명동의 이주 난민들. 나는 난민이라고 표현해요. 김치가 떨어졌다고 그래도 속상한 거예요. 김치 사가지고 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 역시도 당당하게 나누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저는 무선 마이크를 마련하고 자그마한 음향을 가지고 다녀요. 그거는 내가 있어서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정말 열악한데 엊그제 출입국 관리소 같은 경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음향 가지고 온다는 사람이 다 늦게 와서 설치한다고 그러면 갑갑한 거 아니에요. 그거는 우리 마음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할 게 아니거든요.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좀 나누고 우리 역할을 안다면 노동운동과 문화와는 결코 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은진 그나마 나는 선언에서 살만하지요. 이 동지(김정희)는 동생 부양하면서 살고 이 동지(박현욱)는 어머니 아프신데 어머니 모시고 살고.
얘기하다 말고 박현욱 동지는 기억나는 투쟁 얘기에서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노조가 있다면서 갑자기 이야기를 바꿨다. 50년 반세기 어용의 굳센 장벽으로 닫혀있던 노동조합의 문을 박차고 조합원들하고 같이 “와~” 소리치며 들어가던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 산으로 흩어지는 동지들이 연행되지 않도록 산을 해매고 다니며 길을 안내하던 발전노조 파업. 또 한참 동안 투쟁의 기억들을 쏟아내고 난 뒤 “돈”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박현욱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얘기하는 것이 많이 조심스러워요. 문예판 뿐만이 아니라 운동을 떠나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생계예요. 선언은 그 속에서 그나마 생존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려고 했어요. 사무실도 없고 연습 공간도 없고 가끔 아는데 연습 공간 비면 가서 연습하고. 노래하는 동지들은 음반을 내야되기 때문에 더 힘들죠. 어떤 노동조합 간부들은 강습비로 강사를 고용하는 걸로 보는데 저희는 연대하는 관점으로 가는 거기 때문에 강습이나 공연이나, 댓가로 주는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돈은 투쟁 사업장에 투쟁기금을 들고 가듯이 투쟁에 같이 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동지들이 나누는 활동비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하다보면 어떤 노조는 강습비 전혀 안 받는 데가 있고 3만원 주시는 데도 있고, 어디는 30만원 받고.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적 관점, 임노동관계로 보기 때문에 그런 거고. 노동자 문화가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 문화인데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소외하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노동자 문화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지불 능력이 있는 동지들은 더욱 많이 신경을 쓰면 좋겠지요. 그러니까 몸짓선언에 연락해서 대뜸 공연비 얼마냐고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흥정하는 상품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노조 간부 회식비를 몇백만원 쓰면서 노동가수 부르면서 10만원에 어떻게 안 될까 이런 분들은 동지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확실히 하기도 해요. 그래서 생활은 어떻게 하냐면…. 사실은 어렵죠. 그런데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질서에 그대로 편승하면서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한계점에 다다르면 그 땐 저희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김건태 솔직히 저번 대구지하철 때 앞으로 노조파업 유지할 돈이 없어서 20만원을 줬어요. 세 명 움직이면 기차 타고 밥 먹고 밤에 들어가야 되니까 택시비 어쩌고…. “20만원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에이, 그냥 보시해라” 그리고 불렀어요. 뒤끝이 미안해요.
박 준 아, 대구지하철에서 초장에 갔을 때 이주노동자들한테 20만원 보시했어요. 쌀값. 사실 사람이 추울 때는 힘든 동지들을 생각하는데 날 뜨거울 때는 정말 생각 잘 못해요. 대구지하철에서 화끈하게 지원해서 바로 서울역에서 쌀 사가지고 인현시장에서 김치 사가지고 갔단 얘기야.
김건태 대중가수의 외피를 쓴 그런 그런 사람들 초청할 때는 3,4백만원 7백만원까지 주는 걸 봤거든요. 노동문화일꾼들 부르면서 좀 싸게 안되겠느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 업무를 담당하는 저는 상당히 힘들어요. 어려움을 아니까.
박현욱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저희는 드러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괜찮은데 정말 들어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음향 자유, 그 분들을 보면 장사한다고 보기 어려워요. 저희들은 앞에서 하기 때문에 간부들이 신경 써요. 그런데 이분들은 일하러 온 사람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집회 한 번 하려면 얼마나 경찰하고 승강이를 하는데 그분들은 미리 가서 무대 쌓아야 되는데 노조간부들 한 명도 안 와있고 그러면 그 분들이 경찰들하고 다 싸워요. 집회 끝나고 싹 가버리면 집회 장소가 더러우면 그 뒷 얘기는 그분들이 다 들어요. 여러 단체에서 연대 오시는 동지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저희는 그래도 좀 조합원들이 많이 인정해주는 거죠.
뭔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텔레비전에서 극장에서 영화관에서 연예인을 보듯 이들은 우리에게 뭔가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은 함께 투쟁하는 동지라고 생각했지만 보고 즐기는 자본주의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그들은 텔레비전의 연예인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만나는 것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들이 함께 했던 수많은 투쟁과 어떻게든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시도되는 크고 작은 노력들을 듣고 정말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에 인터뷰 약속이 되어 있던 날 시설관리노조 굿모닝신한증권지부 파업 투쟁을 지원하는 연맹 집회가 있었다. 본 집회가 끝나고 면담을 위해 건물 진입 투쟁이 진행됐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사진을 찍기 위해 전경 바로 앞에 서있던 나는 몸싸움이 격렬해지자 내 옆에 서있던 여성동지들이 뚫고 들어가는 전경들 사이로 딸려 들어가고 말았다. 정신 없이 나와서 보니 내 앞에 전경을 뚫고 들어간 여성동지는 몸짓 선언의 두 동지였다.
그들은 무대 위에 서서 집회분위기를 휩쓸고 한껏 힘차게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선동에 능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무대 위에 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대오 옆에 앉아있던, 전경들의 방패를 같이 뜯어내던 바로 그 동지들이었다.
“문화패가 움직이면 조합원들이 함께 움직였습니다”하며 토해내는 박준 동지의 한숨에서 진정한 노동자 문화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잘하지 않지만 우리 동지들이 하는 풍물, 노래, 율동, 마당극이기에 전문가들이 하는 공연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이 있고 훨씬 큰 삶의 의욕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노동자 문화. 노동자의 삶과 마음을 담아 함께 생산하고, 참여하고, 향유하는 노동자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 앞에 큰 과제가 있음을 함께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