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케미칼 해복투의 투쟁

차광호 “408일이 누군가에게 기준이 될까 두렵다”(2015.7.22)

참된 2015. 10. 15. 18:57

차광호 “408일이 누군가에게 기준이 될까 두렵다”

등록 :2015-07-22 15:42  한겨레

 

 

45m를 사이에 두고 그의 얼굴은 많이 달랐다. 하늘의 차광호는 결연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땅의 차광호는 웃음이 무척 좋았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45m를 사이에 두고 그의 얼굴은 많이 달랐다. 하늘의 차광호는 결연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땅의 차광호는 웃음이 무척 좋았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21]
복간 ‘고공21’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마친 뒤 ‘땅’에서 만난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땅에서 살아가겠다”
땅에서 그를 만났다.

땅이었다. 7월14일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대구 중구) 출입구 앞에 그가 있었다. 들고 나는 자동차와 걸음걸이 급한 행인들과 부산한 도시의 소음 속에 환자복을 입은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익숙한 곳으로 귀환했다기보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그의 눈엔 땅의 높이가 생경한 듯했다. 20m 앞에서 그를 발견하고 잠시 주춤했다. 그렇다. 그가 땅에 있었다. ‘땅의 차광호(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어둠에 적응하는 동공처럼 걸음을 멈추고 그의 모습을 익혔다. 45m에서 내려온 그는 아직 고도 0m를 어지러워하고 있었다.

“전날 엑스레이를 찍는데 쓰러지는 줄 알았다. 내려올 땐 괜찮은가 싶었는데 착륙 6일 만에 ‘땅멀미’가 왔는지 너무 어지러웠다. 계속 멍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이다. 눈과 머리가 아프다.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다.”

밑바닥 없는 물 위를 걷는 것처럼 그의 걸음걸이도 출렁거렸다. 대화 내내 그는 손끝으로 눈을 누르거나 머리를 감싸쥐었다. 야위고 수척했다. 408일 전보다 몸무게가 10kg 줄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2014년 5월27일~2015년 7월8일)을 하늘에서 보냈다. 그의 몸은 땅을 밟았으나 몸의 기능들은 착륙이 더뎠다. 발음이 엉클어졌고, 입은 굳어 있었다. 머리가 밀어붙이는 발화의 속도를 혀가 따라가지 못했다. “‘너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다’는 어머니 말을 듣고서야 나도 알아차렸다.”

본래 땅의 것이었는지, 하늘에 속한 것이었는지, 그의 몸은 아직 제 소속을 찾아가지 못한 듯했다. 그는 심장 검사를 앞두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초입부터 심장이 아팠다. 자다 깨다를 자주 한 것도 심장 통증 때문이었다.”

굴뚝에 있을 때 차광호는 심장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세 사람만 사실을 알았다. 정기적으로 굴뚝에 올라 건강을 살펴준 의료진(노태맹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노동인권위원장·성정미 헤아림숲치유센터 대표)에겐 증상을 말했다. 들풀한의원 윤성현 원장이 심장에 좋은 약을 달여 5차례 올려보냈다. “걱정만 더할 게 틀림없어” 가족이나 동료들에겐 숨겼다.

야위고 수척했다
408일 전보다 몸무게가 10㎏ 줄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을 하늘에서 보냈다
본래 땅의 것이었는지, 하늘에 속한 것이었는지
그의 몸은 아직 제 소속을 찾아가지 못한 듯했다

7월8일 그가 굴뚝에서 내려왔다. 굴뚝에 오를 때만큼이나 가파른 시간이었다. 예정 시각(오후 2시)보다 5시간30분 지체됐다. 스타케미칼 사 쪽이 고소·고발을 취하했으나 경찰이 체포영장(업무방해·건조물침입)을 집행하며 경력을 동원했다. 차광호의 부모가 비를 맞으며 아들의 굴뚝을 올려다봤다. 그의 부모는 지난 3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찔러 어머니는 장출혈을 일으켰다. 틀어막힌 공장 정문을 붙잡고 부모는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경찰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했다. 굴뚝에서 내려다보니까 아내가 몰고 온 자동차가 보였다. 마음이 안 좋았다. 화가 나서 ‘오늘 안 내려가니까 오신 분들 다 돌아가시게 하라’고 했다.”

차광호는 땅을 밟자마자 체포됐다. 경찰이 지정한 병원(칠곡경찰서 500m 거리의 혜원성모병원)에서 방사선 촬영과 피검사만 받고 유치장에 갇혔다. 차광호가 심장 통증을 호소했다. 경찰은 7월10일 수갑을 채운 채 검사(구미 순천향병원)를 받게 해 비난을 샀다. 근래 마무리된 고공농성에서도 없던 과잉대처였다.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7월11일 오후 경찰서에서 나온 차광호를 비로소 동료들이 끌어안고 울었다.

차광호가 지난 8일 오후 408일 동안의 농성을 마치고 굴뚝에서 내려와 가족 등과 만나고 있다. 칠곡/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차광호가 지난 8일 오후 408일 동안의 농성을 마치고 굴뚝에서 내려와 가족 등과 만나고 있다. 칠곡/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내려오기 전날 408일 동안 나를 품어준 굴뚝을 둘러봤다. 굴뚝 벽에 내 손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을 짚고 팔굽혀펴기를 한 곳이었는데 페인트가 벗겨져 자국이 생겼다. 난간 바닥엔 ‘굴뚝 돌기’를 한 흔적이 남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고마운 곳이었다. 땅에 내려섰을 땐 땅의 감촉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이 보이고 아내가 보이고 동료들이 보였다. 살아 내려왔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죽지 않았다는 생각, 살기 위해 돌아왔다는 생각, 이 사람들과 더불어 땅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 생각들로 벅찼다.”

차광호의 머리는 백발에 근접해 있었다. 45m의 고도가 그의 머리에 백색의 밀도를 높였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의 뒤통수에서 말꼬리처럼 자라 바람에 날렸다. 고공농성 300일째 날(3월22일) 그는 이발기계로 스스로 머리를 밀었다. 손에서 도망친 ‘말총 머리카락들’이 ‘108일짜리 머리카락들’과 공존하며 408일의 증거로 남았다.

스타케미칼은 2007년 파산한 옛 한국합섬을 인수해 2011년 재가동(폴리에스테르 원사 제조)했다. 적자와 경기침체를 이유로 공장을 철수할 때까지 1년8개월밖에 가동하지 않았다. 해복투는 공장 재가동을 요구했으나, 사 쪽은 ‘절대 불가’를 고수했다. 스타플렉스(모기업)로의 고용 승계도 “노조가 모기업까지 망하게 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회사는 ‘제3법인 설립을 통한 고용’을 제시했다. 11명의 노동자들에겐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회사가 새 법인을 만든 뒤 해산시켜버리면 스타케미칼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두 차례 일터를 잃었던 노동자들은 불안했다. 회사 안을 두고 논쟁하며 시간이 흘렀다. 차광호를 더는 하늘에 둘 수 없었던 해복투는 합의했다. 해복투가 요구한 ‘제3법인 해산 때 고용 승계 약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 쪽은 새 법인 설립과 고용을 2015년 12월31일까지 완료(근무지역은 평택 이남)하기로 했다. 합의 시한까지 설립 미이행 땐 2016년 1월부터 매달 25일 임금을 지급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신설 법인 노동자의 초임 시급은 ‘최저임금+1천원’이다.

“공장이 재가동되길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땅의 동료들에게 맡겼다. 새 법인 설립 시한을 못 맞췄을 때 임금 지급 조항은 최소한의 장치였다. 잘못하면 기륭전자(사주가 사회적 합의를 파기하고 도피)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에겐 한국합섬 파산 이후 5년을 싸우며 공장을 재가동(스타케미칼)한 경험이 있었다. 고통스러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돼줬다.”

지난 4월 그는 동료들에게 ‘농성 중단’ 의사를 전했다. 부모님의 교통사고 직후였다. “부모가 다 죽어가는데 안 내려오고 뭐하냐”며 아버지는 호통쳤다. 해복투 동료들은 “어떤 선택이든 지지한다”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결심을 바꾼 계기가 있었다. 대구의 한 동지가 우리 투쟁을 담은 영상을 촬영한 일이 있었다. 굴뚝 위의 인사말을 찍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내가 찍은 영상을 보는데 굴뚝에 올랐을 때의 첫 마음이 떠올랐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까 포기하고 내려갈 수가 없었다. 가장 힘든 고비를 그렇게 넘겼다.”

수많은 농성 해제 권유가 있었다. 고공농성 선배들도 간곡하게 부탁했다. “살아야 싸움도 계속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그 권유들을 뿌리치고 굴뚝을 지켰던 차광호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하늘에 올라가면 안 된다. 올라갈 수밖에 없어도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장기 기록을 깨며 성과를 내는 건 성과가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희망은 희망도 아니다. 이제 알겠다. 408일 기록이 하늘을 견뎌야 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준이 될까봐 무섭고 두렵다.”

경찰서에서 놓여난 이튿날(7월12일) 그는 병원의 허락을 얻어 병실로 음식을 배달시켰다. 착륙 5일째가 돼서야 가족과 한 끼 밥을 나눌 수 있었다. 협심증이 의심되는 심장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받아올랐다. 부모님과 아내에게 그가 말했다. “같이 밥 먹는 거, 이걸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그의 말에 부모님과 아내의 눈이 붉어졌다. 그가 찍은 ‘밥 먹는 사진’ 속에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먹먹한 표정으로 말없는 젓가락질을 했다.

굴뚝 농성 당시의 차광호.
굴뚝 농성 당시의 차광호.
45m를 사이에 두고 그의 얼굴은 많이 달랐다. 하늘의 차광호는 결연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땅의 차광호는 웃음이 무척 좋았다. 보고팠던 사람들 앞에서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허물어졌다.

그의 착륙 직후 공장 정문 앞 천막 농성장도 철거됐다. 그의 구미 집에서 부모님 집으로 가려면 스타케미칼 앞을 지나야 한다. “한국합섬 시절 일했던 1공장은 이미 사라졌다. 가끔 가볼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2공장 자리의 스타케미칼도 철거돼 없어지거나 다른 사업자에게 인수될 것이다. 나와 내 동료들이 살아온 역사가 공장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 자리엔 아픔만 남을 것이다.”

사 쪽과 잠정 합의를 이룬 날 저녁이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그는 “내려가기 겁난다”고 했다. 땅을 밟은 지금도 그는 “여전히 두렵다”고 했다. “땅에서 닥칠 일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된다”고도 했다. 그에게 하늘 굴뚝에서 내려오는 일은 땅의 굴뚝에 다시 오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차광호가 굴뚝에 심어 수확한 콩이 그를 따라 내려왔다. 그가 <고공21>과 나눠키운 4알의 강낭콩(제1065호 ‘굴뚝콩이 삶의 뿌리를 내리도록’)이 80알이 돼 땅을 밟았다. 그는 “고마운 분들에게 드릴 것이 없어 굴뚝콩이라도 한 알씩 나눌 생각”이라고 했다. 땅 없이 뿌리내린 것들이 땅을 만났다. 콩도 차광호도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

대구/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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