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카트는 멈추지 않는다 이경옥 `카트` 실제 주인공/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참된 2015. 1. 1. 19:22

없음민중의 소리



"저 생활비 벌러 나와요. 반찬값 아니고."

영화 '카트'(2014. 감독 부지영. 제작 명필름)에서 "반찬값 벌러 나온다"는 남성 관리자의 말에 항의하는 선희(염정아 분)의 외침이다. 그것은 숨죽이고 있던 비정규직 여성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카트'의 소재가 된 이랜드-홈에버 노동자들의 510일에 걸친 싸움은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사건이다. 차별받는 비정규직의 설움과 '감정 노동'의 이면을 송곳처럼 세상 밖으로 돌출시킨 이 투쟁의 주인공들은 '파란 스머프' 반팔 티셔츠를 맞춰 입은 "세상 물정 모르던" 여성들이었다.

"회사가 잘 되면 저희도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해고되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눈 앞에 뒀던 '모범 직원' 선희, '진상'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싱글맘' 혜미(문정희 분), 조합원들을 어머니처럼 다독여주는 청소원 순례(김영애 분), 그저 순박하기만 한 아줌마 옥순(황정민 분), '88만원 세대' 미진(천우희 분). 물대포에 맞서 '카트'를 밀고 나아가는 이들 하나하나에는 '카트' 실제 주인공들의 모습이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카트'의 실제 주인공 중 한 명인 이경옥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여성들이 투쟁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투쟁 당시 이랜드 일반노조 부위원장이었고, 홈에버가 2008년 9월 홈플러스-테스코에 넘어간 뒤 그해 11월 13일 협상이 타결될 때 12명의 해고자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 기일이자, 영화 '카트' 개봉일이기도 하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세상을 잘 알지 못했던 여성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고 현장에서 부당한 일에 적극 나서면서 나 스스로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알게 된 것"이라며 "그 전에 눈치보고 얘기 못 했던 것들, 비정규직이 당당히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당시 투쟁을 평가했다.

대형마트는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단절을 겪거나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이 종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업종의 하나이다. 현재도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경옥 사무처장 역시 남편과 사별 뒤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던 두 자녀와 시아버지, 시어머니 등 네 식구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다.

생활 전선에 나선 그는 2000년 1월 한국 까르푸(2006년 9월 이랜드그룹이 인수, '홈에버'로 바뀜)에 정규직으로 입사, 서울 중계점에 신선식품 코너 샐러드 바에서 일을 시작했다.

'카트' 실제 주인공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카트' 실제 주인공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민중의소리

샌드위치 하나 때문에 협력업체 직원이 잘렸던 기억

이경옥 사무처장은 까르푸 입사 당시 처음에는 회사 지시에 잘 따르고 말 잘 듣는 직원이었다고 한다. "과장이 '일요일 반납하면 안 되겠냐' 그러면 혹시라도 모르니까 잘 보이려고 '네' 하고 일을 했어요."

하지만 마트 생활은 쉽지 않았다.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원래는 작업장 뒤 창고 안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나중에 사측은 그 화장실도 없앴다. '도난사고 방지'가 목적이었다고 한다. 직원들을 도둑으로 모는 격이었다. 결국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지하2층 구석진 곳까지 가야 했는데 일이 너무 바빠 참아야 했던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 가고 일을 했다. 이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방광염으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만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관리자들에 의해 줄곧 무시당하거나 천대받았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관리자들은) 여자들은 말이야, 남편도 있고 하니까 애들 반찬값 벌러 나온 거 아니냐, 과자값 벌러 나온 것 아니냐, 이렇게 폄하하더라"라며 "가장인 여성들도 많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고 소회했다.

남성 관리자들에 의한 일상적인 하대나 막말은 기본이고, 집기들이 날아다니는 일이나 성희롱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매출이 안 나올 때는 관리자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순서대로 자르겠다"는 말도 나왔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마트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고 토로했다. 특히 과거 한국 까르푸에서는 프랑스인 점장이나 부장들이 직원들을 "식민지 노예 부리듯이 대했다"는 것이 이경옥 사무처장의 기억이다.

샌드위치 하나 때문에 해고될 뻔한 적도 있었다. 족발 코너에 자신의 일을 잘 도와주던 협력업체 직원이 있었는데, 하루는 감사한 마음에 유통기한이 살짝 지나서 따로 빼놨던 샌드위치를 재포장해 드렸다고 한다. 직원은 그 샌드위치를 받아 서랍에 넣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안팀이 CCTV를 통해 본 것이다.

보안팀은 "이경옥씨 나와 보세요"라고 부르더니 샌드위치를 왜 줬냐고 추궁했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지금 만든 게 아니라 유통기한이 다소 지난 걸 드렸다. 뭐가 문제냐. 너무 고마워서 드시라고 한 거다"라고 답했고, 사측은 "이게 당신 물건이냐. 당신이 뭔데 이 사람에게 주냐"며 문제 삼았다. 당시를 떠올리던 이경옥 사무처장은 "맞아요. 제 물건 아니에요. 제가 만들기는 했지만"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인 부장과 한국인 과장은 이경옥 사무처장을 해고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엄청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경옥 사무처장의 사정을 아는 과장이 "이 사람 잘리면 안 된다. 일 너무 잘 한다"고 두둔했고, 그 덕에 해고는 면했다. 대신 협력업체 직원은 잘렸다. 샌드위치는 먹어보지도 못한 채. 이경옥 사무처장은 "그때 일은 굉장히 충격이었고, (협력업체 직원에) 미안했다"며 "그게 제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김철수 기자

"회사는 땅을 쳤을 거예요. 그때 이경옥을 잘랐어야 했는데"

차라리 회사는 그때 이경옥 사무처장을 잘랐어야 했던 걸까. 이경옥 사무처장은 "회사는 그때 땅을 쳤을 거예요. 그때 이경옥을 잘랐어야 하는데. 끝까지 회사를 괴롭히고"라고 말하며 웃었다. 해고를 면한 그는 2001년 5월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고, 그러면서 삶이 바뀌게 된다. 노동조합의 '노' 자도 몰랐던 그는 사측으로부터 "말 잘 듣게 생겼고, 시키면 일을 잘 한다"는 이유로 노사협의회 노측 위원으로 지목된다.

막상 노사협의회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노조는 단체협약도 없는 '유령 노조'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고, 프랑스인 점장은 '위엄있게' 앉아 통역을 통한 '통보'만으로 일관했다. 이 사무처장은 "너무 괘씸하더라"라며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인 알기를 우습게 아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소회했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됐다. 2002년 5월부터 거의 300일 파업을 했고, 이어 70일 파업, 해마다 임금협상 때마다 파업, 그야말로 파업과 투쟁의 연속인 나날들이었다. 그는 "천막 치고 고공농성도 하고 별 짓을 다했다"고 소회했다. 프랑스인 점장은 천막을 지날 때면 "냄새 난다"며 코를 막았고, 조합원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대놓고 '왕따'를 시키기도 했고 협박도 빈번했다.

회사는 이 사무처장이 다른 사람과 근무 스케줄을 바꿔 부산 해운대 지부 결성 출범식에 다녀온 것을 문제 삼아 징계 시도를 하기도 했다. 상급자에게 보고를 안 하고 스케줄을 임의로 바꿨다는 것이다. 'CIA 분위기'라는 안전팀에도 불려가고 징계위원회에도 회부됐다. 그러나 '펑크'만 안 나게 서로 근무 스케줄을 바꾸는 것은 당시 관행처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문제 삼는다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징계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 사무처장은 징계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징계하거나 해고 때리면 끝까지 싸울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맞섰다. 프랑스인 점장은 계속 째려봤다고 한다. 결국 징계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이후 회사는 이경옥 사무처장을 건드리지 않았다. "쟤는 차라리 안 건드리는 게 더 낫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당당하게 파업을 하고 다녔다.

이 사무처장은 첫 300일 파업의 결과로 2003년 4월 부족하나마 최초의 단체협약을 이끌어냈다. 노조는 또한 부당노동행위를 드러내 점장을 퇴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 파업은 간부들을 중심으로만 이뤄졌고, 1인 파업인 경우도 많았다. 이 사무처장은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싸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노조 전임자처럼 전국 각지를 돌며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일에 매진했다. 연대 투쟁에 참가했다가 돌아와서 '마감을 치고' 퇴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24시간 영업이 도입될 즈음에는 조합원들이 일하는 시간까지 매장을 돌아다녔다. 그를 노조 전임자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한 활동은 2006년 노조 전임자가 되고, 까르푸가 이랜드로 넘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미친듯이 뛰어다닌 걸 생각하면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발품을 팔아야, 현장 조합원과 함께하고 현장을 누비고 다닐 때 신뢰가 쌓이고 노동조합에 힘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비정규직들과 함께하게 된 것이 의미있는 성과였다. 2006년 단체협상 과정에서 정규직들이 먼저 나서서 '비정규직 차별 철폐'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싸웠고, 이를 본 비정규직들이 물밑으로 노조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노조가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고 비정규직들도 적극 지지를 보내면서 2006년에는 비정규직까지 가입 대상으로 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조합원은 1천200명에 달했다. 까르푸가 이랜드에 매각되기 직전이었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까르푸에서의 치열한 싸움이 이랜드-홈에버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홈에버 투쟁을 이끈 이랜드 일반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한 노조였다. 정규직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전환된 사람들이었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이랜드-홈에버 투쟁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까르푸 시절부터 이어온 '신뢰'와 '연대'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규직들은 "비정규직들이 해고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라며 비정규직들과 함께 끝까지 싸웠다.

노래 부르는 이경옥 이랜드 일반노조 부위원장(2008.11.15)
노래 부르는 이경옥 이랜드 일반노조 부위원장(2008.11.15)ⓒ민중의소리

계산대를 멈추고 '카트'로 바리케이트를 치다

"510일을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투쟁이 20일간의 점거농성이었어요. 영화에도 그 내용이 잘 표현됐어요. 웃음도 있고, 울음도 있고. 그 안에서 줄넘기도 하고, 국이랑 밥도 해서 같이 나눠 먹었죠."

이경옥 사무처장은 이랜드-홈에버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2007년 6월 30일부터 20일간 진행된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경기장 매장 점거 농성을 꼽는다. '카트'를 밥차 삼아 밥을 나눠 먹었고, 종이학을 나눠 접었다. 함께 노래를 불렀고, "고갱님" 흉내에 깔깔대며 웃었다. 계산대 아래 종이상자를 깔고 불안한 잠을 청했다. 이 점거 농성은 마트 비정규직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계기였고 조합원들 간에도 끈끈해질 수 있었던 시기였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민주노총과 시민사회, 일반 국민들의 지원과 성원도 이어졌다.

월드컵 매장은 매출로 한국에서 1등 매장이었고, 이 매장 직원들은 노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가입을 하고 있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1등 대접을 받는 줄 알았던 거예요. 우리가 잘리겠어? 결코 잘리지 않을 거야, 자신감도 있었고 아무리 가서 노조 가입하라고 해도 회사가 회유해서 자꾸 주저앉고 했어요."

하지만 월드컵 매장 직원들은 뉴코아에서 계산대가 외주화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뀐다. 자신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2007년 5월 1일 노동절날 대학로에서 민주노총 집회가 있었는데 연락이 왔어요. '가입하겠습니다.' 저는 한 일주일 상주하면서 가입을 독려하고 있었거든요. 근처 복사집에서 가입원서 100장을 복사해서 뛰어갔어요."

이후 월드컵 매장은 이랜드-홈에버 투쟁에서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정규직 전환을 의무화한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이 7월 1일로 예고된 가운데 회사는 400여명의 비정규직을 단체협약도 무시하고 줄줄이 해고했고, 노조는 두 차례 단기 점거농성을 거쳐 6월 30일 장기 농성에 들어간다. 서울과 수도권 각지에서 조합원들이 집결했다. 계산대를 멈춰 세우고 카트로 바리케이트를 쳤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그때 투쟁이 조합원들에게 '매장의 주인은 우리'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줬다고 회상했다. "그 공간은 해방구였어요. 매장의 주인은 우리야. 우리가 주인인데 주인을 해고시켜? 조합원들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잖아요."

발언하고 있는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발언하고 있는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김철수 기자

카트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2008년 11월 13일 510일간의 투쟁은 마무리됐다. 이경옥 사무처장을 비롯한 12명의 노조 간부가 퇴사하는 것을 조건으로 16명이 복직했다. 2천여명의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이 아닌 말 그대로 계약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절반의 승리'였고, 사측과의 합의 발표 당시에도 이경옥 사무처장은 웃을 수 없었다. 이후 6년이 지났지만, 비정규직의 현실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회사와 합의한 것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차별을 최소화시키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고요.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는 오히려 시간제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어요. '쩜오 계약'도 있고, 4시간 짜리 일자리도 늘어나고 있어요. 카트, 청소노동자들, 시설팀은 다 외주화 됐고요. 그분들은 잘릴까봐 노조 가입도 못해요."

게다가 영국에 본사를 둔 테스코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홈플러스를 매각한다는 소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까르푸에서 이랜드 홈에버로, 그리고 홈플러스-테스코로. 기업이 또 매각된다면 노동자들은 투쟁에 다시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팔자도 기구해요"라고 토로했다. 당시 투쟁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경옥 사무처장은 '카트'라는 영화가 자신을 비롯한 당시를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카트로 위로받은 마음으로 더 큰 투쟁을 할 수 있는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카트'가 보여준 내용은 아직도 진행형이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으면 안 돼요. 영화 마지막에 카트를 밀고 또다시 들어가잖아요. 우리를 암시해 주는 것 같아요."

영화 '카트' 누적관객수는 12월 24일 현재 81만723명이다. 상영관은 서울 2곳, 인천 1곳, 총 3곳밖에 남아있지 않다. 물론 단체 차원의 대관 상영은 가능하다. 순례 역의 배우 김영애씨는 자신이 출연한 또 다른 영화 '변호인'으로 지난 17일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수상 소감에서 '카트'의 흥행 성적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한 가지 믿음은 있었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트'는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졌지만, 카트는 여전히 굴러다닌다. 한국 사회에, 그리고 전세계에 그 수가 얼마만큼 되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카트가 구르는 한 이경옥 사무처장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카트에 기름칠 해야겠어요."

영화 '카트'
영화 '카트'ⓒ카트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