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쌍용차 노동자의 3번째 고공농성 돌입에 분노하며[긴급기고] 송경동 시인이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에게 쓰는 편지

참된 2014. 12. 15. 08:13
쌍용차 노동자의 3번째 고공농성 돌입에 분노하며
[긴급기고] 송경동 시인이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에게 쓰는 편지

입력 : 2014-12-13  20:37:04   노출 : 2014.12.14  00:45:09

송경동 시인 | media@mediatoday.co.kr

미디어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새벽 6시에 쌍차 이창근에게서 전화가 와 있다. 문자였나 보니 전화다. 새벽까지 술을 한잔했나. 며칠 전에는 내가 새벽에 한잔하다 전화를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노래 한 곡을 불러보려는데 제목도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다. 몇 년전 창근의 손전화 알림음악이었던 노래였다. 창근은 그래도 나처럼 막무가내로 사는 사람이 아닌지를 아는지라 이상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할 리가 없는데….

안되겠다 싶어 전화를 하니 전화 상태가 좋지 않는지, 주변 상태가 좋지 않는지 말 소리가 너무 멀다 . 뭐라는지 귀에 바짝 붙이고 들어보니 그때서야 바람소리들 사이로 창근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말을 잇지 못하며 굴뚝 고공농성엘 올라왔단다. 올라올 땐 긴장해 몰랐는데 올라오고 나니 왜 이리 서럽냐고 나의 창근이가 운다.



첫 한진중공업 희망버스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여 혼자 민주노총에서 자고 먹고 할 때 였다. 어느 날 이창근이 배낭을 메고 올라왔다. 함께 하겠다고…. 둘이 스치로폼 깔고 자며 5개월여를 함께 살았다.


 
굴뚝 위에 오른 김정욱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오른쪽)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 이창근 페이스북
 

그는 최고의 기획자였고, 운전수였고, 영원한 희망버스의 명 대변인이었다. 2차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전 사람들에게 호소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정리해고의 슬픔을 아는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당시 지부장이었던 김정우 동지와 동료 쌍차 해고자들을 설득해 평택 공장 앞에서 부산 한진중공업 앞까지 가는 1주일간의 도보 행진에 나섰다. 말이 도보지 하루 4-50km를 거의 달리는 수준이었다. 이름도 ‘폭풍의 질주’였다. 때마침 비가 얼마나 오는지. 폭풍을 뚫고가는 강행군이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함께 해주었었다.. 당시 아마 그가 정리했을, 기자회견문의 내용이다.

“현재 한진은 이명박 정부의 살인적인 노동정책의 폭풍의 격랑에 위치에 있다. 이것은 용산과 쌍용으로 대표되는 2009년에 대한 살인적 복기이며, 국민을 상대로 한 공개적 살해 위협의 완결판으로 인식됨. 희망버스 2차 185대”를 만들 것을 이미 천명한 바 있다. 그것도 청와대 앞에서.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 지도부의 탓으로, 혹은 개인의 문제로 이 국면을 벗어나거나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만들 순 없다. 그래서 “희망의 도보 행진”에 돌입한다. 이 신자유주의 절망의 폭풍 속을 뚫고 저 외로운 노동자민중의 저항의 상징, 85호 크레인을 향해 긴박한 400킬로미터를 걷고 달려 갈 것이다.”

그해 7월 30일, 3차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이창근은, 열흘간 밤낮없이 이어진 한진중공업 서울 본사에 대한 240시간 긴급 행동 ‘주경야독(晝警夜毒)’을 제안했다. 제안 내용을 듣고 모두 폭소를 했었다. 그의 기획에는 늘 경쾌함과 발랄함이 살아 있었다. 형식적이지 않았고, 권위적이지 않았고, 구태스럽지 않았다. 본인이 풀어온 “주경야독 晝警夜毒”의 뜻은 ‘주간엔 경찰과 싸우고, 야간엔 독한 모기와 싸운다’였다. 한 사람이 한 시간씩을 맡아주는 릴레이 1인 시위 형태였는데, 나중엔 아예 집단 농성 형태가 되버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새벽에 오히려 비어있지 않겠냐고, 늦은 밤과 새벽, 아침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 당시 제안서의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동지의 눈물겨운 투쟁이 한진중공업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희망버스는 새로운 국면에 자연스럽게 노선이 놓인 것입니다. 투쟁 주체가 포기하지 않는 않고 전체 양심세력의 지지와 연대가 확대 되는 상황입니다. 희망버스는 시외 노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시내버스, 마을버스 등 다양한 지류의 노선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의 조폭스런 행보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따라서 한진 본사에 대한 본격적인 본때!!!가 필요합니다." 

그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제안들이었기에 그의 문제의식과 글들로 기억한다. 그도 우리도 알 듯이 희망버스의 배후는 우리가 아닌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이었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절규와 호소, 죽음,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화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희망의 신자유주의 노선’를 만들어놓은 이 사회구조와 그 집행부들인 보수 국회와 정부였다. 

   
굴뚝 위에서 내려다 본 쌍용자동차 공장 사진. 이창근 씨 페이스북
 

당시 싸우고 있던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과, 유성기업 해고자 가족들이 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들을 응원하는 희망의 열차를 별도로 만들어 운행하기도 했다. 한진 정리해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전국의 해고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스스로 연대하는 전국 해고자가족 한마당이기도 했다. 그 한마당을 위해 당시 어린이책 작가모임이었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작가모임(더작가)’ 회원들이 수천 권의 어린이 책을 모아주었고, 전국의 해고자 가족 자녀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 등을 확인해 손수 책갈피에 편지를 써주기도 했던 아름다운 일들이 기억난다.

5차 희망버스가 끝나고 6차를 준비하고 있을 때는 인터넷 라디오 생방송 제안서를 들고 오기도 했다. 일명 “희망버스라 쓰고 희망부스라 읽는다”라는 명칭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 누군가 묻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냥 그렇게만 읽어주면 안되겠냐고 동문서답을 해서 질문한 이는 민망해 했지만, 모두가 또 실실 입가가 찢어지던 기억도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시인 과였다. 제목 아래에는 밑도 끝도 없이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다. “10월의 마지막 밤은 11월의 아침과 같다. 크레인 300일, 야만의 시대-희망의 라디오 볼륨을 높여라!” 다음은 그 아래에 쓰여져 있던 기획 취지 부분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인간의 칼 끝 시위인 고공크레인 농성이 300일을 맞는다. 정리해고 철회라는 단일한 요구 사항을 갖고 이토록 오랜 기간 수많은 연대의 손길과 발길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지지부진의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회 권고안이 국민적 신뢰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체제가 이미 낡았다는 시민의식의 성장과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미봉책일 수 밖에 없다는 피해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6일 겨울에 시작된 크레인 농성이 11월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바뀐 것과 변화된 지형도 충분히 읽히지만 근본에 대한 도외시 수준으로 체제와 구조는 은폐되고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열망은 식지 않았고 다른 분출구를 향해 쉼 없이 꿈둘거리는 마그마의 뜨거움이 여전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희망버스는 차분하게 흐름의 방향을 만들어가야 하며 300일 맞아 볼륨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들고 마음이라는 무기를 기운 삼아. 크레인 300일, 야만의 시대 희망이 라디오 볼륨을 높여라!"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덧붙여야 이창근의 마음을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초기 시절 하루는 평택에 내려갔다가 새벽에 들어와 술 한 잔 하고 싶다더니 두 잔도 채 마시지 못하고 오늘처럼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쌍차 투쟁을 정리할까 싶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물어보니 쌍차 지부 동지들 중에 자신이 이렇게 타 사업장(한진중공업) 문제에 깊게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지들이 있고, 조직적이지 못하다는 공개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개별적 행동이니 생계비 지원도 못할 수 있다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들었다는 것이었다. 왜 우리끼리 이렇게 가슴에 못을 박아야 하는지, 그 피눈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이해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백의종군한다는 마음으로 가자고 하던 그날 밤의 침울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은 우리가 그토록 살리고자 했던 김진숙 선배가 벗인 김주익 열사의 추도식 때 읊었던 추도사 중 일부다. 한국사회 민주주의는 아직도 이 피눈물의 추도사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 눈물의 추도사를 넘어서야 비로소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한발짝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조남호·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은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데, 2년치 임금 7만 5000원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 올라간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 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게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원 주던 노동자 잘라내면 70만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명이 달라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의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50이 넘은 농민(필자주: 이경해 열사)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필자주: 그는 down down WTO를 외치며 갔다.)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맨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쌍용차 평택공장 내부 70m 굴뚝 위를 오르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제공
 

이젠 그 아이들의 이름에 창근의 아이 ‘주광’이도 넣어 주어야 하나. 희망버스가 끝난 후에도 이창근과 쌍차 해고자들은 한 시도 쉬어본 적이 없다. 희망뚜벅이, 희망광장, 쌍차대한문 분향소 투쟁 등 자기 투쟁을 넘어 강정, 밀양 등 모든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해왔다. 올해 6월 밀양 송전탑 농성장 강제 침탈이 있던 날, 밀양 할머니들 곁에서 함께 지키고 있던 창근의 사진도 기억난다. 최병승, 천의봉이 고공농성 중이던 현대차비정규직 희망버스를 비롯해서 그는 여전히 여러 곳에서 우리들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쌍차 해고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건강도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2009년 쌍차 77파업 후 구속되었다 나온 후 그는 내내 집행유예 기간이었지만 몸을 사리지 않았다. 77파업의 후과로 간간히 신경성 질환을 겪어 중간중간 쉬어야 하기도 했다. 귓속 달팽이관이 터져 몇 달을 쉬어야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젠 그 죽음의 고공농성에 돌입했다고 한다. 김진숙을 살리자고, 최병승, 천의봉을 살리자고, 유성의 이정훈 홍종인을 살리자고, 스타케미칼의 차광호를 살리자고,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을 살리자고 뛰어 다니던 그가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제 몸 하나를 들고 70m 저 공장 굴뚝을 올랐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도 따라 이 밝은 아침에 같이 울기만 했다. “형, 올라올 때는 긴장해 아무 생각이 안났는데 올라오고 나니 왜 이리 서러운지 모르겄다.”는데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얼마전 백기완 선생님 민중사상특강 끝나고 쌍차 대한문 투쟁 때 가끔 들리곤 하던 무교동 포장마차에 친구들과 함께 앉아 사실 처음으로 창근에게 뭐라 했었던 기억도 나서 ‘미안하다. 창근아, 미안하다 창근아’라는 말 밖에 안 나왔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아침 나절부터 눈물 바람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싸워 온 코오롱 해고자 최일배의 단식이 길어져 그러니까 오늘, 12월 13일 코오롱 연대의 날을 하루만이라도 함께 해달라는 대사회 호소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였다. 내가 알기로 거의 ‘철의 여인’에 가까웠던 김혜란 동지가 말을 하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왜 이렇게 눈물만 나는지 모르겠네요.”, “저희 코오롱 이제 정리할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 또 잠깐 울다, “제가 처음 해고당했을 때 제 아이가 세 살이었는데, 벌써 열 세 살이 되었어요. 내일이 생일이라고, 엄마 내려오라는데, 최일배 동지를 두고 혼자 내려갈 수가 없어서 못 내려간다 했어요.”하곤 말 중간에도 몇 번씩이나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씨팔.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이를 악무는 데도 뜨거운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눈물과, 이 복받침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으며, 보며 살아왔던가. 왜 우리가 울어야 하는 사람들인가. 그 누가 이 잔인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날에 맞서 맨 앞에서 싸워 왔던가. 김혜란의 아이 이름도 이젠 저기 넣어주어야 하는가.

그렇게 과천 코오롱 본사엘 가야 하는 날, 아침. 
이창근과 김정욱이 다시 고공농성에 돌입했다는 이 눈물겨운 날.
이런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질치는 세상.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들을 저 깊은 절망의 바다로 밀어넣는, 구조적 살인 행위에 다름없는 정리해고 기준 완화를 해나가겠다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여당 앞에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세월호 참사 투쟁의 끝이 정리해고 기준 완화라니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그것이 무엇이던 창근아 얘기해다오. 너를 위해서라면,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못하겠냐. 이 더럽고 잔인하고 추악한 세상을 뒤짚어 엎어줄까. 그러면 창근아 웃으면서 살아 내려올 수 있겠니. 주광이 곁에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겠니. 쌍차 서울 본사 앞에서 240시간 ‘주경야독’을 해주면 되겠니. 다시 어디에선가 ‘폭풍의 질주’를 준비해주면 되겠니. 길거리 여기저기에 스티로폼으로 우스꽝스런 부스를 세우고 이쁜 귀마개를 헤드셋 마냥 쓰고 해적판 라디오방송을 기획해보면 되겠니. 다시 어디에선가 전국의 해고노동자 가족들이 연대하는 ‘희망의 열차’를 만들어주면 되겠니. 다시 전국 185대의, 2000대의 희망버스를 조직해주면 되겠니. 그러나 너가 없으니 그것을 이젠 누가 얘기해줄까. 

너도 알겠지만 나도 실형 2년이란다.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물으러 박근혜 대통령 만나러 가겠다 했다고 재판이 또 하나 시작되었고,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 추도식 건으로 또 소환장이 왔더구나. 그렇더라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니. 이런 서러움을, 이런 분노를. 그것이 무엇이던 목숨을 걸고 이 추운 겨울 새벽 다시 배낭 하나를 메고 차디찬 공장 굴뚝 사다리를 붙잡고 오른 너와 김정욱만 하겠니. 200일이 넘어가고 있는 저 스타케미칼의 차광호만 하겠니. 단식 40일이 되는 최일배만 하겠니. 그래 한번 해보자고, 저 잔인한 자본들에게, 이 정부에게 말해보자. 이제 다시 시작이니 눈물은 그만 닦고, 웃으면서, 함께, 끝까지, 투쟁! 이라고 우리 오랜만에 함께 한번 외쳐보자꾸나. 이런 말은 낯간지러워 잘 안했는데, 나도 이젠 점점 나이 들어가나 보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으니. 사랑한다, 창근아. 사랑한다, 김정욱. 사랑한다, 최일배, 김혜란. 사랑한다. 차광호.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분노를. 이 복받침을. 이 치떨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