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창간기획 - 쉰살, 구로공단과의 대화]소설가 안재성씨… 분신한 친구 박영진 모델로 암울한 80년대 노동현장 고발

참된 2014. 11. 28. 00:52
[창간기획 - 쉰살, 구로공단과의 대화]소설가 안재성씨… 분신한 친구 박영진 모델로 암울한 80년대 노동현장 고발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ㆍ(7) 한국 최초 노동소설 ‘파업’ 펴낸 안재성씨

1979년 8월, 강원대 2학년에 다니던 안재성씨(54·소설가)는 방학을 맞아 서울 상도동 집에 와 있었다. TV 화면을 보기 전까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여름날이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공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가는 장면이 2~3분 지나갔다. 김경숙씨라는 여공이 숨진 사실도 알게 됐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몰려왔다.

“저렇게 어린 여자들을 어찌 저리 때리고 사지를 들어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죠. 박정희 정권이 독재한다는 건 알았어도, 정치의 영역에서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도 저렇게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뭐랄까, 빈부 격차가 정권 때문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깨닫게 된 거죠.” 한국 최초의 장편 노동소설 <파업>을 쓴 노동문학가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소설가 안재성씨가 지난 4일 경향신문사 5층 ‘여적향’에서 1983년 구로공단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 1989년 한국 최초의 노동 장편소설 <파업>을 쓰게 된 얘기를 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 ‘YH무역 사건’ 계기 노동운동 입문

집회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때였다. 하지만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적나라한 폭력이 방송에 보도됐으니 이제 달라질 것이라고도 여겼다. 적어도 그날은 오판이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마포 신민당사에 우글우글 모였겠구나 싶어서 급하게 버스 타고 신민당사로 갔어요. 아,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보니 전투복 입은 경찰들, 형사들만 수천명 모여 있더군요. 너무 무서웠어요. 무서워서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났고요.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 비참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웠어요. 아무도 안 나왔다는 것보다 ‘나라도 해야 했었는데’ 하는 생각에 눈물도 났고요. 그 후로 아마 강경파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다시는 그때의 비겁함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요.”

고교 동창을 비롯한 친구들을 20명가량 모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조직을 결성해야 한다는 결기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철저히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모인 목적에 맞게 구로공단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조직명은 ‘미래사회당’.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를 형상화해 지구를 안고 있는 문양의 배지도 만들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미로 만든 배지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죠. 어떤 조직이 자기들 신분을 알리는 배지를 하겠어요. 얼마 안돼 10·26이 일어나면서 흐지부지됐는데, 어쨌든 그때 당시는 테러를 생각할 정도로 결연했었죠.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고요.”

1980년 봄, 학생 대오가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그는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마침 강원대로 찾아온 YH무역 노조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평생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광주민주화항쟁 후 ‘공포 정치’가 세상을 덮는 속에서 그는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됐다. “검사가 ‘넌 아직 어리니까 군대 가라’고 하대요. 그렇게 강제징집됐는데, 제대하자마자 또 담당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앞으로 활동 보고해야 한다고 해요. 도저히 못 참겠어서 제대한 지 사흘 만에 구로공단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어차피 가야 할 곳이기도 하니까….”

■ 구로공단 내 작은 공장들 전전하며 활동

1983년 5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자면서 구로공단 내 작은 공장들을 몇 달씩 옮겨 다녔다. 그때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전 경기도지사)을 처음 만났다. “김문수씨가 노동자복지회라는 단체를 하고 있었는데 글을 하나 써달라고 했어요. 당시 내가 하고 있던 탁상드릴 일 얘기를 써서 갖다 줬더니 ‘너는 글을 무척 잘 쓰니까, 앞으로 소설가가 되어라’고 하더군요. 박노해씨도 김문수씨가 시인이 되기를 권유했다고 하죠. 그때만 해도 김문수씨가 정말 좋은 선배였죠.”

요업개발이라는 도자기 회사로 옮겼다. 그에게 구로공단은 고통의 현장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웠다”며 웃는다. “직원의 80~90%가 여성들이었는데 같이 수다도 많이 떨었지요. 다들 객지에 와서 고생하니까 친목회 같은 걸 만들면 그렇게들 좋아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모이고 술도 먹고, 아무튼 신났었죠.” 그렇게 어울려 지내는 것을 사측은 불안하게 봤던 것 같다. “친목회를 만드는 건 회사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서 해고하게 돼 있다고 해요. 넌지시 와서는 ‘신원조회 다 해봤다’고도 하고요. 노조를 만든 것도 아니고 친목회 가지고 나가라니까 참 미치겠더군요. 그래도 안 나가면 친목회 회원들을 다 자르겠다고 하니 어떡해요. 별 수 없이 나왔죠.”

삼립식품 공장을 거쳐 남성 노동자들을 조직해 보려고 찾아간 동일제강은 상대적으로 어둠의 그림자가 짙었다. 주야 맞교대였고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의 작업 환경이었다. “제대로 힘든 공장을 간 거였죠. 하루 12시간씩, 때로는 24시간씩 일하다 보니까 무엇보다 졸려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나는 야간에 일하고 낮에는 또 모임을 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졸다가 자칫 기계 쪽으로 넘어지면 빨려 들어가 죽는 거였어요. 내가 있는 동안에도 3명이 죽었어요. 정말 살벌했어요.”

그 와중에 노동자들을 만나고 노동법을 가르쳤다. 전태일 열사처럼 1986년 3월에 분신 사망한 박영진씨(당시 26세)는 동일제강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생일이 빨라서 내게는 형이라고 불렀죠. 얼마나 좋은 녀석이었냐면요, 동일제강에서 나와서 청계노조 선전부장으로 있을 때인데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영진이도 동일제강 나와서 문구 회사에 다닐 때고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순대랑 라면 파는 집에 데리고 가더라고요. 추석 보너스로 2만원을 받았는데 5000원을 떼어 주대요. 회사에서 몰래 가져왔다며 볼펜도 주고요. 자기는 취직이라도 했는데 나는 어떻게 먹고 다니느냐는 거죠. 그렇게 모든 사람한테 잘하고 의협심도 강했던 친구예요.” 훗날 안씨가 쓴 소설 <파업>이 바로 박영진씨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당 시 동일제강에서는 노조를 만든 후 “학출(대학생 출신)들은 이제 빠지자”고 해서 나왔다. 다시 그가 택한 곳은 구로공단보다 더 힘든 ‘막장’이었다. “탄광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강원대 출신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7명의 후배들과 함께 두 달 동안 조그만 집에서 합숙하면서 노동운동 학습을 하고는 탄광에 찾아갔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동일제강은 장난이었어요. 지금은 거의 탄광들이 없어졌는데, 나는 정말로 잘 됐다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그렇게 시키는 일이 있어선 안돼요. 지옥 같았죠. 2㎞가량 땅 밑으로 들어가는데 머리에 있는 약한 전등 하나만 의존하죠. 전등을 끄면 바로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몰라요. 완벽한 어둠, 얼마나 무서운데요. 그런 곳에서 80㎏짜리 갱목을 지고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야 해요. 가다가 갱목이 끼여서 바동거리는 일도 많고요. 그렇게 일을 끝내고 나면 장화 안이 땀으로 출렁거릴 정도였어요.”

산소 공급이 중단되거나, 무너지거나, 가스가 터져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극한의 현장이었다. 두려움과 피로, 몰려오는 자괴감 때문에 술도 약처럼 마셨다. “일을 마치고 나서 통근버스 기다리는 30분 동안 소주를 몇 병씩 마셔요. 대접에 부어서 들이켜는 거예요. 하루하루 불안하기도 하고 처지에 대한 비관 때문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뎌서 그랬을 거예요.”

탄광 노동자들을 조직하다가 수배된 그는 1990년 다시 구로공단으로 향했다. 방값이 싸고,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보증금 50만원에 월 8만원짜리 방을 하나 얻었어요. 주차장 안쪽 캄캄한 지하방이었죠. 노동운동을 하면서 줄곧 선전 쪽 일을 했거든요. 소설도 그래서 쓴 거예요.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사회 현실을 고발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파업>의 초고를 쓸 때는 유인물에서 쓰는 표현들을 일부러 그냥 쓰기도 했었어요.”

그렇게 1989년에 내놓은 소설 <파업>은 그해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문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에도 안씨는 <사랑의 조건> <피에타의 사랑> <황금이삭> 등의 소설과 <박헌영 평전> <이현상 평전> 등 작품을 내놓았다.

■ “망가진 평등…빈부격차 줄이기 투쟁할 때”



노 동인권회관에서 일하던 1993년 그는 포클레인 기사로 변신했고, 경기도 이천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들어서면서 노조가 스스로 일을 하니까 도와주는 역할이 거의 없어진 거죠. 그 즈음에 김문수씨가 찾아왔어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아주 대판 싸웠어요. 혹시 민주당이면 몰라도 어떻게 민자당(민주자유당)이냔 말이죠.”



안씨는 지금 집필에만 전념하고 있다. 35년 전 신민당사를 향하던 것처럼, 가야 할 곳이라면 그간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보람 있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인류가 추구해 온 것은 자유와 평등인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정치적 자유는 많이 얻었잖아요. 그런데 경제적 평등이 악화됐어요. 빈부 격차가 엄청 커졌죠. 평등은 망가지고 자본가들의 자유만 커진 거예요.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게 된 거죠.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투쟁에 나설 때예요. 민주화 이후에 대역전을 한 번 당했는데, 그동안 누적돼 온 힘이 또 세상을 바꿀 거예요. 낙천적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