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에 한 번씩 터지니 원. 자다, 일어나다, 싸우다, 소리 지르고. 비닐 하나 들어올 때, 깔개 하나 들어올 때 경찰이랑 박 터지게 싸우니까. 잠 잘만하니까 새벽 3시부터 비가 엄청 쏟아졌어요. 비닐을 뒤집어쓰고 잠도 못 잤지. 바닥 차가운 건 둘째 치고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왔는데 답변 달라고 기다리게 된 거잖아요. 아이 영정사진을 가져왔는데 그건 젖으면 안 되니까 각자 가방에 넣고 꺼내지 않았어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다영 양의 어머니 정모 씨의 가방은 각이 졌다. 몇몇 가방 등 쪽이 왜 네모난 가 했더니, 가족들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등에 업고 왔다. 이들은 22일 오후 7시 이곳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한을 전달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답변을 기다린다고 했다. 기다림이 길어지며 밤샘 연좌 농성이 됐고, 25일까지 이어졌다.
“하... 우리는 죽겠다. 나는 아이들 분향소도 두 번 밖에 가지 않았어. 갔다 오면 며칠 동안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린 나름대로 조금씩 참으면서 가는 중이야. 내 아픈 구석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건 자식 일이잖아.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못해요. 진짜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지금 숨고르기하고 있는 중이야. 정부,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몸뚱이를 무기로 만들고 있는 거야. 우린 몸뚱이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 노숙도 몇 개월이나 했고, 우린 창피하지도 않고, 우린 뭐든지 할 거야. 갖은 수단 가리지 않고”
한사코 ‘남편과 하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던 정씨는 천천히 말문을 열다 눈물을 흘렸다. 우는지도 모르게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이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다. 정씨는 “우리는 말 시키면 울어”라면서 “집에 있기보다 차라리 이곳에 가족끼리 같이 있는 게 낫다”고 했다.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둘째 날 그는 아침에 빵 먹고, 점심에 김밥 먹고, 이젠 밤에 덮을 담요만 하나 주면 몇 달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미쳐버리겠단다.
“평소 나도 남편도 일 다녔지. 아이 잘 먹이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옷이라도 더 입히고, 무언가 시도하려고 하면 하나라도 더 할 수 있게 하려고 했는데... 다영이는 나물 종류를 특히 잘 먹었지만, 골고루 다 잘 먹었어요. 부모는 있잖아요, 살아가는 이유가 자식 때문이에요. 자식이 그야말로 바다 속에서, 선장·선원 등이 아이들에게 배 안에서 왜 기다리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밝혀내야 해요. 그걸 해야만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가 되는 거잖아. 너무 예뻐서 보기도 아깝다고 했는데...”
정씨는 말을 하다 끊다 했다. 아이 이야기 하나 더 물어보겠다며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울고 싶지 않다”며 입을 닫았다. 슬픔과 분노의 눈물, 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여기서 나 혼자 울면 진상이잖아” 하는 말로 대신했다. 정씨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말만 시키면 다 운다고 했다. 외동아들을 잃은 다른 유족은 이미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야. 웃다가 울다가 밥 먹다가. 제정신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어. 다 미쳤어. 우리는 미친 꼴을 보고 미쳤지만 그들은 고의적으로 미친놈들이야. 나는 여기 있으면서 지금도 자식하고... 문득 애 기다리고 저녁밥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하고 있어. 다영이 너무 예쁘게 키웠는데. 속도 안 번 안 썩혔어. 다영이 위로 오빠가 둘이야. 다영이하고 영화고 보고 알콩달콩하고 싶은데 없으니까 수다 떠는 걸 못하겠어.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야. 다영이 없이 살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지고 무서워요. 난 얼마나 살지 모르는데...”
정씨는 4월 16일 참사 7일만인 22일 깊은 바다에서 아이를 찾았다. ‘신원미상’ 아이를 정씨가 가장 먼저 알아봤다. 다영 양이 친구 3명과 이니셜을 새겨 우정반지 한 것을 정씨는 모양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다영 양이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정씨는 진도에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다영 양 아버지가 “다영이다!”고 외치며 뛰어 따라갔는데 아니었다. 현장에서 2학년 10반은 1명만 구조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씨는 정신을 잃었다. 정씨는 아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이게 뭔 나라인가 하며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구조 당시 한쪽에선 해상에서 발견됐다고 하고 다른 쪽은 선내에서 발견됐다고 하는 등 정확하지 않았어. 구조 자체부터 열 받고 꼭지가 도는데, 구조 안 해주는 것도 그렇고 초기 대응도 엉망이었으니까. 구조 당시 그야말로 컨트롤타워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통제 체계도 하나도 없으니까 이게 뭔 나라인가 싶었어. 그게 더 절망스러웠어요. 아이들을 하나도 안 살리려는 건가? 하나도 안 건지려고 하는 건가? 참사 나고 첫날 전체 업무지시 내리는 사람도 없고 다 나 몰라라 했어요. 서로 부서별로 책임을 미루고. 미친놈들”
정씨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정치인이 누구로 바뀌든 사실 별 생각 없이 살았다고 했다. ‘중산층도 못되고 소시민’인 가족은 큰 불상사 없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꿈꾸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국민을 위한 경찰이 아니라 권력을 대변하는 경찰’, ‘미친 나라’, ‘구조적 살인’ 이라는 단어가 이젠 자연스럽게 나온다.
세월호 가족에 대한 비방과 악의적의 루머와도 싸워야 한다. 의사자 지정, 대학특례입학 등은 가족이 요구한 적도 없고 정치권이 들고 나왔는데, 도리어 가족이 피해 받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이상 유언비어에 시달리다 보니, 정씨는 “열 받지만 별로 신경은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어차피 남들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하고 있어요. 우릴 지지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가는 거야. 똑같은 입장이 아니고서야 다 이해할 순 없다고. 씹을 거리가 필요하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열은 받아. 중요한 것은 돈도 필요 없고 죗값은 치러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가 일어섰다는 거야. 앞으로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그러다보니 정씨는 참사 희생자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가 생각난다. 43일째 병상에서 단식농성 중인 그는 다영 양과 같은 2학년 10반 학부모다. 장기간 단식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김씨에 대한 악의적 루머가 떠돌아 화나고 마음 아프지만, 정씨는 서울시동부병원으로 김씨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
“유민 아빠는 우리 반이야. 그렇게 하는데 우리 맘 편하자고 가 볼 순 없잖아. 나중에, 나중에 좀 좋아지면 반 모임하면서 밥이나 한 술 하면 좋지요”
정씨와 인터뷰 하는 동안 몇몇 가족들이 가슴에 담아둔 말을 뱉는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참사 희생자 이모 군의 아버지 이모 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투로 “우리 때문에 경기가 하락했대”라고 말했다. 주변에서 “냅둬, 냅둬” 라는 말이 나온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경기부진’, ‘경기침체’, ‘기업호감도 하락’, ‘외식업경기지수 하락’ 등의 보도가 쏟아진다.
또 다른 참사 희생자 가족 길모 씨는 “나는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더 미워”하며 혀를 내두른다. 그는 “박 대표가 유민 아빠 손잡고 이젠 단식을 멈추라고 했는데, 나는 그게 더 얄밉고 능청스러웠어. 박근혜 대통령이 우릴 만나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사실상 협박이잖아”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20일 오전 단식 38일째인 김영오 씨를 찾아 “유가족들의 뜻을 합의안에 반영하지 못한 저희가 잘못이 있으니 용서해 달라”고 사과를 하면서도 여야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가운데 정씨는 “아픈 데는 없는 데 속이 빡빡해서 소화가 안 돼. 천불이 나잖아”라면서 배를 만졌다. 한 달하고도 14일째 이곳저곳 거쳐 청와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는 정씨는 24일 비가 내리는 밤에도 깔개와 비닐에 의지해 박근혜 대통령의 답변을 기다렸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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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기자는 미디어충청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미디어충청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