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세월호 참사

“촛불 도심행진과 기존 학생운동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6.10 만인대회 청년들, 연행 결의 감수하며 청와대로 향했던 이유

참된 2014. 6. 18. 00:34

“촛불 도심행진과 기존 학생운동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6.10 만인대회 청년들, 연행 결의 감수하며 청와대로 향했던 이유

홍 모 씨는 연행 과정에서 이미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경찰이 갑자기 들어와, 내 목을 감고 뒤로 던졌다. 방패를 들고 서 있던 경찰들과 부딪혔고, 엉키며 함께 넘어졌다. 경찰이 넘어져 있는 내 왼팔을 꺾고 일으켜 세워 경찰차로 밀었다. 경찰차와 얼굴을 부딪쳐 코피가 흘렀지만 경찰은 내 양팔 모두를 꺾은 채 경찰 버스로 연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버스에 타서 코피가 흘러, 휴지를 달라고 하자, (경찰은) ‘휴지가 없다’고 했다. 코피가 계속 흐르는데, 장시간 비를 맞아 기침이 나왔고,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0일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서 기습적으로 열렸던 만인대회에서 총 69명의 시민이 연행됐다. 그 중 40명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청와대를 등지느니, 앞을 보고 입감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연행결의문을 작성하고 시위에 나선 상태였다. <참세상>은 당일 연행된 이들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당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경찰 방송차에 올라 끝까지 “세월호를 기억하라”, “청와대가 책임져라”고 외치다 연행된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방송차에 올라 구호를 외치기가 무섭게 무자비하게 연행됐다. 경찰은 이들의 목을 졸랐고, 머리채를 잡아 땅으로 집어 던졌다. 한 명이 실신했고, 또 한 명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경찰은 이들의 팔을 꺾어 경찰 버스에 밀어 넣었다.

금 모 씨는 “차에 올라갔다가 경찰에 끌려 내려오는 과정에서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 버스 안 이었다”며 “경찰이 땅에 떨어트리다시피 밀쳤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앞서 연행된 홍 씨는 경찰버스에 연행됐을 때, 이미 금 씨는 실신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던 것을 봤다고 말했다.

함께 연행된 김 모 씨는 “금 씨가 헛구역질을 하고 뇌진탕 증세를 보이며 경찰에게 의사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면서 무시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방송차에 오른 청년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며 강경하게 연행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경찰은 연행과정에서 실신한 금 모씨를 바닥에 질질 끌어 경찰 버스에 태웠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경찰은 이들을 경찰 버스로 연행한 후에야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고, 입감 직전까지 수갑을 채웠다. 이들이 변호사 접견권을 요구하며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변호사 입회 없이 1차 조사가 진행됐다. 이들은 지난 12일(목) 오후, 44시간 여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날 시위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청년들의 주도 아래, 청와대 턱 밑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전 시위와 양상이 달랐다. 무엇보다 이날 청년들의 저항은 전에 없이 극렬했다. 경찰은 예상치 못한 청와대 턱 밑 앞 시위에 당황했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청와대로 갈 것을 외쳤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이들이 당시 연행결의를 감행하면서까지 끝까지 저항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앞서 홍 씨는 “추모 도심행진에 무기력감을 느꼈다. 이미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정부의 책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굳이 2,3만 명의 시민이 모여 그것을 또 알리기 위해 도심행진을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며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뒤돌지 말고 청와대 방향으로,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300명이 죽은 참사였다. 정권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을 외면했다”며 “(연행결의를 한) 사람들 내부에서도 ‘청와대로 가면 연행될 거다, 못 갈거다’란 얘기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 가서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자는 모두의 분노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연행됐던 강 모 씨 역시 세월호 추모 집회와 도심행진에 아쉬움을 표현했다. 강 씨는 “저희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고 해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잊지 않겠다고 하는데, 촛불만 들고 걷는다는 것은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잊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사회에서 만족하며 살겠다’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 씨는 “그동안 청와대를 향한 저희 행진이 경찰에 공권력 행사로 무력하게 진압 당했다. 하지만 그날은 드디어 경찰 병력을 뚫었다. 공권력을 상대로, 우리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고,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큰 책임은 정권에 물어야 하고, 정권 총책임자인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로 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풀려나자마자 알바를 하기 위해 편의점으로 가야했다. 평일 알바를 빠지고 나선 시위였기 때문이다. 이틀이나 구속됐던 강 씨는 “석방되자마자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알바를 해야 한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금 모 씨는 “곧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있었고, 사람들이 세월호를 점점 잊을까 걱정했다.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심정이었다. 이 나라에 끝까지 저항하는 시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연행을 결의한 청년들은 대학생만이 아니라 대학을 가지 않은 청년들도 많았다.

홍 씨는 “당시 대학생들이 많긴 했지만, 나이로 따지면 대학을 갔을 사람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현재의 싸움이 단순히 대학생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은 뜻으로 함께 하려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존 학생운동과 다르다고 생각 한다”며 “그날 많은 청년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전 ‘가만히 있어라’ 침묵행진 참가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가 점점 더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기습 시위가 성공했던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세월호 투쟁에서 여러 대학 별 단체에 함께 동참해줄 것을 제안했음에도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대학생 단체들이 대중들에게 이 싸움(청와대로 향하는)이 어떻게 보일지 두려워했다”면서 “그런 반응을 접했을 때 많이 당황스러웠다. 저는 대중에게 우리의 싸움이 어떻게 보이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윤보다 생명’이라는 우리들의 요구가 분명 옳은 것이기에 당연히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