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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0일 자정. 폭우가 쏟아지던 청와대 인근 삼청동 총리공관 앞. 한 청년이 경찰에 밀려 화단에 머리를 부딪치고 의식을 잃었다. 경찰도 시위대도 모두 구급차가 올 때까지 숨을 죽였다. 주변 사람들은 청년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그가 무탈하길 빌었다. 그 안타까운 시간이 15분여 동안 흐르고 구급차가 다친 청년을 후송했다.
구급차가 떠나자 경찰은 다시 청년들을 인도로 몰아붙이려고 했다. 도로에 있던 한 청년이 말했다. 오늘은 돌아가지만, 다음에 청와대를 향해가자고 했다. 그는 동지가 크게 다친 상황에서 더 이상의 희생이 나와선 안 된다고도 했다.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의 분노와 저항은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이미 30여 명이 넘게 멍들고 찢기고, 실신한 채 경찰에 연행된 상태였다. 청년의 제안은 용기가 부족한 것도 자신들만 살자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편 인도에 경찰에 막혀 있던 한 여성이 간절하게 외쳤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7년 전 오늘, 1987년 6월 10일에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로 나섰기에 우리가 조금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캄캄한 삼청동 밤하늘에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도로 위 한 여학생이 자신이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젖혔다. 여학생은 자신이 지금 처한 개인적 어려움과 이곳에 있어야 하는 상황을 눈물로 얘기했다. 주변에 있던 청년들도 눈물을 흘렸다. 목소리엔 서러움과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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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제를 바꾸고 당신들의 권력을 무너뜨릴 겁니다”
자신을 전도사라고 밝힌 한 젊은 남성이 이어받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견딜 수 없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는 체제와 권력을 바꿔야 한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신이 자기 모습대로 인간들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사회를 보십시오. 이 사회는 이윤이 인간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있습니다. 한 학생이 쓰러져 실려 나갔는데도 경찰은 무미건조하게 돌아가 가만히 있으라고만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곳에 오고, 한발씩 더 나아가 이 체제를 바꾸고 당신들의 권력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청년들은 빗속에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던 한 전경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전경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시계는 새벽 12시 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또 다른 학생이 말을 이어갔다. “경찰이 (자진해산 하라며) 퇴로를 열어주었지만, 우리는 당당히 앞으로 걸어나갔습니다. 비록 저기 청와대까지 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저곳에 가지 않고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날 경찰은 청년들에게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3-4차례나 원천봉쇄한 길을 열어주며 해산을 권했다. 그만큼 젊은 세대의 저항 목소리가 공권력과 직접 대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다른 학생이 그 목소리를 이어받았다. “세월호 추모를 위해 거리를 몇 시간 동안 걷다가 ‘오늘도 추모를 했구나, 잊지 말자’고 하면 되는 겁니까. 청와대로 가야합니다. 더딜지언정 우리 발길은 경찰이 열어주는 청와대 반대 방향이 아니라 청와대로 향해야 합니다”고 호소했다.
처음 오늘은 그만 멈추자고 하던 청년이 다시 말을 이어 받았다. 그도 이대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5-60여 명의 청년들은 다시 청와대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들을 좁혀 왔고 다시 에워쌌다.
경찰 지휘관은 집에 돌아갈 사람은 모두 보내주겠다며 경복궁으로 가는 길목 한쪽을 다시 터줬다. 청년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를 향하다 연행을 택했다. 그들은 “이윤보다 인간입니다”를 끌려가는 내내 외치고 외쳤다. 호송차량에 실려서도 외쳤다. 경찰 바깥쪽에 있던 이들도 호송차를 막고 또 외쳤다. 시계는 새벽 1시가 넘어섰고 그제 서야 비가 그쳤다. 6월 10일 밤 9시 20분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69명이 연행됐던 세월호 추모 만민대회는 청년들의 간절한 저항의 목소리를 묻어버리기 위한 강경 진압으로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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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에 대한 부채의식이 시대의 아픔 담은 저항정신으로
이들의 청와대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저항의 목소리는 기성세대뿐 아니라 기존 운동에 세력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었다. 시대의 아픔에 적당히 타협해선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저항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청년좌파 소속 김윤영 씨는 <참세상>과 통화에서 “기존에 있었던 촛불문화제나 집회에서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국회와 청와대로 가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나 촛불 집회를 주도하는 분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정부 책임을 묻는 강경발언을 하고 나서도 결론은 서명운동을 열심히 하자였고, 몇 만 명이 모여도 청와대와는 반대방향으로 갔다. 이러다가는 또 잊히고 없던 일로 될까 걱정이 됐다“고 밝혔다.
윤영 씨는 또 “숨길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여당이나 민주주의 세력 모두 무능했다”며 “그들이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라 쉬쉬하거나 이벤트로 묻는 모습에 같이 간 친구들은 세상의 민낯이 드러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윤영 씨는 그날 연행됐던 친구들의 목소리도 전했다. “다들 그냥 잡혀가도 청와대로 가겠다는 생각만 했다더라”며 “이렇게는 흩어질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 각오를 다지고 온 자리였는데 한 학생이 쓰러져도 아무렇지 않고 무심한 경찰을 보고 더 흩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어 “광주의 부채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87년 6월 항쟁을 만들었다고 들었다”며 “우리는 300명의 죽음을 똑똑히 봤던 사람으로서 부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과 다른 대안적 정치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그날 청년들은) 앞뒤 재지 않고 끝까지 싸운다는 게 뭔지 보여줬고 후회 없이 싸웠기에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며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길들여지지 않는 저항과 투쟁의 복원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한 노동운동 활동가는 “5월 24일 민주노총은 종각 사거리에서 청와대로 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이 숫자로 우리가 청와대로 가?’라는 모습이었다. 대부분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며 “우리가 잊고 있던 저항정신을 그날 청년들에게서 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