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주인공 한상구의 승리로 끝난다. 영화에서 한상구는 거대자본 ‘진성’에 맞서 결국 딸 윤미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많은 ‘한윤미’들이 자신의 질병 혹은 죽음을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영화에 ‘아기 엄마’로 나오는 정애정(37)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정씨는 올해로 7년째 남편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남편 황민웅씨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일하다 급성림프성 백혈병으로 숨졌다. 설비 엔지니어는 설비 세정작업, 공정 설치작업 등을 담당한다. 영화에서 배우 이경영씨가 하는 일을 떠올리면 쉽다.

정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남편의 병이 산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7년, 남편의 직장동료에게 온 전화 한 통이 정씨의 인생을 바꿨다. “제수씨, 요즘 신문 보니까 민웅이도 산재인 것 같아요. 인터넷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제가 이런 말 했다고는 말하지 마시고요.” 황유미씨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렇게 정씨는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를 만나게 됐다. 반올림은 황유미씨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영화의 유난주 노무사는 실제 인물인 이종란 노무사이기도 하지만, 또 반올림이기도 하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정씨는 반올림에 큰 도움이 됐다. 정씨 또한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사내커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업무를 직접 지켜보고 증언했던 그에게도 산재 인정은 쉽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았고, 1심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정씨는 1심 결과에 불복해 현재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항소심을 진행중이다.

영업비밀도 “피해자가 입증하라”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1심 재판부는 고인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인정되지만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유해화학물질이나 전리방사선 등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부족한 점, 교대근무로 인한 야간근무 및 과로가 백혈병의 유발요인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 의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인 점 등을 들어 황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산재인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 드러난다. 바로 ‘입증책임’이다. 현행법은 산재를 주장하는 쪽이 업무상 재해발생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도록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공정 자체가 복잡하며, 취급하는 화학물질의 수가 많아 입증이 더 어렵다. 당사자들조차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 김아무개(45)씨도 반도체 이물질 제거용으로 수없이 사용한 세척제의 이름을 일할 당시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그냥 지우는 데 사용되는 약품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지 발암물질 혹은 위험한 화학물질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세척제는 ‘트리클로로에틸렌(TCE)’로 독성물질로 분류된다.

재해 당사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더 복잡하다. 유족은 산재신청을 할 수는 있지만 어떤 작업방법으로 인해 어떤 유해물질이 노출되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영화에서처럼 회사가 “한윤미는 사무직이었다”고 거짓말 하는 장면이 실제 일어나도 당할 수밖에 없다. 고 황유미씨의 경우 간단한 작업환경과 공정이 기록된 일기가 있었기에 산재신청이 가능했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은 ‘영업비밀’이라며 화학물질이나 공정 전반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노동자 스스로 입증하라고 하면서, 정작 업무환경에 대하여 해당업체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에서는 영업비밀이라며 종이 한 장도 밖으로 갖고 나오지 못하게 하고, 소송에서도 피해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아 중요한 정보는 얻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반올림에 제보한 직업병 피해자들조차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불승인 이후 행정소송 과정에서 포기하기도 한다. 병원비 부담으로 산재신청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삼성과 보상 합의를 한 경우도 있었다. 영화에서 한 유족이 “노무사님 미안해요. 돈 받았어요”라고 하며 우는 장면이 그런 경우다. 그래서 실제 현재 반올림에 접수된 제보는 200건에 이르지만 산재신청은 42건 뿐이다.

   
▲ 고 황유미 씨 사망부터 현재(2014년 2월)까지의 반올림 일지
 

“희귀병이라서 산재 인정 안 된다니”

   
▲ 삼성LCD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씨. 사진=이하늬 기자
 
복잡한 반도체 공정을 이해하고, 화학물질을 파악했다 해도 남은 과제는 또 있다. 바로 ‘희귀질환과 업무 사이의 의학적 입증’이다. 반도체 산업에는 면역계 이상이나 신경계 이상 등 희귀질환이 많다. 하지만 희귀질환은 산재신청을 하더라도 원인을 모른다는 이유로 역학조사마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산재 인정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종란 노무사는 “그나마 백혈병의 경우 환경적으로 벤젠이나 방사선 등에 노출될 경우 발생한다는 것이 확인된 질병이므로 역학조사라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희귀질환인 경우에는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작업현장의 유해물질과 해당 질병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재 인정을 하지 않는 판결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36)씨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상경화증)에 걸린 이윤성(42)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정재우 판사는 지난해 8월 이씨에 대해 “루게릭병은 현대의학상 아직 그 발병원인이 밝혀지지 아니하였다”며 “환경적 요인에 관해서는 살충제, 중금속(수은, 납), 전자기장 등이 이 사건 질병의 발병위험성을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상반된 연구결과가 아직 존재하는 등 아직 의학적으로 명백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재판부는 “원고가 화학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전자기장에 노출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노출 정도가 원고의 건강이나 신체에 영향을 줄 정도였는지가 분명하지 않고, 더구나 앞서 든 화학물질과 이 사건 질병(루게릭병)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실험연구 및 역학연구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해당 재판부는 한혜경씨에게도 비슷한 이유로 산재를 불승인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희귀질환은 환자가 많이 없어 연구성과도 축적되지 않아 발병원인을 뚜렷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희귀질환인 것”이라며 "현대의학에서 밝히지 못한 발병원인의 책임을 왜 노동자에게 전가하나. 그 책임은 정부와 사회가 져야한다. 희귀질환일 경우, 개인질병이라고 정확히 입증되지 않는다면 직업병으로 봐야한다“고 비판했다.

'노동자가 절대 이기지 못하는 구조'를 바꿔야

   
▲ 반올림에 접수된 직업병 피해 제보 현황
 
따라서 입증책임이 근로복지공단이나 사업자에게 전환되지 않는 이상 현실의 ‘한윤미’들은 결코 영화와 같은 결말을 맞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직업병 피해자 유족 정애정씨는 “법원이 정황이나 상황 등 좀 더 큰 틀로 보지 않고 지금처럼 ‘증거만 가져오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자운 반올림 활동가도 “(현재 구조는) 업무환경이 유해한지 모르겠으면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한 노출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면 그러한 노출이 없었던 것으로, 설령 유해요인에 대한 충분한 노출이 있었더라도 그것과 지병 간의 의학적 연결고리가 밝혀지지 않으면 질병과는 무관한 것으로 처리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 같은 문제의식이 법안으로 발의되기도 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2011년 대표 발의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으로 입증 책임을 노동자와 근로복지공단이 배분하도록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노동자는 업무 수행 과정에서 유해 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유해 위험 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다는 사실만 증명하면 된다.

반면 나머지 책임은 근로복지공단이 안게 했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가 증명한 사실이 의학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해야 한다. 근로복지공단이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산재로 인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무분별한 보상이 우려된다’는 반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 했다.

이 외에도 영업비밀보다 노동자들의 알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노무사는 “캘리포니아주는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을 공개하도록 지방조례로 규정하고 있다”며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화학물질 공개를 강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