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세상 읽기] 반올림, 또 하나의 가족 / 정정훈

참된 2014. 2. 12. 14:12

[세상 읽기] 반올림, 또 하나의 가족 / 정정훈

한겨레   등록 : 2014.02.11 18:44 수정 : 2014.02.11 18:44

 

정정훈 변호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의미있는 흥행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대기업 외압설이 제기되는 등의 불리한 상영 조건에 대해 시민들이 단체관람을 하며 영화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니 더욱 반갑다. <또 하나의 약속>이 이만큼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 이외에도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직업병 피해자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국내 최초로 백혈병에 대한 산업재해 판정을 받은 고 황유미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근무하다 발병한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문제는 당시만 해도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힘든 문제였다. 게다가 상대가 ‘초일류기업’ 삼성전자임을 고려하면,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현실은 피해자 가족들만이 절규하는 메아리 없는 호소로 그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으로, 사회적 이야기로 만든 데에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라는 단체와 그 활동가들이 있었다.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주인공인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비롯하여 직업병 피해자 가족들은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다. 지난 7년간 반올림 활동가들과 피해자 가족들은 삼성과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현장에 늘 함께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죽는 문제인데 어쩜 이렇게 세상이 단단한 벽 같을까. 절망까지는 아닌데 때로는 자괴감도 느꼈다.”(<서울대저널> 2013년 9월4일치) 그동안의 반올림 활동 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한 이종란 노무사의 대답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난주(김규리) 역의 실제 모델인 이종란 노무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 인정률이 0.1% 미만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싸움을 해야죠.”

 

잘못된 제도와 관행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당장은 ‘지는 싸움’에 의미를 걸고, 희망의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그 ‘지는 싸움’이 끝내 세상을 바꿀 변화의 균열을 만들어낼 것임을 믿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반올림은 수년간의 ‘지는 싸움’을 통해 국내 최초로 백혈병 산재인정 판결을 만들어냈고, 2013년에는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범위를 대폭 확대하도록 하는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종란 노무사 이외에도 반올림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기억해야 할 이름이 많다. 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황상기씨의 손을 처음으로 맞잡고 함께 문제를 제기한 다산인권센터의 박진 활동가, ‘삼성 직업병 통역사’를 자처하며 산업재해의 의학적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직업의학과 전문의 공유정옥,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다 반올림 상임활동가로 결합한 권영은 활동가,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뒤 바로 반올림에서 상근활동을 하고 있는 임자운 변호사, 그리고 직업성 백혈병으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 가족이자 스스로 삼성전자에서 근무한 경험으로 반올림에 결합하여 활동해온 정애정씨 등 수많은 사람들이 반올림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인권변호사로 변모해가는 ‘인간 노무현’을 떠올렸듯이, <또 하나의 약속>을 본 관객들이 이 활동가들의 존재와 이름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당시에 ‘지는 싸움’을 함께 한 ‘또 하나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로 오래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