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영화

‘현장의 카메라’가 지나온 정거장에서 태준식

참된 2014. 1. 25. 17:56

‘현장의 카메라’가 지나온 정거장에서
Corée
[42호] 2012년 03월 13일 (화) 14:33:32 태준식 info@ilemonde.co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 사회 변혁의 역사는 패배를 확인하고 자인하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모색의 역사였다. 하다못해 자그마한 승리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쫀쫀한 마음이 돼간 것이 그 역사를 담당해온 민중과 활동가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더욱 우리끼리 담당해야 할 무게를 나누고 공감하고 더 넓은 우주와의 소통을 고민해야 할 지점에 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끊어질 듯 끊이지 않고 살아남아온 '현장을 지켜온 카메라'(이하 현카)가 세상에 손 벌리는 이 순간, 남다른 감회와 감동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장'에 있는 카메라는 아니지만, 그 카메라에서 시작해 그 카메라로부터 삶의 큰 자극을 받는 한 명의 작가로서 말이다. 이 글은 투쟁하는 민중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성명서를 쓰는 선동가이자, 현장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촘촘하게 세상을 그려온 날카로운 학자인 현카가 지나온 몇 개의 정거장을 돌아보는 글이다.

   
2008년 9월5일, 기륭전자 투쟁 단식농성 87일차. 누워 있는 김소연 분회장을 영상으로 담고 있는 고(故) 김천석 ⓒ 그곳에 가고 싶다(http://www.mipaseok.com)

"억울해, 억울해…"- <상계동 올림픽>

수십 년간 영상을 만드는 기술 시장을 장악해온 필름이 종말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점과 남한 사회의 진보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한 시점은 오묘하게 일치한다. 1980년대 초 컬러TV(인터넷 방송 '칼라TV'가 아니라)가 보급되고 비디오 시장이 전문가와 소비자 시장으로 분화된 그 시점, 현카는 민중의 삶과 투쟁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초당 24발 쏘는 총'이라는 1970년대 남미 영화운동가들의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찍는 순간 바로 재생되고 편집되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현장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 첫 번째 정거장은 <상계동 올림픽>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임시 거주지에서 무참하게 쫓겨나는 철거 현장에서 홀로 공무원들과 싸운 한 고등학생의 "억울해, 억울해…" 하는 절규. 어느 주류 미디어도 찾지 않은 현장에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카메라의 존재는 철거민들의 고통과 국가권력의 무참함을 절절히 확인하게 하는 명장면으로 지금까지 영화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리고 민중의 삶과 투쟁의 현장에서 카메라가 '연대'하는 방법, 그중 '투쟁하는 민중의 모습과 가장 닮은 카메라'로서의 '연대'라는 전형을 창출한 작품으로 <상계동 올림픽>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다큐멘터리 연출의 꿈을 품고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이들의 가슴과 머릿속에 <상계동 올림픽>은 하나의 나침반이 아니었을까? 지금 여기, 현카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 소도시만 한 공장 안에 우뚝 서 있는 골리앗 크레인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올라갔다. 파업 선언 이후 대규모로 감행된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기 위해 골리앗에 스스로 올라간 그들은 13일간 골리앗 점거농성 투쟁을 벌인다. 공권력 투입의 긴박함은 주류 미디어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됐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복면을 한 노동자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도망가는 뒷모습만 텔레비전 위로 하염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골리앗 투쟁 전에,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이유와 당위, 그리고 공권력 투입 과정의 입체적인 조명, 자본과 권력의 허를 찌른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 진입과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노동자·학생의 거리투쟁을 그려낸 작품이 있다. <노동자뉴스 제5호>이다.

'불타는 골리앗'- <노동자뉴스 제5호>

이 작품을 만든 단체는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이었다. 노뉴단은 1989년 <노동자뉴스 제1호>를 시작으로 주류 미디어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대안미디어로서 자기 정립과 대중조직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추구한다. 현카가 현장과 연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 끊임없이 내부자로 스며들어가기를 욕망하는 시선이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최초의 단체였던 것이다. '연대'라 쓰고, '복무'라 당당하고 선명하게 읽어 내려간 영상운동 단체들이 과연 있었던가. 노뉴단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이후 노뉴단은 노동운동뿐 아니라 미디어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한다. 주요한 정책 생산과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를 위한 현장 노동자와 시민들의 교감 과정은 현카의 지금을 가능케 했다. 현카의 '현장'과 '카메라'는 노뉴단의 20년이 넘는 역사에 진 빚이 적지 않다.

구제금융과 우파 개혁 정권의 등장으로 이곳의 진보운동은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듣도 보도 못한 비정규직의 등장은 낯설었고, 생산과 경쟁의 논리로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메워지는 자연과 민중의 삶터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벌어질 일이라는 공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낯선 분절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소통 체계였다. 테이프를 통한 배급이라는 한계 탓에 전투적이면서 조직적인 배급 체계를 늘 고민해야 했던 현카에 인터넷은 새로운 기획과 제작의 모델을 요구했다. 1996~97년 총파업 투쟁에서 시작된 영상과 통신의 융합을 통한 활동 모델은,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방송국의 탄생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더불어 단체에 속한 활동가로 존재하던 현카가 본격적으로 다양한 삶과 투쟁의 공간에 '개인'으로 침투해 역할을 하는 기폭제가 됐다. 그 와중에 2001년 4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잔인한 폭력이 벌어진다. 거기에 있었던 카메라는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2명뿐이었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을 기록한 카메라가 앰뷸런스에 실려가던 한 노동자를 촬영하는 순간 노동자의 피가 렌즈에 튀었고, 카메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끄지 않고 카메라를 돌렸다. 이 영상은 즉시 편집돼 민중언론 <참세상>의 서버를 통해 곧바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영상을 본 사람은 수백만 명에 이르렀고,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수세에 몰렸던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공세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02년 철도·가스·발전 민영화 저지 투쟁에 함께했던 현카는 지속적인 산개투쟁을 벌이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파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투쟁의 한 축을 담당한다. 또한 2004년 전북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 2008년 촛불 투쟁에서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한 영상의 소통 방식은,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방송국과 개인으로 현장에 뿌리박힌 현카에 의해 맹아가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가. '그 기억의 본질이 무엇인가' 냉정하게 질문하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있다. <두 개의 문>에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한 인물이 인터뷰를 한다. 인터넷 방송국 '칼라TV' 활동가 박성훈씨. 지금까지 생산돼온 현카의 작품 속에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이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생경한 경험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의 높은 문제의식과 완성도 있는 표현 방식의 근간을 본다면 그이의 인터뷰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는 용산 참사가 벌어지는 그 전날과 망루가 불타오르던 바로 그 순간, 망루에 있던 망자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목소리로 현장을 충실히 기록했다. 이 영상을 기반으로 <두 개의 문>은 용산 참사의 본질인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이야기로 발전해간다. 마치 그 기록 영상의 의미를 아는 듯 조심스레 정성 들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축해간다. 어찌 보면 <두 개의 문>은 칼라tv를 비롯해 현장을 지킨 이들의 영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다르게 질문해보자. <두 개의 문>을 연출·제작한 '연분홍치마' 또한 현장과 가까이에서 활동한 현카였기에 그 기록 영상이 빛나며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1980년대 후반 시작된 현카의 활동이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역사로서 기록되며 다양한 방식으로 성과물이 나오는 지금, <두 개의 문>은 기록과 표현, 제작 문화와 작품의 소통 등 그간 제기된 현카 활동의 이슈를 큰 틀에서 정리하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렌즈에 튄 피'- <대우차 투쟁 속보>

어디 이뿐인가. 2009년 여름 불타는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 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던 현카는 당장의 소식을 외부로 소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결과물을 총합하는 <당신과 나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 성공한다. 4대강 반대 '강, 원래 프로젝트'는 또 어떠한가. 지역과 단체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활동가와 독립영화 작가들이 그간의 조급한 작품 생산 활동에 머무르던 사안별 연대방식을 보기 좋게 비껴가며 거대한 하나의 옴니버스 작품을 완성해냈다. 이른바 '사안별 연대'에서 '사안과 연대'하는 현카의 새로운 모범을 만들어내며 4대강을 저지하려는 공동체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성과도 남겼다. 현카는 지금도 살아 있다. 삶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생명이 파괴되는 어느 소도시의 논밭 위 공장에도, 강가의 비닐하우스에도,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농성천막에도 가장 낮은 방식으로, 가장 긴 호흡으로 카메라를 들고서 말이다. 그들과 함께 다음 버스의 정류장, 또 더 나은 정류장으로 같이 타고 갈 것이다.

"저기 안에 사람이 있어!"- <두 개의 문>

어떤 이의 죽음 때문에 산 자들이 빚지고 활동한다는 것. 진보운동 역사에서 흔히 있어온 일이다. 다만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산 자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이후 활동에는 짙은 진정성이 묻어날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상징이 되었고,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까지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폭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했던 한 카메라가 있었다. 김천석.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우리의 친구임을 알고 작은 활동에도 큰 웃음을 지으며 살았던 한 카메라가 있었다. 숲 속 홍길동 이상현. 이 둘은 지속적인 생계의 압박과 자신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를 확인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느 누구보다 '현장'과 가까이 있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으며, 그들을 지키고 세상에 알리는 데 헌신한 이들의 죽음. 그들과 같은 꿈을 가지고 활동했던 현카는 물론, 그들에게 빚졌다 생각하는 이들까지 쉬이 넘길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현재진행형이다.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과 쫓겨나는 철거민들이 있는데 더 특수할 게 있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 적어왔듯, 이 땅의 진보를 위한 투쟁에 적잖은 역할을 한 역사가 있음에도 당장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현카라는 동지들이 스스로 세상에 우리를 봐달라고, 두 사람의 죽음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대답은 우리 편, 당신들이 할 차례다.


글•태준식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8일 옥쇄파업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2010),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의 삶을 다룬 <어머니>(2012) 등을 연출했다.

*앞에 쓴 ‘정거장’이라는 개념은 경기도 안산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미디어 교육과 쉼터를 운영하는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이는 또 다른 ‘현카’ 김이찬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