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최근 <말과 활> 창간호를 발간한 홍세화 발행인이 창간 취지와 진보진영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생각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25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사무실에서 만난 홍세화(66) <말과 활> 발행인은 줄곧 ‘사유’와 ‘학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보적 격월간 정치비평지 <말과 활>의 창간 취지를 듣기 위해 찾은 자리였다. “스피노자는 생각의 속성은 ‘고집’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잘 안 바꾸려고 한다는 거죠.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비어 있을 수 있고, 보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이 여지가 없으면 고집만 남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경향이 강한데, 진보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홍 발행인은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귀국해 언론인, 정당인 등으로 활동해왔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생각의 좌표>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2011년 1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진보신당(지난 21일 ‘노동당’으로 당명 변경)의 당대표를 맡았다. 당 대표를 그만두고 준비한 것이 협동조합 ‘가장자리’와 가장자리에서 발간하는 <말과 활>이다. 가장자리는 지난 7일 총회를 열고 본격적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있고, <말과 활>도 22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가장자리’는 자율적 학습공동체를 지향하는 협동조합으로, 독서-토론 네트워크, 강좌기획, 북카페 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http://cafe.daum.net/bords, 02-3144-3973) 이미 지난달부터 책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지난달에는 16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지식인 에티엔 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과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을 읽었고, 이번 달에는 ‘스노든 사건’을 계기로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있다. 이런 활동들을 관통하는 홍 발행인의 화두는 ‘진보의 교양’이다. 진보정치운동에 깊숙이 몸을 담갔던 그가 다시 ‘공부’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뭘까?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 글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입식 교육이니까요. 자연스럽게 지배이데올로기를 흡수하게 되죠. 문제는 소위 ‘진보진영’조차도 ‘주입식 진보’라는 점입니다.” 학습 안하면 지배담론 휩쓸려자본주의 체제의 진보는 ‘좌파’
‘불안정 노동자’를 변혁 주체로 그는 “대부분 진보진영 사람들이 대학 때 ‘선배 잘못 만나’ 의식화 교육을 받고 현대사와 사회주의 등을 공부하는데, 거기에서 학습이 정지된다”며 “그 이후에는 진영 안의 헤게모니 싸움이나 세력관계에 몰두하느라 변화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에 “나는 의식화돼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오만함, 도덕적 우월감”까지 더해져 다른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니 대응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최대 문제인 ‘노동의 분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노동의 불안정화 문제 등에 진보진영이 대처하지 못 하는 것도 이런 연유라고 그는 지적한다.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학습’이, ‘교양’이 필요한 것일까? “책을 안 읽어도 되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지요.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배층의 담론들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세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휩쓸리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교양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적 교양’이다. 홍 발행인에게 진보는 ‘좌파’이며, 이 시대 가장 주요한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파생된다. “사실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렸을 때부터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자본주의 안에서의 지배와 피지배 문제, 복종과 규율 문제, 물성으로 인한 인간성과 인간관계의 훼손 문제 등에 대해 인문주의적 성찰을 해야 합니다. 현상적인 기득권다툼, 이권다툼 등을 놓고 상대적으로 ‘상식적인’ 주장을 한다고 진보인 것은 아니니까요.” 그가 붙들고 있는 또 하나의 화두는 ‘배제된 자들’이다. 비정규직, 실업자, ‘알바’ 등 이른바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자)가 그 중심이다. “이들은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과 달리 ‘노동’으로부터도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변혁의 주체로 세울 것인가가 앞으로 진보진영의 최대 고민이 될 것입니다.” 자동화, 기계화, 정보화 등의 영향으로 노동자가 질적으로 수적으로 지위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 역시 녹록지 않은 문제를 던진다.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이론에는 커다란 ‘도전’이 되는 셈이다. ‘보편적 복지국가’ 담론 역시 수정을 요구받게 될지 모른다. 홍 발행인이 ‘기본소득제’(취업 여부, 소득, 나이 등 조건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지급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도 이런 변화한 현실과 연결돼 있다. “기본소득제가 오늘날 좌파의 무기력을 넘어서는 대안이면서 변화의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이니만큼 앞으로 더 고민하고 공부해야겠지요.”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인문적 정치비평지 지제크 기고 등 실어 격월간지 ‘말과 활’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