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4일은 지난해 향년 89세로 생을 마친 故 이일재 선생의 1주기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한 그는 생을 마치기 전까지도 노동자운동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해방 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과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고, 대구 10월 항쟁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전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1968년에는 남조선 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옥살이 했다. 출소 이후 민주노총 지도위원,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지도위원 등을 맡으며 노동운동에 한 평생을 바쳤다.
그의 1주기를 맞아 <레프트대구> 1호와 2호에 수록된 그와의 인터뷰를 <레프트대구>의 동의를 얻어 뉴스민에 싣는다. 첫 번째 글은 2010년 5월 1일 발간한 <레프트대구> 1호에 실린 인터뷰 글이다. 노태맹 레프트대구 편집위원이 이일재 선생과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중심으로 인터뷰한 글이다. 두 번째 글은 2010년 12월 3일 발간한 <레프트대구> 2호에 실린 글로, 천용길 레프트대구 편집위원이 인터뷰한 녹취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1) 노동자 평의회의 길을 향하여
2) 오늘 우리에게 좌파란 무엇인가?
좌파의 개념
좌파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겠어? 좌파 내에서도 좌/우가 있고, 우파 내에서도 좌/우가 있는 것처럼. 이 좌파/우파의 개념은 프랑스에서 생겨났는데 로베스 피에르 정권에 대한 반대냐 찬성이냐를 두고 좌/우 축에 나눠져 앉아 있었다는데서 시작하잖아. 우리나라에 비추어보면 해방 이후 좌/우파라는 개념은 친일파를 제외하고, 김구, 김규식 등을 우파라고 하고, 조선공산당, 남로당 등을 좌파라고 규정하지.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을 좌파라고 하고, 소극적이고 점진적인 것을 우파라고 하지.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 절대적인 좌/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야.
해방 이후, 분단을 어떻게 보아야 했나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된 것은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어.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전후 처리문제였던거지. 남/북을 분할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정치적 타협에 의한 것이었지. 확실한 것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주변 강대국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독립할 힘이 없었다는 거지.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면 좌/우파로 나뉘어져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았을 거야.
카이로선언과 포츠담회담에서 루즈벨트, 스탈린에 의해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시켜주자고 합의한 거야. 당시에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던 우리는 소련이 남한까지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어. 소련이 미국보다 한반도에 먼저 들어왔거든. 우리는 남에서 플랜카드를 내걸기도 하며 소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내려 오는 거야. 소련군은 8월에 원산에 상륙했거든. 미군은 9월에서야 남한에 들어왔는데 말이야. 그때부터 민족분단이 시작된 거지. 이미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는 그러한 합의가 있었고. 그런데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동맹국하고 연합군 사이의 대립만큼이나 연합군 내에서도 대립점이 있었다는 것이 감지되고 있었어. 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소 양국이 38선을 두고 나누기로 한 거야. 그래서 38선이 생겼어.
그런데 처음 신탁통치에 대한 안이 나왔을 때는 좌익이고 우익이고 신탁통치를 반대했어. 그해 11월 모스크바3상회의를 했어. 조선을 약 5년간 후원기간을 둔다는 신탁통치를. 신탁통치를 오펠카라고 하는데, 신탁통치라는 말도 있고, 후원이라는 말도 있어. 당시에는 신탁통치를 강조하지 않고, 후원만 강조한 거야. 신탁통치를 처음에 반대했던 공산당이 반대를 하지 않고 찬성으로 돌아섰어. 오히려 우익 쪽에서 반대했어. 내가 봤을 때 조선공산당이 큰 실수를 한 거야. 그리고 내 평생 가장 후회할 일이라고 생각해. 여기서는 좌/우파가 같이 반대를 했어야 했어. 이것은 계급적 문제보다는 민족적 문제였잖아. 그러면 계급적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민족적 문제로 봐야 하잖아.
처음에는 김구, 김규식과 같은 우익들과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같은 좌익들이 같이 반대했지. 그러다가 9월쯤 돼서 갑자기 지지하라는 거야. 당시 난 공산당 당원이었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 당시에는 일정 때 공산당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도했지. 난 해방 이후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게 남쪽 좌파들이 실수한 거야. 북에서도 미/소간의 대립으로 안 보고 민족적인 문제로 봤으면 반대했어야지. 처음에는 좌/우익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모스크바3상회의를 반대했거든. 지금의 대구 상공회의소 쪽에서 집회를 했는데, 당시 대구 시민이 20만명 이었는데 집회에 온 사람이 7~8천은 되었어. 그만큼 신탁통치를 반대했었거든.
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 회의가 열렸을 당시, 김일성이 참가했어. 그때 김일성이 남한 문제는 남한의 노동자, 농민이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 물론 당시 김일성의 발언이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겠지만, 나는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이 닿는다고 해야 하나, 북한에서 내려오는 지령에만 집중했어.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좀 달랐어. 나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양쪽 진영에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된 이상, 남한의 문제는 남한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당시 남한 사회에 남아있던 좌파들은 독자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야. 능력이 없었지.
치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좌파의 삶
이후 북한과 남한에서 각각의 정부가 수립됐어. 북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가, 남한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됐지. 그래서 공산당 활동 하던 사람들은 북으로 많이 갔어. 나이 많은 선배들이나 신분이 노출돼 도시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북으로 갔지. 나는 한참 활동할 청년이었으니 북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 북한에 관동정치학교가 있는데, 남쪽 공산당 간부들을 교육시킨 후 다시 내보냈지. 그때 두 사람이 올라갔었는데, 때마침 대구에서 10월항쟁이 일어나 학교도 다 마치지 않고 내려왔더라고.
해방 직후에 나는 북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이었어.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달랐어.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이나 이현상 같은 사람들도 다 올라갔잖아. 당시 박헌영하고 김일성하고 합동해서 남한에 대한 정책이나 지령을 내렸어. 그런데 나는 어떻게 됐냐하면 47년 미군정 재판을 받았어. 당시에는 통역이 없어서 영문과 학생들이 통역했는데 한국 학생들이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들은 다 빼고 ‘벽보 붙인 것, 시위주도한 것’으로만 해서 6달 징역만 살고 나와서 다시 시작했지. 그 무렵 공산당, 신민당, 근민당 합당이 시작됐어. 나는 도당에서 파견하는 영천군 조직책으로 갔지. 거기서 또 잡히고 나서 완전히 위장했어. 이름도 바꾸고, 다리에 털이 있으면 농민으로 안 보이니까 털을 다 뽑고 가명도 쓰고 그랬어. 당시 잡히면 바로 죽음이었으니까.
당시 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경군 노동책으로 갔다가 군 조직책 역할하다 또 붙잡혀서 48년 10월쯤 다시 나왔지. 그러고서 경산군당 책임자로 갔어. 나를 안내하던 사람의 따님이랑 내가 혼인을 했어. 거기서 프락치가 나왔어. 당시에 군 단위로 무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탈취한 칼빈총을 가지고 무장했지. 주 활동 무대가 팔공산, 운문산, 비슬산 3군데였어. 그때까지도 도당에서 지령이 안 내려왔어. 무장하는 것이 금지된 거지.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총칼에 찔려죽어 나가는데 무장을 안 할 수가 있나. 무장한 사람들을 도당에서 ‘극좌모험주의자’라고 제명했어. 그러다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용감한 7인조’라며 도당에서 다시 소환을 하라는 거야. 다시 소환되어 복귀하고 그 사람들 중심으로 유격대를 만들었지. 그게 유격대의 시초야. 그때는 무장투쟁이 금지돼 있었지만 무장투쟁을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 나도 문경탄광에서 파업을 했어. 파업한 노동자들 다수가 무장을 했지.
오늘날 노동운동을 말하다.
해방 직후에 정부에서 세운 어용노조인 대한노총이 전평을 억압했었어. 대한노총은 지금의 한국노총의 전신이야. 관제적인 어용이었지. 그런데 이쪽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그러면서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지. 그것이 전노협을 거쳐 탄생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이야. 그런데 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한계가 분명해. 정부와 자본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거지. 물론,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노동환경 개선 등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결정권은 크게 없는 거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운동은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투쟁은 못 해. 할 수가 없는 거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 놓은 제도 아래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인데, 민주노총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고 봐.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해.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게 합법적 틀 안에서만은 할 수가 없어. 자생적 운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우리나라처럼 감시와 사찰이 심한 나라에서는 더더욱 힘들지.
이는 진보정당 운동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여/야의 구도아래에서 야당의 역할을 하는 것은 관제야. 제도적인 틀 안에서 한 모서리만큼 밖에 차지할 수가 없어.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러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는 힘들어. 구체성도 없다고 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도권 정당이 될 거야. 그렇다고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것 역시, 합법으로든 비합법으로든 불가능하다고 봐. 계속 강조하지만 치밀한 감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야. 우리나라는 중남미 국가들과는 다르다고 봐.
그렇다고 민주노총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민주노총이 담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투쟁을 만들어 나가고, 현장 속에서 구체적인 운동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지. 공장 안에서, 현장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써클을 만들고, 이를 현장조직으로 확대해 나가는 거지. 처음에는 친목계모임을 만들더라도 현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브나로드 운동처럼 구체적으로 공장 속에서 처우개선에 대한 투쟁부터 시작해서 써클운동으로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이야. 독자적이고 자생적인 운동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할 때 올바른 계급적 운동이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
좌파(공산주의자)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지금 내 입장에서 보자면 북하고 남하고 연결시키지 말자는 거야. 분단이 60년이나 지나오면서 제도와 관습이 달라졌는데, 같이 보지 말자는 거지. 민족문제를 중심에 놓고 보지 말자는 거야. 북쪽의 정책을 남한까지 연결시키겠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야. 민족적으로 통일은 되어야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장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는 아니라는 거지.
독일은 주체적으로, 스스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개입 없이 통일했어. 우리하고는 또 달라.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방파제야. 미국 역시도 한반도는 진출경로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수 천년 동안 같은 말을 쓰고, 같이 생활한 사람들이 분단된 것은 통일해야지. 그런데 지금 통일하자는 것은 허황된 소리지. 남에서도 계급의 문제, 북에서도 계급의 문제, 북에서도 계급은 있거든. 관료층과 인민대중 사이에는 계급이 있어. 남쪽은 말할 것도 없지. 여기는 합법적으로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지배하고 있거든. 좌파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황 속에서 좌쪽에 서느냐, 우쪽에 서느냐는 것이지. 진취적으로 나가자는 거냐, 과거를 지키자는 거냐. 좌우는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달라지는 것이지.
후배들은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도 북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 해방 직후와 지금의 북한 권력층도 변화가 있었다는 거야. 북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것은 용감한 일이긴 한데, 남한 사회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야. 북한에 관계없이 통일 이후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남쪽이든 북쪽이든 서로의 체제를 양보하지는 않지 않겠어? 외세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되고 동/서독처럼 스스로 결합되어 버리면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
남한에서 계급운동이 중요하지. 민족 문제는 다음번에 해결해야지. 민족문제라는 것은 계급적 내용이 있어야지, 계급적 내용이 없으면 뭐가 있나. 진취적이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아. 북한의 사상에 얽매이지 말고, 외국의 사상에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해. 운동을 하다보면 조직들 사이에서 분열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건 그렇게 충분히 좋거든. 억지로 통합하려 하지 말고,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