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현대사 이근원

[아빠의 현대사-58] 사라진 노동정치…다시 시작해야

참된 2013. 3. 2. 10:36

사라진 노동정치…다시 시작해야

[아빠의 현대사-58]다시 시작해야 할 진보정치를 위해

By   /   2013년 2월 28일, 1:09 PM    레디앙

 

 

“우리는 지난 10여 년 간의 노동자 정치에 대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참담한 심정으로 인정하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지만, 허탈감과 좌절에 빠져있는 노동현장을 새로운 노동정치로 묶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정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노동해방의 전망을 버리지 않는 한 노동자 정치는 반드시 꽃 피워야 할 우리의 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한 냉소는 결코 노동자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꿔 온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 정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대단히 혼란스럽고, 어려운 가시밭길이 되겠지만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노동정치의 길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2008년 10월 18일, <노동자 진보정당 건설 전국 추진위원회(준)> 제안문 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자신들이 진보정당이라고 주장하는 당은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녹색당> 등 무려 네 개다.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면서 이합집산된 결과다. 또 이 모두를 개량적이라 보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추진위원회(사노위)>라는 계급정당 추진 세력도 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시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정당 추진회의>라는 것을 2012년 11월 10일 발족하고, 활동 중이기도 하다. 이름도 비슷하여 나도 헷갈린다. 너희에게는 재미도 없고, 복잡한 얘기이겠지만 그래도 오늘 진보정치의 현실이니까 그 과정을 보도록 하자.

오색볼펜을 건네다

파동이 가라앉은 후 당시 연맹이 있었던 뚝섬역 부근 한 술집에서 한석호를 만났다. 그는 오랜 동지이자 후배였다. 정말이지 한 대 쥐어 패고 싶을 정도로 야속했다. 가끔 나보고 ‘사무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무라이는 일본 무사를 칭하는 말로 좋은 별명은 아니다. 한 칼에 베고,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겠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운동의 길을 달리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아는 척도 안 한다. 남들이 보면 모질다고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그렇게 움직인다. 그러나 한석호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오랜 동안 동지로, 후배로 마음을 맞춰 온 과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분당을 추진한 이유로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공정한 노선 경쟁이 불가능하고, 그대로 놔두면 당이 변질되어 2012년에는 보수야당과 선거연합 등을 추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자주파의 패악질과 싸우다가 우리 역시 그들을 서로 닮아가고 있어 운동성이 사라지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의 행동과 발언에 용서를 구한다고 언론에 썼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색볼펜 한 자루를 주었다. 세상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긴 불면의 밤들과 고통스런 나날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당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너희가 잘 아는 은우아빠, 나상윤이 한 말이었다.

“당 활동가 당신들이 티코라면 대중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는 기차다. 티코가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기차는 길게 돌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누가 더 빠른지 알게 된다.” 맞는 말이다. 티코처럼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민주노동당을 깨버렸지만 돌아선 노동자들의 마음을 잡을 방법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신당파는 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기차는 티코와 달리 길게 돌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전진을 탈퇴하다

그토록 긴 시간동안 교육하고, 어렵게 조직한 조합원 당원들에게 민주노동당 분당을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당신들이 새로운 당을 만들어 제대로 된 대응을 할 때까지 또 기다리란 말이냐?”라고 말하는 조합원에게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종북주의’라는 처음 듣는 새로운 단어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왜 당 안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구조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진

‘전진’의 회의 모습

분당 과정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대중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전 과정은 <전진>을 중심으로 한 상층 활동가들이 마구, 미친 듯이 몰아간 과정이었다. <전진>의 중요 성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도 모르게 말이다.

나는 지금도 자주파의 패권주의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들의 사상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문제라는 입장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2000년 그들과 함께 당을 만들었을 때부터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몰론 그들의 패권적 태도가 도를 넘어섰지만, 적어도 그들과 갈라서려면 전략적인 판단이 있어야했다. 그리고 조합원 당원들을 설득할 명분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전진>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한 회원은 “<전진>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브랜드 가치도 없고, 각 조직의 공적이 되었다. 분당 과정을 보면 어린아이들처럼 논두렁에 불을 지르고,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말한다. 노동운동과 당 운동의 결합을 위해 만들고, 그렇게 활동하고자 했던 정치조직이 막상 중요한 시점에서는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안에서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이 내부경선을 할 때 <전진>은 누구를 지지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것인지를 정하지 못한다. 회원 각자가 알아서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다. 그 때부터 회원이 갈라진다. 분당 과정에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달랐다. 누구는 분당을 주장했고, 누구는 당의 전면적 쇄신을 얘기했다. 서로 간에 날선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미 하나의 정치조직으로서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가 대중 앞에서 서로 싸우겠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갈라서는 게 더 예쁜 모습 아닌가?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들이다. 서로 상처를 더 깊게 주기 전에 해산하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왜 조직을 해산해야 하느냐? 당신이 나가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두말 안하고,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수년을 같이 해 온 동지들과도 그렇게 나뉘었다. 진보정당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꿈은 그렇게 상처로 끝난다. 내가 운동을 한 기간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진보신당 창당

탈당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2008년 2월 4일 이후 30여명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대전에서 만난다. 그리고 이후 대안으로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한다. 약칭으로 <노건추>라 했다. 이전에 그와 비슷한 이름이 많아서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을 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중장기전망을 가지고 아래로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게 오묘해서 한번 무너지면 다시 추스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긴 논의와 토론을 통해 2008년 10월 18일에야 정식으로 출범한다. 양경규 위원장을 비롯하여 금속노조의 전재환 위원장, 전교조의 장혜옥 선생님 등 3명을 공동대표로 한다. 긴 논의가 필요했던 것은 분당과 동시에 <진보신당>이 결성되기 때문이다.

백범기념관

진보신당 창당 원탁회의 모습

탈당파들이 중심이 되어 3월 2일 <진보신당 창당을 위한 원탁회의>를 한다. 나와 양경규 위원장이 노동부문으로 배당되어 간다. 효창동에 있는 백범기념관으로 기억된다. 사전 회의를 통해 정리된 대로 양경규 위원장은 이런 입장과 방향을 제출한다.

“오늘의 원탁회의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첫발이며 이를 위해 각계의 추진 단위가 처음으로 만나 먼 미래에 우리가 만들 정당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심상정, 노회찬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동당 탈당그룹이 만들어 놓은 판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한 자리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런 면에서 오늘 결성을 준비하는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정당이라고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해서 만드는 정당은 이렇게 급조해서 만들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이를 새로운 당이라 규정한다면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바로 몇 달 뒤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때문에 진보세력의 결집을 위해 총선용 법적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성격은 총선투쟁을 위한 연대기구일 뿐, 실질적인 창당 작업은 총선이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하나의 정당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이대로 하나의 조직구조가 다시 짜여 질 경우 유력 정치인이나 새로운 당의 조직질서를 통해 ‘리메이크 민주노동당’의 활동모습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들은 주체로 참가하거나 일정한 조직적 흐름을 가지기 보다는 수동적인 모습이 재현될 수 있다.”라고 했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은 없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소리에 불과했다.

엄청난 실망과 화만 내고 온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진보신당>은 제대로 된 성찰과 반성도 없이 몇몇 유명 정치인들에 기대어 민주노동당과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은 노동자들의 논의와 결의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진보신당>이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몸담을 진보정당이 없게 된다. 지난 2012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도 내가 할 일은 없었다. 1992년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를 한 이후 20년만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낸 대통령 선거였다. 허탈한 얘기다.

노동자진보정당건설전국추진위원회- 약칭 ‘노건추’

결국 노동자들 일부는 민주노동당에 남고, 일부는 개인적으로 진보신당에 가입한다.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게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있는 노동자 당원들의 조직적 중심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노동정치의 흐름을 모아내고, 진보신당 제2창당 등에 대응하면서 이후 제대로 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했다.

“10년에 걸친 민주노동당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었다면 좀 더 차분하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 시기 ‘민족주의자와의 결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적으로 공유하고, 이후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노건추’를 만든다. 그러나 논의를 시작한지 꼭 1년만인 2009년 2월 28일 ‘노건추’도 해산한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 지라도 제대로 된 흙을 만나지 못하면 죽고 만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노건추의 애초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고 가능하다”는 사람들과 “진보신당에서 노건추의 문제의식을 실현하자”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노건추’가 해산된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식에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셈이다.

물론 ‘노건추’ 발족을 앞두고 노동조합의 초청을 핑계로 미국으로 도망친(?) 내 책임도 작지 않다. 나는 그 즈음 안식년을 맞아 미국공공서비스노조인 SEIU의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에 가서 그들 노조의 활동을 공부한다.

합당과 탈당의 반복 진행

2011년 초부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진보대통합 논의를 시작한다. 물론 민주노총 등에서 압박을 가한 데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애초 분당의 원인이었던 이념 차이, 패권주의 문제 등으로 결국 무산된다.

뒤이어 벌어진 사태들은 내가 보기엔 개그콘서트보다 재밌는 코미디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은 지 100년도 넘은 마르크스가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 사회 진보정치의 현실을 잘 예견하고 있었을까? 2008년 분당이 비극이었다면, 2011년 합당은 희극이다.

통진당 창당

2012년 총선 개표를 지켜보는 구 통합진보당 지도부. 이들은 이후 곧 갈라선다.

민주노동당과 친노무현 계열인 국민참여당, 그리고 조승수,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 탈당파 등이 2011년 12월 11일 <통합진보당>으로 합쳐진다. 그토록 날을 세워 ‘종북주의’라는 딱지 붙이기로 당을 갈라지게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해명도 없이 다시 그 사람들과 합쳐진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탄압했던 노무현 당이라 불릴 수 있는 유시민이 만든 <국민참여당>과도 진보의 이름으로 하나의 당이 된다. 그리곤 그 덕분에 심상정과 노회찬은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무엇보다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것은 민주노총이다. 둘로 쪼개져 버린 진보정당을 하나로 만들자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비유하자면 한바탕 싸우고 별거 중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라는 부부를 화해시키려 했는데, 갑자기 이웃집 사람인 <국민참여당>하고 결혼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셈이다. 하필이면 한동안 원수로 지내다시피 한 이웃사람하고 말이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다. 다 내 잘못에서 시작한 거고, 우리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었다. “노동정치에 온갖 땀과 눈물을 바쳤지만 죽 쒀서 개 준 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래된 친구이자 얼마전 죽은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원장은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군부독재가 잉태한 학생운동 리더들, 그들의 노동 현장 이전, 그들의 신노선, 그들의 민주노동당이 문을 닫았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투항했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난 줄 알았는데, 추락의 바닥은 이제야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에서 7명, 비례대표로 6명 등 총 13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뒤이어 비례대표를 정하는 당원투표를 둘러싼 의혹이 광범하게 제기된다. 의혹이 있는 2명에 대한 제명안이 부결되고, 중앙위원회에서 참관인들이 난입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TV뉴스는 이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국 진보신당 탈당파인 노회찬, 심상정, 그리고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등이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이라는 당을 새로 만든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재통합을 반대한 사람들이 남은 진보신당은 사회당과 합쳐진다. 그게 지금 남아 있는 <진보신당>이다. 진보신당은 원내 진출에 실패한다.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복원을 위하여

2011년 12월 10일 사람들이 모인다. 어렵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진보정치가 우스갯거리가 되고, 개나 소나 진보의 외양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게 밉다고 자본이 파놓은 파멸의 구렁텅이를 넘어설 새로운 사회를 향한 꿈까지 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양경규 위원장이 거의 1년 동안 전국을 돌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11월 10일 <지역과 현장의 백년둥지, 노동자정당 추진회의>라는 것을 구성한다. 제안문에 실린 내용의 일부로 내 고민을 담고 있다.

추진회의 창립

2011년 노동자정당 추진회의 결성총회 장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자본의 야만적인 탄압이 노동현장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탑에 매달려야 합니다. 한 달이 넘게 단식을 해야 하고, 천 일이 넘게 거리에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노동자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정치적으로 엄호해야 할 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 낸 유력 정치 인사들은 이제 노동자의 곁에서 멀어졌습니다. ‘노동’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차가운 겨울바람과 얼어붙은 땅 뿐이지만 여기에 작은 씨앗 하나를 뿌립니다. 노동자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 갈가리 찢겨버린 현장을 볼 때 누구도 이 싹이 제대로 성장하리라 감히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이 옳다는 독선이 아니라 누군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소명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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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