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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닌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최강서씨 유서 중) 따뜻한 두유를 주머니에 넣어주던 사람
노동자 2명의 죽음 이후 2008년 말 금융위기 전까지 회사는 호황이었다. 임금이 오르고 조합원 복지도 개선됐다. 그사이 최씨는 가정을 꾸려 두 아들(5살·6살)의 아빠가 됐다. 회사는 2006년 7천여억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해 필리핀 수비크에 231만4천㎡(70만 평) 규모의 조선소 건설을 시작했고, 2007년 1단계 공정을 완료해 수주를 받았다. 회사는 고용불안을 우려하는 노조와 ‘국외 공장이 운영되는한 정리해고 등 단체협약상 정년을 보장하지 못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2009년 경기가 나빠지자 회사는 다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2010년 겨울, 회사는 400명에 대한 희망퇴직 계획을 노조에 통보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최씨를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크레인에 오르기 전, 이른 아침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 강서가 두유를 주머니에 넣어주고 갔다. 그게 그렇게 따뜻했다.” 2011년 1월 김진숙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회사는 직장폐쇄 신고를 내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해고자 명단에 최씨 이름이 있었다. 충격이었다. 예전엔 한 번도 구조조정 명단에 올라본 적이 없는 그였다.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노조 대의원 활동이 빌미가 됐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회사가 생존하려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사 쪽 주장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활달하던 최씨의 성격이 조금씩 변했다. 건드리면 언제든 폭발할 뇌관 같았다고 아내 이선화씨는 회고했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과 정치권·노동계·시민사회의 노력으로 2011년 11월, 김진숙 지도위원이 땅으로 내려왔다. 정치권의 중재로 정리해고자 94명(1명은 정년퇴직)의 1년 내 재취업, 해고 기간 중 생계비 지급, 노사 간 민형사상 고소·고발 최소화 등의 내용을 담은 합의안에 노사가 서명했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를 상대로 ‘파업으로 인한 재산 손실을 변상하라’며 158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한진중공업은 합의 직후인 2011년 12월부터 순환휴직제를 시행했다. 작업 물량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파업이 끝났지만 조합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2년 1월 새노조가 설립됐다. 기존 노조를 탈퇴하는 조합원이 늘어났다. 입사 동기인 이아무개(38) 조합원은 최씨가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이력서의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파업이 끝난 뒤 최씨는 누나와 작은 가게를 꾸려 일하며 복직을 기다렸다. 아내 이씨는 복직하던 날 남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잔뜩 기대를 품고 출근을 했는데, 회사가 무기한 휴직을 시켰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집에 왔다. 그 실망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복직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지자, 그는 더 이상 분노를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11월 말부터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대선 개표가 있던 12월19일 밤, 그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다짐 같았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자나. 뭐든지 열심히 할게. 더 열심히 끝까지 덤벼보지 뭐.” 대선 결과에 대한 실망감을 비치기도 했다. “대선마저 날 배신해. 노동은 없다. 속이 속이 아니게 됐다. 힘든 5년 다시 시작.” 복직을 위해 찍은 이력서용 증명사진은 결국 영정사진이 됐다. 밤이 깊어지자 빈소를 지키던 조합원들은 하나둘 탁자 밑으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한쪽 구석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던 김지훈(32)씨는 “그렇게 힘든 것도 모르고 형 앞에서 내 이야기만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12월26일 아침 7시, 수은주가 영하 6℃를 가리켰다. 차해도 지회장 등 상복 차림의 조합원 20여 명이 영도조선소 앞에 길게 늘어섰다. “동지들, 최강서의 죽음을 돌아보십시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공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동자들 등 뒤로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맵찬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동료의 죽음을 내놓고 함께 슬퍼하기엔 일자리가 급했기 때문일까, 차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였을까.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비슷한 시각, 울산 동구 전하동 현대 중공업 정문 앞에서도 필사적인 외침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4만여 명의 정규직·사내하청업체 직원들이 일터로 향하는 길목이다. 정문 건너편에서 100여명의 사내들이 ‘해고는 살인이다’ ‘비정규직 철폐’ 등의 글귀가 적힌 20여 개의 만장을 펼쳐들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인 이운남씨의 영결식에 참석한 조합원들이었다. 이씨의 17년 지기인 강창원(41)씨가 단상에 올라 추모글을 읽어 내려갔다. “미안하다 운남아. 부디 편히 잘 가라.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사랑한다 친구야.” 북받쳐오르는 설움을 애써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남 영암 출신인 이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1990년 서울 성수동의 한 업체 노동자가 됐을 때 그는 19살이었다.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 노동자였던 박성식(43) 민주노총 부대변인은 야학 교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여린 후배였다. 특히 시 쓰는 걸 좋아했다.” 1년 뒤 그는 박 부대변인과 함께 울산에 내려가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에 취직했다. 생계도 꾸리고 노동운동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심한 폭행당하며 끌려와 구속돼
이씨가 마음의 병을 얻은 건 그 무렵이었다. 2003년 그는 사내하청 노조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고를 당했다. 그와 함께 해고된 박일수(당시 50살)씨는 2004년 2월15일 회사 안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박씨가 남긴 유서에는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노조에 남아 복직 투쟁을 벌일까도 생각해봤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택배회사를 다니다 택시회사로 일터를 옮겼다. 노동자 출자 회사였던 택시회사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곧 시련이 찾아왔다. 노동자들이 만든 회사에서도 부당 해고가 벌어지고, 복직 소송에서 이겨 복귀한 해고자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일할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사표를 냈다. 그의 자책감은 쌍용차·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며 더욱 심해졌다. “예전에 내가 열심히 싸우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 내 탓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으로가는 희망버스에 오르며 마음의 빚을 덜고자 했다. 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동료 윤종길(44)씨는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운남이는 가끔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다 울부짖곤 했다”고 전했다. 폭력의 상처도 갈수록 악화됐다. 이씨가 목숨을 끊기 하루 전인 12월21일, 그의 스마트폰 메신저에는 이날 현대차 사내하청 노조가 용역 직원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올라왔다. 2004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힘들어 죽겠어. 손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못하겠어.” 친구 강씨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하며 “내가 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씨의 머릿속에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었다.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이 현재의 시간 지평으로 암울한 과거를 거듭해 불러들인 것이다. 강씨와 통화하고 1시간이 지난 뒤 이씨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이호일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 지부장은 부당 해고의 덫에 걸렸다. 1992년 모교인 외대 행정지원처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98년 노조에 가입했다. 2006년 한국외대 노조는 대학 쪽이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교섭을 거부하자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노조 정책국장이었다. 파업에 대응하는 대학의 태도는 강경했다. 7개월간 이어진 파업 기간 동안 임금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버틴 조합원 160여 명이 대부분 3천만~4천만원의 빚을 질 만큼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언론에서는 노조를 ‘철밥통 파렴치 집단’으로 몰고 갔다.
대법원 판결로 복직 뒤 엉뚱한 곳 발령
12월 대선은 꺼져가던 등불에 찬바람이 불어닥친 격이었다. 3명의 노동자가 고단한 삶을 극단적 방식으로 정리하는 분기점이 돼버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진단했다. “탈진할 대로 탈진한 현장 투쟁 노동자들은, 약자에게 혹독했던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지켜보며 더 이상 버틸 기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은 떠났다. 그러나 그들을 아득한 절망으로 내몰았던 손해배상 소송과 비정규직 차별, 무분별한 해고 행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도 누군가의 몸뚱이를 천근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무거운 바윗돌이다.
부산=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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