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 2012년 한국 노동자의 마지막 비상구
평택 동두천 아산/정환봉 홍용덕 박아름 최유빈 김규남 기자 bonge@hani.co.kr 한겨레 등록 : 2012.11.22 21:11수정 : 2012.11.23 10:54
[뉴스쏙] 전국 고공농성 현장 5곳 가보니
전국 곳곳의 하늘은 지금 농성중이다.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36)씨가 지난 10월 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 농성을 시작한 것을 비롯해 전국 5곳에서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22일 오전 회사의 협상 재개 결정으로 농성을 접은 광원목재 이승범(35)씨를 제외하면, 언제 그들이 다시 땅을 밟을지 알 수 없다. 22일 오전 평택·동두천·아산 등의 농성 현장을 찾아 그들이 추락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에 오르는 이유를 들어봤다.
이승범씨는 지난 20일 경기도 평택 광원목재 공장의 높이 50m짜리 기계설비에 올랐다. 민주노총 평택·안성지역노동조합 광원목재지회장인 이씨는 난간도 없는 너비 1m의 철제 구조물 위에서 나무와 포르말린 냄새를 맡으며 꼬박 이틀을 버텼다.
22일 낮 평택·안성지역노조의 정미(43) 위원장이 회사와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두꺼운 점퍼에 털모자를 쓴 이씨는 추위로 굳은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 땅으로 내려왔다. “술만 있으면 되지?” 정 위원장이 웃으며 물었다. “김치찌개.” 춥고 배고팠던 이씨가 대꾸했다.
합판 제조회사인 광원목재 노동자들은 24시간 맞교대로 일해왔다. 노조는 3교대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근로기준법은 주 12시간 이상 초과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노조는 협상 개시와 함께 회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했다. 회사는 협상장을 떠났다. 70명 규모의 사업장에 조합원은 16명뿐, 힘없는 노조는 회사가 협상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씨는 고공농성을 택했다. 그제야 회사는 협상을 재개했고 결국 3교대 요구를 받아들였다.
22일 이씨가 내려오면서 전국의 고공농성 사업장은 다섯 곳에서 네 곳으로 줄었지만, 나머지 하늘에서 벌어지는 사연도 이씨만큼이나 절박하다.
울산·아산·평택·동두천에선
길이 없어 하늘 오른 노동자가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외친다
3층짜리 경기 동두천시청 건물 옥상 8m 높이의 철탑에는 ‘부당해고 철회’라 적힌 펼침막이 걸려 있다. 철탑 위에서 차재만(43)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버스본부 정비지회 사무장 등 2명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성상운(52) 대양운수분회장의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9일째 농성중이다. 73명의 버스기사가 일하는 대양운수에 올 7월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탄생했다. 조합원은 5명이었다. 바로 다음날 복수노조가 만들어졌다. 노동자 50여명이 두번째 노조에 가입했다.
민주노조를 만든 성 분회장은 10월4일 버스 배차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그 후 노조원 2명이 탈퇴하고 1명이 퇴직했다. 싸울 힘을 잃은 성 분회장을 대신해 상급단체인 공공운수노조 간부들이 농성에 들어갔다. 추위를 피하느라 침낭에 몸을 파묻은 차 사무장은 “신호를 지키려다 보면 배차가 늦어질 수도 있는데 그걸 빌미로 해고까지 했으니 민주노조 탄압으로 볼 수밖에 없다. 33일간 협상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어 이렇게 올라왔다”고 말했다.
충남 아산의 유성기업 공장 옆 5m 높이의 굴다리에도 사람이 매달려 있다. 굴다리 위에는 왕복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아래에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있다. 화물트럭이 쉴새없이 위아래로 달리는 다리는 늘 흔들린다. 다리 난간에 가로 2m, 세로 1m 넓이의 합판을 끈으로 묶어 고정시킨 고공농성장을 홍종인(39)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이 지키고 있다.
홍 지회장은 “지난해 직장폐쇄가 불법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회사와 창조컨설팅의 시도였다는 사실이 10월 국정감사에서 드러났지만, 아무도 법을 어긴 사쪽을 처벌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지난해 5월부터 23차례에 걸쳐 사쪽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고소장을 고용노동부에 접수했지만 검찰 송치는 올해 9월에야 이뤄졌다. 언제 수사가 끝나고 판결이 날지 알 수 없다. 사쪽 처벌을 요구해온 홍 지회장은 고공농성밖에 선택할 것이 없었다.
37일째 울산 현대차 공장 앞 송전탑에서 농성중인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씨는 2005년 3월 부당해고를 주장하며 처음 법원 문을 두드렸다. 2010년 7월, 그리고 올해 2월 대법원은 “최씨는 불법파견 노동자인 만큼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로 봐야 한다”며 두 차례나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회사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5곳의 고공농성자 가운데 가장 먼저 철탑에 오른 최씨는 오히려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있다. 2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평택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에게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현대차·유성·대양운수·쌍용차
해고자들 위험 무릅쓰고 올라
광원목재는 22일 협상 타결돼
외국선 극히 드문 ‘한국형 시위’
기업 불법·탈법에 처벌 약하고
노조약화·진보정당 위축 탓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쌍용차 사태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20일 평택 쌍용차 공장 앞 송전탑에 올랐다. 22일 아침에 찾은 농성장은 경찰, 소방관, 한국전력 및 쌍용차 직원들이 뒤섞여 혼잡했다. 농성장 안전을 위해 발판을 설치하는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고공농성을 벌이기 전까지 해고자들은 당국의 이런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하늘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유연화 정책이 본격 시작된 2000년대부터다. 처음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하늘에 올랐다.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2003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129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는 ‘노동자가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엔 비정규직이 하늘을 올랐다. 2008년 당시 철도노조 케이티엑스 승무지부장이었던 오미선(33)씨는 서울역 앞 40m 높이의 조명탑 위에 올라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해고 뒤 3년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철탑 위에서 호소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희망이 아니리 절망을 업고 올라갔다”고 오 전 지부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같은 해 이대우(38) 전 금속노조 지엠대우차 비정규직지회장도 인천시 부평구청 앞 폐회로카메라 관제탑에 올랐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복직’을 걸고 71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 후로도 로케트전기 해고자, 코스콤 비정규직,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철탑과 망루에 올랐다.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시위 형태다. 외국의 경우 환경단체가 나무 위에 올라가는 고공시위를 간혹 벌이지만, 노동자들이 철탑에 올라 장기 농성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은 △기업·정부와 노동자 간 정상적 소통의 부재 △기업의 불법·편법 행위에 대한 미약한 처벌 △노조의 영향력 쇠퇴 △노동자 입장을 대변할 정당 부재 등을 고공농성이 잇따르는 배경으로 꼽는다.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조선시대의 신문고 역할을 하고 있다.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 고공농성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것”이라고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말했다. “노동자들이 정당과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유럽과 달리 그런 경로가 아예 차단된 한국의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고공농성과 같은 극단적 투쟁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말했다.
초겨울 칼바람을 하늘 위에서 온몸으로 맞고 있는 농성자들이 언제 내려올지는 기약이 없다. 4곳의 고공농성자들 모두 사태 해결 때까지 농성장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심상완 창원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기업이 노동조합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노동자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정치적 제도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철탑에 오르는 노동자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평택 동두천 아산/정환봉 홍용덕
박아름 최유빈 김규남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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