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최병승(왼쪽)씨와 천의봉씨가 고공농성 21일째인 7일 철탑 아래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 23m 철탑 농성장 동숙해보니…
울산/글·사진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한겨레 등록 : 2012.11.08 20:24수정 : 2012.11.08 23:07
23m 철탑위 칼바람에 다리 후들…그들은 꺾이지 않았다
현대차 송전탑농성 동숙 르포
50m 높이의 송전탑은 거대했다. 그 중간쯤인 23m 높이에 두 사내가 있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2005년 해고된 최병승(36)씨와 민주노총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 천의봉(30)씨가 송전탑 위에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굽어봤다. 그들이 울산 북구 양정동 현대차 울산공장 명촌중문 근처 송전탑 위에서 농성 516시간을 넘긴 7일 아침 9시, 기자도 그 탑에 올랐다.
사지가 후들거렸다. 지상에서 4m 높이에 이르기까지 철탑에는 손잡이와 발판으로 삼을 만한 게 없었다. 철제 난간과 기둥을 요령껏 잡고 디디며 올랐다. 4m 높이를 지나자 두툼한 대못이 박혀 있었다. 높이 오를수록 바람이 온몸을 때렸다. 현기증은 발아래 세상을 흔들었다.
20여일 전 그들이 부둥켜쥐고 올랐을 철제 기둥과 8분여 동안 씨름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 오셨어요. 머리 숙이고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농성장은 3평 정도였다. 가로 50㎝, 세로 2m의 철판 10여개를 바닥에 잇대고, 녹색 천막으로 지붕을 삼았다. 농성 초기 두 사람은 두께 2㎝ 합판 위에서 맨몸으로 지냈다. 돌아누울 공간도 없었다.
농성 시작 뒤 주말마다 비가 왔다. 천둥번개도 쳤다. “누울 수가 없어 비 맞고 계속 앉아 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천씨는 회고했다. 비바람과 번개 속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그들을 지상의 비정규직 동료들이 많이 걱정했다. 지난달 26일 철판을, 3일에는 천막을 올려보냈다.
“현대차 위선의 가면 벗기겠다”
아찔한 고공농성 어느새 540시간
‘하루 두끼’ 밧줄 따라 용변 처리
한밤 ‘체감 영하’ 침낭속 오들오들
지상의 촛불집회땐 ‘노래로 함께’
“8년 비정규직 싸움도 견뎠는데…
판결보다 나은 합의땐 내려갈 것”
그래도 23m 높이 농성장의 안전은 보증되지 않는다. 그냥 잇대어 붙인 철판들 사이로 저 아래 땅이 보일 때마다 공포가 밀려왔다. 바닥과 천막은 계속 흔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철로가 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는 공기를 밀어내고, 그 공기는 ‘우우웅’ 소리내며 밀려와 연신 철탑을 흔들어댔다. “바람이 많이 불면 침낭 안에 들어가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버텨요.”
바람 말곤 벗할 게 없는 철탑 위에서 두 사람은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살핀다. 낮 12시10분께 밥이 올라왔다. 송전탑 아래로 밧줄을 내리면 동료들이 먹거리를 걸어 준다. 밧줄은 생명줄이다. 검은 보따리에 보온병 2개, 떡국, 김치 등이 담겨져 올라왔다. 허겁지겁 끼니를 때운 뒤, 보온병 안에 담긴 뜨거운 물로 1회용 봉지 커피를 타서 마셨다. 뼛속 깊이 박힌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드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자주 즐길 순 없다. 적게 먹어야 한다. 배설량을 줄이려고 하루 두 끼만 먹는다. 농성장 한켠에는 소변이 가득 담긴 페트병이 놓여 있었다. 페트병이 익숙지 않았던 기자는 참고 참다가 철탑에 오른 지 6시간 만에 소변을 봤다. 천막의 천장이 낮아 무릎을 꿇고 일을 치러야 했다.
대변은 칠흑 같은 새벽에 처리한다. 기자가 있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누군가 보고 있을 것이라는 수치심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음식이 올라온 밧줄을 타고 용변은 땅으로 내려간다. “동료들에게 제 용변을 치우게 하는 게 늘 미안해요.” 최씨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냄새까지 아래로 내려보낼 수 없다. 세찬 바람조차 두 사람의 퀴퀴한 냄새를 몰아내진 못했다. 물티슈로 대충 얼굴만 닦는다. 8일에 한번 정도 페트병에 물이 담겨 올라오면, 머리를 감고 발을 닦는다. 최씨 등의 얼굴은 늦가을 햇볕과 차가운 바람에 타고 얼어 새카맸다.
“이건 고생도 아니죠.” 부어 있는 얼굴로 최씨가 말했다. “고공 농성보다 비정규직으로 사는 것 자체가 더 힘들어요.” 2002년 현대차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최씨는 2004년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싸웠다. 2005년 해고 뒤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조합원 2명이 분신했고 160명이 해고됐고 1000여명이 징계당했다. 사쪽의 민형사상 고소고발로 노조원들이 짊어진 벌금만 6억원이다.
2004년엔 노동부가, 2010년과 2012년엔 대법원이 “현대차는 불법파견 사업장으로, 최씨는 이미 현대차 (정규)직원”이라고 판결했지만, 현대차는 불법파견을 인정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최씨는 “최소한 대법원 판결보다는 더 나은 노사합의가 나와야 내려가지 않겠느냐”며 쓰게 웃었다.
오후 4시, 두 사람은 노래를 연습했다. 매일 저녁 6시 송전탑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날 최씨 등은 드라마 ‘마지막 승부’ 주제가를 부르기로 했다. 어스름이 깔리자 350여개의 촛불이 켜졌다. 노래는 연습한 것과 조금 달랐다. 음정과 박자가 따로 놀았다. 잠시 피로를 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웃음이 고공과 지상의 바람을 타고 번졌다.
밤 11시40분, 천막 안에 두 농성자와 기자가 몸을 뉘었다. 이날 기상청이 발표한 최저기온은 7℃였다. 하지만 23m 상공의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기자는 양말 2개, 내복, 청바지, 면티셔츠, 털옷, 남방셔츠, 카디건, 오리털 잠바에 목도리로 감싸고 최씨가 양보한 두꺼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추웠다.
밤새 추위에 시달린 최씨는 다음날 아침, 계속 기침을 했다. 농성 첫날 올라오다 다친 천씨의 오른쪽 검지는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괜찮아요.” 건강을 걱정하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들은 좀체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8일 아침 9시, 기자는 땅을 다시 밟았다. “입법·사법·행정부 모두 인정한 사실을 현대차가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꼭 널리 알려달라”고 말하며 두 사람은 기자를 배웅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되살릴 소식이 송전탑 아래의 땅에 전해졌다. 8월21일 중단했던 노사특별교섭이 8일부터 재개됐다. 아득히 멀어진 최씨와 천씨가 칼날 같은 바람을 헤집고 손을 흔들었다.
울산/글·사진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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