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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시대 사상의 은사` 리영희 [추모영상]

참된 2011. 1. 9. 10:38

 

 

 

 

 

 

 

 

 

 

 

 

 

 

 

 

 

 

 

 

자유인 리영희

 

부음을 듣고 내내 마음이 울적하다. 육친도 아니고, 특별한 사적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장일순,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만, 그때에 비해서도 상실감이 더 크다. 연평도 사건 이후 더 급박해진 위기상황 때문일까. 십년 전 서해상에서 남북간 충돌이 발생했을 때 ‘북방한계선’의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주신 선생님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 않았을까.

 

서둘러 빈소를 찾고 싶었으나 자신을 광고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을 것 같아 미루고, 대신 오랜만에 선생님의 책을 몇 권 꺼내서 두서없이 읽기 시작했다. 이내 특유의 치밀하고 견실한 문장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행복을 누렸다. 낯익은 문장이 대부분이지만, 다시 보니 의미가 새롭고, 세월에 관계없이 지금도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 표현과 생각이 풍부했다.

 

리영희는 탁월한 언론인,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내가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힘차고 정밀한 문체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 세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직업적 문필가들의 문장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아니었다. 새 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한다는 글들이 매우 비논리적이거나 감상적인 문체였다. 그 상황에서 리영희라는 한 외신기자의 문장은 나와 같은 문학도가 질투를 느끼며 흉내를 내고 싶은 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문장에는 지적 태만과 후진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이 없었다.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사태의 근저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강인한 지적 체력에서 리영희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글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니라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뒷받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경미 교수의 말처럼 “그 일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결정판이자 사회적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의 생애는 가장 수준 높은 지식인의 일생이었다. 지식인이란, 리영희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자주적 정신과 양심에 의거하여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충성하는 ‘자유인’이다. 근 50년에 걸친 치열한 언술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끊임없는 수난은, 본질적으로 이 자유인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인간적 위엄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리영희에게 그것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억누를 수 없는 생리적인 욕구였다. 군사통치하에서 그는 무엇보다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노예의 삶이었다.

 

그러나 리영희가 바란 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으나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용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어디서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몰상식과 비이성이었다. 민주정부 십년 동안에도 그는 권력에 비판적이었다.

 

리영희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철저한 무사(無私)의 정신이다. 20대 통역장교 시절 진주기생 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지적·정신적 강인성을 뒷받침하는 근본 에너지가 무엇이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근원적 겸허함, 소박함이었다. 비슷한 연배였던 장일순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리영희였다. 장일순과의 교유 탓도 있겠지만, 만년에 이를수록 리영희는 ‘문명’의 위기 증상에 예민한 관심을 드러냈다. 부탁도 드리지 않았는데 <녹색평론>에 원고를 자진해서 보내주신 것 등은 그런 관심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리영희라는 위대한 정신이 남겨놓은 사상적 유산은 크고 깊다.

 

20101207한겨레 김종철

 

 

 

 

 

 

 

 

 

 

 

 

 

 

 

 

 

 

 

 

 

 

출처 :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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