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가 내미는 죽은 자에 대한 손짓
김기 기자 (mylove991@hanmail.net) 오마이뉴스 2003.10.0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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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영화 <영매> 포스터 | |
ⓒ2003 M&F |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연재되다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퇴마록"이란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퇴마사"가 아닌 "영매"가 우리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다큐 영화 "영매"가 다큐멘터리 영화사상 최고 관객수를 연일 돌파하면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화제를 낳고 있다.
또한 다큐 영화로써는 드물게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서울의 메가박스에서도 상영되었고 부산의 DMC에서는 아직도 상영을 하고 있다. 더불어 이 영화를 혼자서 다 만들다시피 한 박기복 감독은 밀려드는 인터뷰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영화 스타 설경구가 대가없이 내레이션을 맡아준 것도 흥미롭지만 사실 이 영화의 제작비를 댄 영화음악가 조성우씨도 엉뚱하기는, 3년동안 제작에 매달린 박 감독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촬영기간만 1년 6개월이었다. 안면 있는 무당과의 1년 6개월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인데 그렇지 않을 박 감독의 1년 6개월은 또 다른 다큐감일 것이다. 빠듯한 인터뷰 일정 때문에 인터뷰 약속 잡기에 힘겨워 하는 박 감독을 괴롭히기보다는, 그가 만든 영화를 영화적 측면이 아닌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인 무속에 대한 내용적 접근을 통해 지면을 메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메일과 전화를 통해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그것은 나중 또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먼저 영화 소개하는 것이 순서겠다. 박기복 감독의 다큐 영화 영매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무당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무속은 평안도권, 황해도권, 서울 경기권, 충청권, 전라권, 경상권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주로 황해도굿과 전라도 진도 지역의 굿과 무당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었다.
무속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벌써 눈치챘겠지만, 강신무와 세습무를 구분해 영화를 구성하였다. 영화 초입에서 동해안 별신제 장면이 잠시 나오지만 이 영화는 황해도굿을 하는 박미정 만신과 전라도 진도의 세습무 채정례 당골, 강신무 박정자 무당에 주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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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면 속의 박미정 무당 | |
ⓒ2003 M&F |
다큐 영화이니 영화적 기법보다는 얼마나 주제에 성실한 접근을 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우선 일 것이다. 성급하게 결론부터 내린다면 썩 잘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본인이 우리 무속에 대한 관심이 많이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공부한 토대에서 낸 결론이다. 물론 이 다큐가 전문가를 위한 것이라면 대단히 미흡하겠지만 극장 개봉이라는 수단을 전제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박기복 감독의 접근은 성실해 보였고 스스로의 한계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필자는 이 영화가 현실에 빛을 보게 된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영화 전문 상영관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 막간에 이루어진 "관객과 감독의 대화" 장소를 찾았다. 일대 일 인터뷰보다는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과 묻고 답하는 현장에서의 대리 인터뷰도 나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객의 대부분은 젊은층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상당히 진지하였고 대답하는 박기복 감독은 상기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공(철학) 탓일지, 책을 읽는 것처럼 또박또박 내용을 짚어 갔다. 말하는 재주가 있어 보인다. 하기사 영화감독이란 또 다른 이야기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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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퍼텍 나다에서 관객과 대화 중인 박기복 감독 |
ⓒ2003 김기 |
그중 한 관객의 질문이 어쩌면 이 영화를 찾는 젊은층들의 공통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관람한 듯한 이민숙(회사원)씨의 말을 옮겨본다. "어릴 적부터 강신무의 굿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랐는데, 제도 교육권 내에 들면서 교육받은 것은 그러한 유아 경험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하더군요. 때문에 어릴적 경험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를 봄으로 해서 비로소 가슴 속 갑갑함을 털어놓는 기분입니다." 맞다. 기자 본인도 어린 시절 동네에서 벌어지는 숱한 굿판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런 경험을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나이 먹은 세대에서는 제도와 교육이 무속을 구속하고 억압하였지만 요즘은 하이테크라는 패러다임이 무속과의 거리를 벌리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영혼이 무당의 굿거리를 통해 현재화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은, 과학적 사고를 요구받아온 현대인들에게 분명 혼란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쳐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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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복 감독 |
ⓒ2003 김기 |
제목이 그런지라 박기복 감독의 영화 "영매"는 굿 중에서도 천도굿에 관하여 초점을 맞췄다. 이도 지역에 따라 명칭이 사뭇 다른데 황해도굿에서는 수왕굿이라 하고 진도에서는 씻김굿이라 한다. 관객들의 감정을 흐뜨렸던 대목은 아무래도 진도굿의 마지막 명맥을 잇고 있는 채정례 당골(전라도 지역의 세습무 명칭)이 친언니인 채둔굴 당골의 씻김을 맡는 장면일 것 같다. 유난히 소리와 음악적인 부분이 강한 전라도굿의 특성상 씻김굿 장면은 자연 음악적 요소가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이 굿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박 감독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필자에게 익숙한 굿 사설에 무릎장단을 치며 즐거워하는 동안 관객들은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일순 장단을 거두고 실루엣으로 비쳐지는 그들의 당황해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본인 스스로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미소를 짓게 되었다. 무속에 대해서 알던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들 모두는 삼신할미의 영험한 점지로 이 땅에 태어난 같은 민족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국악장단 중 굿거리 장단이 어떤 이유에서 우리의 기본장단인지 짐작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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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복감독 | |
ⓒ2003 김기 |
그러한 의미에서의 쾌재였지 않을까 하는 미소였다.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동안 관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영화가 주는 감동도 그렇지만 눈물을 추스를 시간도 좀 필요했을 것이다. 극장 밖은 가을 오후 햇살이 눈높이에 맞춰져 가뜩이나 여려진 눈망울을 파고 들었다. 한 무리가 극장을 나오고 또 그만큼의 젊은이들이 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다큐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1만 명을 돌파하여 화제를 낳았는데 이 정도면 2만 명도, 그 이상도 너끈해 보였다. 시대의 비주류인 다큐 영화이자 비주류 주제인 무속을 다루어 주류권에 작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영매"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영화 주제는 그럴지라도 영화를 다 본 후 기자의 바람은 이 영화를 매개로 하여 조상 대대로 이어온 민족신앙인 무속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말들을 흔히 하고 있는데,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제도나 법률 등의 변화보다는 이렇게 작은 흔적으로 발견되는 인식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에 이어 옛 것과 지금의 좀더 적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흐르는 진도 장례의 모습은 그러한 의도 혹은 바람에 대한 상징으로 보였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상여 행렬을 보여준 감독의 의도를 그렇게 해석해 보았다.
/김기 기자 (mylove991@hanmail.net)
덧붙이는 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채정례 당골과 진도 씻김굿에 대해서는 작년 전주산조예술제 관련 망자혼사굿 기사와 KBS의 특집 다큐 "소리"를 참고하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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